헤겔의 『정신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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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정신현상학』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0.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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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8강〉_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1. 서양사상 제 8강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강연 중 서론부와 『정신현상학』의 부분별 내용 파트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헤겔의 『정신현상학』


김상환 교수는 “서양 철학의 고전 중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이지만 “철학의 모든 영역을 끌어안고 있는 책”인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소개한다. 그 같은 저작 안에는 헤겔 고유의 “철학적 입장”, 소위 “‘사변적 이성’의 관점에 도달하기까지 넘어서야 했던 수많은 역경이 기록”되어 있으며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대를 주름잡던 다양한 철학적 입장과 씨름하는 모습도 포함”되어 있는 만큼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철학적 자서전인 동시에 해체론적 논쟁서”라고 말한다. 특별히 “지성적 반성”이 대표하는 “이분(二分)의 논리”가 아닌 “불이(不二)의 논리”를 따르는 “이성적 사변”에 주목해 볼 것을 주장한다. 거기에 더해 이 책이 “인간사의 다양한 희비극적 서사가 펼쳐지는 거대한 극장”과도 같아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고 전한다. 이는 푸코가 “세계는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자기 자신을 체험하고 인식하는 장소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서구 철학의 핵심 문제”라 할 때 “그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가는 최고의 걸작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가리키는 것, 그리고 “서양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역사적 세계관의 체계”를 담고 있다”라는 하이데거의 『정신현상학』에 대한 평가도 모두 같은 맥락에 놓여 있음을 이야기한다. 

 

지난 9월 11일, 김상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신현상학』의 매력과 난해성 

철학사를 돌아보면 장르마다 그 분야를 대표하는 고전이 있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고전, 윤리학이나 실천철학을 대표하는 고전, 인식론이나 언어철학을 개진하는 위대한 저작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분야를 한 권에 섭렵하는 철학책은 무척 드물다. 칸트는 이론철학, 실천철학, 예술철학을 세 비판서를 통해 각각 개진했다. 그러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세 분야 이외에도 언어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등 철학의 모든 장르가 들어와 있다. 이 점에서 헤겔의 책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 저작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독립된 장르를 이루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의 책은 심오하고 방대한 만큼 난해한 책이다. 서양 철학의 고전 중 가장 읽기 어려운 책으로 정평이 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헤겔의 책은 애초에 교수 자격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출판 후에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헤겔이 철학자로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논리의 학』(1812)을 출간하고 나서다. 『철학 백과』(1817)를 발표하고 난 이후에는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철학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정신현상학』이 당대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문장의 밀도부터가 너무 높아서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난해의 장막이 저작의 내용이 발하는 빛을 가린 것이다. 

 

『정신현상학』과 20세기 헤겔 르네상스 

헤겔이 철학자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논리의 학』과 『철학 백과』를 발표하고 나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현상학』의 영향은 커져온 추세다. 그 이유는 아마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두 책은 어떤 완결된 내용과 완성된 체계를 자랑할지언정 첫 저작과 비교해보면 왠지 화석화된 체계, 죽어 있는 공룡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정신현상학』은 공포스러울 만큼 난해한 문장에 여기저기 비일관성을 노출하지만, 헤겔 철학이 태어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재연(再演)하고 있다. 첫 번째 책의 독특한 위상은 무엇보다 여기서 찾아야 한다. 

 

자서전적인 철학 극장 

이 작품에는 저자가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입장(이른바 ‘사변적 이성’의 관점)에 도달하기까지 넘어서야 했던 수많은 역경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대를 주름잡던 다양한 철학적 입장과 씨름하는 모습도 포함된다. 이 점에서 『정신현상학』은 철학적 자서전인 동시에 해체론적 논쟁서라 할 수 있다. 독창적인 사상의 탄생 내력을 철학자 자신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상세하게 회고하는 자서전이자 그렇게 탄생한 사상의 지고한 위상을 세상에 입증하는 시대와의 논쟁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신현상학』은 철학적 자서전이나 해체론적 논쟁서로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이나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비견할 만큼 인간사의 다양한 희비극적 서사가 펼쳐지는 거대한 극장과도 같다. 수많은 스토리가 연출되는 만큼 거기에는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 『정신현상학』 발휘하던 뜨거운 영향력은 주체의 죽음을 내세우는 구조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퇴조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부침과 무관하게 『정신현상학』은 꾸준히 그 숨은 면모를 드러내면서 고전적인 가치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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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의 부분별 내용 

