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폭력의 기억에 대해 철학은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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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폭력의 기억에 대해 철학은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10.2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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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에티카: 전쟁 · 철학 · 아우슈비츠 |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고은미 옮김 | 소명출판 | 304쪽

 

기억은 화해나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가. 전쟁의 기억에 대해 철학은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사건에서 출발해 사건을 놓고 철학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전후 반세기가 지나, 지금 다시 ‘동일성’에의 욕망이 목소리 없는 죽은 자들의 증언을 역사적으로 ‘처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쇼아와 종군위안부 문제, 유대인절멸수용소의 흔적 없는 죽음과 성을 파괴당한 여성들의 체험은, 그것을 단지 안이한 ‘스토리’로 회수하도록 허락지 않는다. 말살된 자, 망각을 강요당한 자들의 측에 서서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이 책은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현대의 역사적 폭력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런 기억을 특정한 권력관계의 활성화를 위해 조직·해체·은폐·공표·육성·안배하는 정치의 문제, 폭력과 윤리의 문제를 고찰한다. 1995년 클로드 란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1985)가 오랜 상영운동의 결과 일본에서 공개되었을 때, ‘홀로코스트 문제’와 더불어 ‘전쟁의 기억’, ‘과거 인식’이라는 테마가 학술 토론의 장에서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기억의 에티카』는 영화 [쇼아]와의 만남에 동력을 얻어 ‘기억’의 문제를 둘러싸고 보다 본격적이고 다층적인 철학적 고찰을 시도한 된 책이다. 아렌트, 레비나스, 헤겔, 교토학파의 논리체계를 이론과 현장이 서로를 근거 짓고 있는 하나의 전장(arena)으로 재정의하려는 의지가 각 장들을 채우고 있다. 

1장과 보론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 범죄의 ‘망각의 구멍’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영화 [쇼아]에 대해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글이다. ‘위협당한 기억’이라는 이 책 전체의 핵심적 논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보론은 다카하시 선생의 아렌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이와사키 미노루 선생의 논문에 대한 반론으로, 보론이라고는 하나 논쟁적인 기세가 강하고 아렌트의 기억(정치)론에 대해 세세히 파고들고 있다. 2장은 아렌트의 아프리카 표상과 그녀의 기억론, ‘정치적인 것’과 철학과의 위태로운 관련성을 논한 것으로 1장의 아렌트론을 보완하는 의미를 가진다.

3장은 “정신의 상처는 상흔을 남기지 않은 채 아문다”는 헤겔의 말과 [쇼아]의 증인들의 말의 ‘불가능한’ 대화를 축으로, ‘사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논한다. 수용소의 삶ㆍ생명에 각인된 정신의 상처에 대한 기억의 문제, 가해와 피해의 관계 문제, 그런 문제들 속에서 사고되는 사면(赦免)의 형질과 그 정치적 효력의 문제, 그리고 증언하는 삶이 지닌 정의의 문제가 다뤄진다.

4장은 한국에서도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종군위안부’들의 증언이 제기하는 문제를 레비나스의 증언론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하나의 실험이다. ‘민족’과 ‘성’이라는, 지금껏 철학의 언어가 그다지 가닿은 적 없는 두 개의 토포스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저질러진 이 역사적 폭력의 기억을 철학적 사고를 통해서도 논의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 위험한 시도가 (역사 인식의)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5장은 진군하는 군대와 마주한 철학의 존재론을 2차 대전의 총력전 시기, 일명 ‘교토학파’의 역사철학자들이 전개한 ‘세계사의 철학’론을 중심으로, 그들의 근대초극론에 내장된 이율배반의 근원적인 문제와 그것의 망각을 위한 욕망의 유혈적 폭력성이 다뤄지고 있다. 특히 교토학파의 대표적 이론가인 고야마 이와오의 예에 입각해 전후 50년에 거쳐 도리어 드세어진 감이 있는 ‘대동아전쟁’ 긍정론, 아시아 해방을 목표로 한 반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전쟁의 기억’이 얼마나 철학적 언술의 무감각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지를 인지하고자 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자기비판적인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맺음말’에서 저자 다카하시 선생은 “철학도 컨텍스트에 부과되는 필요성에 따라 그 윤리적,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되며”, “사건의 충격에 드러내어지는 일 없이 역사 일반을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 사건에서 출발해, 사건을 둘러싸고 철학하는 것을 나는 꿈꾸고 있다”고 쓰고 있다. 모든 철학이 그러하지만, 이 책에서 논하는 아렌트, 레비나스, 헤겔, 고야마 이와오라는 인물들의 철학은 역사적 현실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주제화하고 윤리나 정치를 철학의 중심 문제로 끌어들인 사고라 할 것이다.

특히 그 ‘사건’이 전쟁의 기억이나 종군위안부의 증언,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인식 문제를 포함하는 것일 때 이는 한국인인 우리들의 ‘사건’이기도 하며, 전쟁체험을 직접 겪은 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오늘날 미래 세대에 어떻게 그것을 전할까 하는 문제로서 바로 지금 물어져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기억’이나 ‘증언’의 본질에는 ‘죽은 자를 대신해’ 내지는 ‘부재하는 타자를 대신해’ 행하는 행위라는 본질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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