『정신현상학』은 이중의 구조를 지녔다. 즉 A에서 C에 이르는 전반부와 AA에서 DD에 이르는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의식의 형태를, 후반부는 세계의 형태를 다룬다. 세부 목차를 빼고 큰 뼈대만을 추린 순서를 다시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A. 의식 
B. 자기의식 
C. (AA) 이성 
(BB) 정신 
(CC) 종교 
(DD) 절대지 

의식, 자기의식, 이성은 의식의 세 유형이다. 세 유형 간의 차이는 인식의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의식에게 인식의 대상은 외부 사물이다. 그렇지만 자기의식은 외부 사물대신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다. 이와 달리 대상의 자리에 보편적인 것(사태, 범주, 세계)이 놓이면, 의식은 이성이 된다. 이성-장은 세계를 인식하는 보편적 개인에 주안점을 둔다는 점에서 의식의 형태에 관한 마지막 서술(C)인 동시에 세계의 형태에 관한 첫 번째 서술(AA)이다. 세계의 형태는 의식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A~C)를 통해 서술된 후 민족(국민)의 역사(BB)와 종교의 역사(CC)를 통해 다시 서술된다. 

그러나 정신-장(B) 시작 부분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그 이전까지 등장했던 모든 형태는 정신(실체, 전체)의 자기 분화(Selbst-Analysis)에서 비롯된 2차적 효과다. 이는 의식의 세 유형(의식, 자기의식, 이성)이 모두 정신의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의식의 역사, 민족의 역사, 종교의 역사는 모두 정신의 현상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역사를 다루는 저작의 이름은 ‘정신현상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정신현상학』의 첫 대목인 의식-장(A)에서부터 마지막 대목인 절대지-장(DD)까지의 전체 줄거리를 추려보도록 하자. 

 

1) 의식-장(A) 

의식-장의 문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의 인식론적 태도에 있다. 서술은 다른 장과 마찬가지로 3단계의 리듬을 밟는다. 세 부분은 각각 ‘감성적 확신,’ ‘지각,’ ‘힘과 지성’이라는 표제가 붙는다. 감성적 확신의 주체는 직관주의자다. 지각의 주체는 실체주의자이며, 지성의 주체는 초감성적인 법칙으로 향한다. 헤겔은 이런 세 태도가 각각 안고 있는 내적 모순을 드러내고, 이것들 사이의 필연적 이행 관계를 밝힌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감성적 확신의 주체는 개념이나 이론, 심지어 언어까지 혐오한다. 그런 추상적인 조작물은 있는 그대로의 구체적인 사실을 왜곡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것이 믿고 확신하는 것은 감성적 직관뿐이다. 감성적 직관을 통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금-여기’의 개별적 대상 ‘이것’과 일체를 이룰 때만 우리는 가장 확실하고 참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생생하고 충만한 내용은 타인에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을 말로 전달하려 하자마자 감성적 확신의 주체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동원하는 범주나 술어는 모두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표현 ‘지금’ ‘여기’ ‘이것’부터가 각각 무수히 많은 다른 ‘지금,’ 다른 ‘여기,’ 다른 ‘이것’과 비교되어 대조를 이룰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이런 대립과 차이의 그물 바깥에서 고립된 지금, 여기, 이것은 그 자체가 공허하고 추상적인 점, 무의미한 점에 불과하다. 구체성은 언어의 바깥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언어의 보편적 지반 위에서, 거기서 펼쳐지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그 관계의 그물에 따라 일어나는 역동적인 매개의 운동에 구해야 한다. 

이 점을 인정하면 감성적 확신의 주체는 지각의 주체로 바뀐다. 지각의 주체는 인식 대상을 ‘다양한 성질을 지닌 사물’로 설정한다. 여기서 성질은 형태, 색깔, 냄새 등과 같은 보편적이고 지각 가능한 성질이다. 그리고 사물은 이런 여러 성질이 공존하는 바탕이다. 인식 대상을 이렇게 설정하면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사물의 개체성을 설명하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성질들이 병존(Auch)하는 측면과 이 성질들이 일체(Einheit)를 이루는 측면을 화해시키는 문제다. 이른바 일자와 다자의 모순을 해결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플라톤 이래 최근까지 서양의 인식론을 괴롭혀온 최고의 난제 중 하나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각의 주체는 사물을 다양한 성질의 통일성이나 배타적 개체성을 설명하는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러면 이때의 사물은 파악 불가능한 속성 부재의 실체, ‘물 자체’로 남는다. 그렇다면 지각의 주체는 다양한 성질을 모든 통일성과 구별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러면 이때의 사물은 자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매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각의 주체는 다양한 성질의 통일성이나 차이가 의식에서 연유하는 주관적 규정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면 사물은 아무런 성질도 지니지 않는 것이 되므로 다른 사물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지각의 주체는 사물 상호 간의 관계에 착안하여 사물이 자립적(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측면을 본질적 성질이라 하고,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대타적) 측면을 비본질적 성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본질적인 성질도 역시 다른 본질적인 성질(사물)과 대립 관계 속에 규정된다. 게다가 비본질적 성질은 본질적인 성질과 짝을 이루면서 그것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므로 본질적 성질(사물)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본질과 비본질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이렇게 지각의 주체가 사물-속성의 구도에 갇혀 여러 모순을 전전하다 마침내 탈출구를 발견한다. 그것은 인식 대상을 사물대신 그 배후의 힘으로 설정할 때다. 중력이나 자기력 같은 것이 좋은 사례다. 그런데 사물 배후에 설정된 힘의 세계는 더 이상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초감성적인 세계다. 따라서 의식은 감성적 지각 대신 지성을 통해 그 힘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파악하고자 한다. 헤겔은 그런 힘과 법칙의 세계를 “전도된 세계”라 부른다. 그러나 그 과학의 세계는 여전히 지성에 고유한 이분법(동등/부등, 연속/불연속, 실재/가상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의적이다. 헤겔은 지성의 전도된 세계를 다시 전도하여 실재와 가상의 구별이 사라지는 “내적 차이”의 세계, 불이(不二)의 논리에 따라 펼쳐지는 절대적 개념과 무한한 생명의 세계를 가리면서 의식-장을 마무리한다. 

2) 자기의식-장(B) 

의식이 대상에 맞서 있는 인식의 주체라면, 자기의식은 대상에 맞서 있는 행위의 주체다. 의식은 인식보다는 행동 속에서 자기를 의식하게 된다. 행위 속에서 자기를 의식하는 주체는 의식의 주체이기 앞서 욕망의 주체다. 자기의식은 자신의 결핍을 대상에 대한 행동을 통해 메우려는 욕망 속에서 움튼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의 대상을 지닌다. 그것이 인정의 욕망이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인간에 의해 그 주체성을 널리 인정받기를 욕망한다. 이런 보편적 인정의 욕망 때문에 인간은 자연에 없는 상징적 가치를 추구한다. 

인간에게 인정의 욕망은 너무도 중요한 나머지 때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므로 상징적 질서(문화의 세계)가 열리는 신화적 기원에 헤겔은 ‘생사(生死)를 건 인정 투쟁’을 놓는다. 여기서 자연적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인정 욕망이 강한 자가 주인이 되고, 타인의 인정 대신 자연적 생명을 선택하는 자는 노예가 된다. 노예는 죽음의 공포 속에 주인을 위해 봉사한다. 그것이 노동이다. 노예는 자기 내면의 죽음의 공포를 대상 속에 주입하여 자연적인 것을 지배, 변형해간다. 그 자유로운 노동 속에서 노예는 점차 자립성을 획득하는 반면, 주인은 쾌락의 향유에 빠져 비자립적 존재로 전락해간다. 

이로써 주인은 노예의 노예로, 노예는 주인의 주인으로 전도된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하면서 자기를 변형해가고, 마침내 대상 일반에 대한 자립성을 획득한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자기 관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노예적 자기의식은 일련의 형태 변화로 접어든다. 노예적 주체가 스토아적 주체로, 스토아적 주체는 회의주의적 주체로, 회의주의적 주체는 불행한 의식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스토아적 주체의 특징은 세계에 종속되지 않는 내면적 자유의 주체다. 그는 자기 내면에 스스로 구축한 의지의 왕국에 거주하는 자유로운 주체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자유는 현실적인 자유가 아니라 관념적인 자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 속에 스토아적 주체가 현실과 적극적으로 관계할 때, 그는 회의주의자가 된다. 현실에서 자리 잡은 이러저러한 기준, 대상에 가해진 이러저러한 규정,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의식 내면의 이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모두 엉터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적 주체는 세상에 단단히 고착된 고정 관념들을 내면의 활력적인 사유의 힘을 통해 모두 부정해간다. 그 정교하고 논리적인 부정 속에 사물의 규정성이 전적인 유동성에 빠지지만, 이와 더불어 회의주의적 주체 또한 일관성을 상실한다. 부정을 위한 부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느끼는 만큼, 자신이 옹호했던 주장마저 타인이 긍정하자마자 부정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모순은 자신이 회의를 통해 가상으로 전락시킨 이 세상에서 그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현실적으로 행동하고 태연히 살아간다는 데 있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철학을 반박하는 셈이다. 이런 자각 속에서 회의주의자는 세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성마저 의심하게 되고, 자신이 빠져 있는 가변성의 세계 저편에 영원불변(신)의 세계를 설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회의주의적 주체는 불행한 의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불행한 의식은 기독교를 수용한 중세 유럽 지식인의 의식을 대변하고, 기독교 삼위일체론이 계시한 진리를 단계적으로 내면화하는 세 단계의 절차 속에서 근대적 세계의 문턱에 이른다. 

먼저 불행한 의식은 성부 체제 속에서 자기를 의식한다. 여기서 그는 가변적 세계의 피안에 설정된 아득한 불변자를 절실히 느끼고 ‘동경’하는 주체다. 두 번째로 불행한 의식은 성자의 체제에서 자기를 의식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세상을 신이 육화된 신성한 장소로 경험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복된 노동과 그 결실의 향유를 허락한 신에게 날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불행한 의식은 동경과 감사의 단계를 지나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는 ‘죄’를 의식하게 된다. 자신이 얻고 베푸는 모든 것을 신의 은혜로 돌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고유한 자긍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행한 의식은 성령의 체제를 대변하는 교회에 자기를 맡긴다. 이때 교회는 근대 국가의 원형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 자기 말과 행위에 숨어 있는 자기중심주의를 찾아 폐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이 지닌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예식의 절차와 노래에 자기를 내맡기며, 단식과 고행으로 육체적 욕망의 싹을 제거한다. 이런 세 단계를 통과할 때 불행한 의식은 십자군 전쟁의 시기를 지나 종교 개혁의 시기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이것은 근대의 역사로 이행하는 문턱에까지 도달했음을 말한다. 

 

3) 이성-장(C/AA) 

여기서 이성은 근대적 이성이며, 더 정확히 말해서 19세기 독일 관념론 시대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개인주의적 이성이다. 여기서 이성은 또한 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이기도 하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이론적 주체였다. 자기의식은 보편적 인정을 욕망하는 실천적 주체였다. 이성은 이론적 주체인 동시에 행위의 주체다. 그래서 이성-장은 두 부분에 걸쳐 자연을 인식하는 이론적 이성과 공동체 속에서 행동하는 실천적 주체를 각각 다룬다. 

그러나 이성은 의식이나 자기의식보다 이미 한 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즉 의식과 자기의식은 세상에서 특수한 대상이나 이러저러한 타인과 관계한다. 반면 이성은 보편적인 범주나 법칙과 관계하고, 이를 통해 사유와 존재의 통일에 이른다. 이성이란 곧 “자신이 온갖 실재”라는 확신에 도달한 의식, 자신에게 주어진 법칙이 그대로 실재의 보편적 법칙이라 믿는 의식이다. 이런 이성의 확신은 특이한 행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물 속에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려는 자기애적 행태다. 사물이 거울인 양 거기에 투사된 자기 내면의 모습을 찾고 향유하려는 나르키소스적 유희가 계속 반복된다. 

가령 이성은 자연의 유기체에서 자신의 자기의식을 재발견한다. 유기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타자와 얽히면서 변화해가지만 언제나 다시 자기로 복귀하여 중심을 잡아가고, 스스로 모든 운동의 목적이 되어 그 복잡한 분화의 과정 끝에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원환적 복귀의 과정에서는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 부분과 전체 등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동시에 그 안으로 끌려 들어오는 타자의 잡다한 자연적 규정이 용해되어 단순한 종합 속에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이런 점은 자기 의식적인 사유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기의식이 유기체를 관찰할 때 발견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본질이다. 즉 자기의식은 생명이 있는 사물로서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176/177) 

그러나 이성은 자신의 모습이 자연의 유기체로 환원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유기체의 세계, 생물학의 세계에서는 유(類)라는 보편자는 곧바로 개별적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보편자와 개별자를 매개하는 특수한 개성이 없다. 가령 개들은 모두 개의 유적 보편성을 구현하는 동등한 개체들이다. 거기에는 특수한 내면적 개성부정성을 지니는 개는 없다. 특수한 것 같이 보이는 속성은 내면의 자기(부정성)에 근거한 특수성이 아니다. 다만 외부 환경에 의해 강요된 우연한 특수성, 따라서 무력하고 무의미한 특수성에 불과하다. 반면 이성은 자신이 지닌 자기의식에서 보편성과 개별성 이외에 특수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보편성을 수용하거나 적용하는 독특한 자신만의 관점에서 오는 특수성, 자기의 부정하는 역량에 기초한 특수성이다. 

이것은 헤겔을 읽는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점이다. 즉 이성이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정신적 생명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보편성과 개별성으로 구조화된다. 반면 정신적 생명은 보편성과 개별성 이외에 특수성을 지닌다. 이 세 가지 항은 삼단논법의 구조를 이룬다. 내면적 부정성(자기)에 기초한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과 개체성이 매개되는 추론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그런 삼단논법의 구조를 지닌 생명을 개념, “자유로운 개념”(201/200)이라 부른다. 이런 자유로운 개념은 오직 이성적 자기의식 속에서만 발견된다. 우리는 강연 앞부분에서 의식의 자기 초과적인 외출의 구조를 소개할 때 이런 의식에 내재한 개념에 대해 이미 언급했음을 기억하자. 그때와 달리 지금 강조해야 할 것은 이런 자유로운 개념(생명=정신) 덕분에 이성적 의식은 일련의 특수한 형태를 띠게 된다는 점이고, 그 일련의 형태가 체계를 이루는 과정이 『정신현상학』이 서술하는 역사(세계사) 자체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역사의 세계로 곧바로 진입하지 않고 근대의 이성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적 개성을 재발견하려는 악착같은 노력을 계속 서술한다. 그것이 유기체의 서술 다음에 이어지는 관상학과 골상학에 관한 서술이다. 관상학은 내면적 자기의 반성적 활동이 얼굴을 통해 표현된다고 믿는다. 골상학은 심리적 과정이 일어나는 뇌의 활동이 두개골의 굴곡을 통해 외면화된다고 본다. 정신은 곧 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면적인 자기는 자연의 대상처럼 이론적으로 관찰되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의식에 내재한 개념(생명=정신)이 그런 자연적 대상의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면적 자기는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실천의 차원에서, 상호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특수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성-장 후반부에서 자신의 시대에 등장한 여러 유형의 개인주의를 돌아본다. 여기에서는 쾌락주의자, 혁명주의자, 도덕주의자, 인문주의자, 법률주의자가 하나의 행렬을 이루며 차례로 등장, 소멸해간다. 이들은 자신이 당대의 사회적 통념보다 우월한 관점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이상적인 사회 모델에 따라 기존의 모든 법률과 규범에 반대할뿐더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다가 현실의 저항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다. 근대의 역사적 현실은 이렇게 기존의 규범에 도전할 정도로 개성이 강한 개인적 주체들이 등장, 소멸하는 가운데 진화해간다. 말하자면 이런 특수한 개인들 근대적 정신을 현실적으로 분화하는 주요 작인에 해당한다.

 

4) 정신-장(BB) 

근대적 개인주의의 끝에서 이성적 주체가 마침내 경험하는 것은 모든 법률적 형식을 초과하는 인륜적 전체성과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정신이다. 헤겔은 이 점에서 출발하여 『정신현상학』에서 가장 긴 정신-장을 써내려간다. 여기서 정신은 주관 정신이나 절대정신과 구분되는 객관 정신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사회의 법률 및 제도적 질서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정신이다. 정신-장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와 로마 제국에서 시작하여 봉건 체제와 프랑스 혁명을 거쳐 칸트 이후 독일의 정신 혁명에 이르는 유럽 정신의 역사를 서술한다. 여기서 서술의 대상은 더 이상 의식의 형태가 아니다. 의식의 형태 대신 객관 정신의 형태, 곧 세계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탄생, 소멸하는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세계 형태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고대 유럽을 선도한 그리스-로마 민족, 중세 봉건 체제에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에 이르는 역사의 주인공 프랑스 민족, 칸트 이후의 정신혁명을 주도한 독일 민족의 역사가 이번 장의 서술 과제다. 그러나 실제의 서술은 이 세 민족의 인륜적 정신 자체가 아니라 그 인륜적 정신을 탁월하게 구현하는 범례적 위치의 개인(보편적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술의 관건은 공동체를 조직하는 규범(법)과 언어, 그리고 그것에 관계하는 범례적 개인의 행동과 언어를 통해 각 시대의 정신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나 이성-장의 근대적 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주인공들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알지 못한 채 행동하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휩싸여 보복을 당하는 비극적 주체다. 

헤겔은 소포클레스 비극 『안티고네』의 두 주인공을 통해 고대의 아름다운 인륜을 구성하는 두 개의 법(가정의 법과 국가의 법)이 어떻게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지를 서술한다. 이후 등장한 로마 제국에서는 법률에 의해 추상적으로 정의된 개인들이 영혼 없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로마 민족의 역사 이후에 펼쳐지는 게르만 민족의 역사는 ‘소외된 정신’의 역사이자 그 소외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형성해가는 문화적 도야의 역사다. 그것은 즉 자연적으로 주어진 (야만적) 본성과 권리를 버리고 새로운 문화적 본성을 획득해가는 문명화의 역사다. 그 역사는 구체적으로 봉건 체제를 시작으로 절대 군주를 거쳐 혁명 전야의 계몽주의에 이르는 시기로 이어진다. 

이 시기를 서술할 때 헤겔은 언어(충언의 언어, 아첨의 언어, 분열의 언어)를 통해서 일어나는 자기소외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특히 계몽기의 정신을 대변하는 분열의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세밀히 분석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후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를 서술하면서 특수한 제도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일반의지,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일반의지의 광기를 고발하면서 두 번째 단계의 역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세 번째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독일의 정신세계에 관한 서술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칸트의 도덕적 세계관에 숨어 있는 모순을 들추어낸다. 그다음에는 이 모순을 극복하고 나온 양심의 주체가 다시 빠져든 죄와 그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마침내 양자 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정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모습, 절대적인 지식이 도래하는 모습을 서술한다. 정신-장 다음에 오는 종교-장(CC)에서는 절대적 지식에 도달하는 이런 인륜적 정신의 역사가 종교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반복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비밀을 “신이 인간이 된다”(인간이 되는 신) 혹은 “실체가 주체가 된다”(주체가 되는 실체)라는 명제로 정식화하여 풀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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