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종교, 앎과 계시의 뫼비우스적 관계 혹은 ‘어긋난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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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종교, 앎과 계시의 뫼비우스적 관계 혹은 ‘어긋난 조우’
  • 신명아 경희대학교·영미어문학
  • 승인 2021.10.2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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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 벤야민, 데리다, 레비나스, 아감벤, 지젝, 들뢰즈, 가타리』 (신명아 지음,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420쪽, 2021.08)

 

쟈크 라캉은 진리의 차원인 실재는 상징계도 그 앞에서 고꾸라지고 상상계도 이미지 혹은 착각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점에서 항상 ‘어긋난 조우’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런 ‘어긋난 조우’는 계몽시대의 이성과 권력을 대변하는 ‘대사들’을 그린 한스 홀바인의 그림 중앙에 우리 인간 욕망의 대상, 오브제 a를 상징하는 해골의 이미지로 표상되었다. 진리와 신에 대한 철학과 종교의 접근은 이런 ‘어긋난 조우’ 혹은 뫼비우스적 관계를 보여준다. 철학과 종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질주하는 듯하지만 같은 면 위에 존재하는 관계이다. 철학은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처럼 진리를 드러내는 노력의 다른 말인 앎을 향한 노력이다. 

 

                                                한스 홀바인의 The Ambassadors(대사들)

『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의 9장에서 들뢰즈는 철학을 개념갖기로 정의한다. 들뢰즈는 개념갖기를 “우리는 일종의 숭고한 순간에 모든 특이성을 압축하고, 모든 상황의 융합지점, 응축 혹은 응결을 뒤섞어서, [철학이 개념을 통해 얻으려는] 해결이 갑작스러운, 전격적으로 혁명적인 어떤 것처럼 폭발되어 나오게”(383) 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신학은 카이로스와 메시아적 순간 즉 계시를 다룬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은 종교의 계시적 순간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철학과 종교의 이런 불가분적 관계는 지금까지의 철학과 신학에 대한 갈등적 관계, 즉 신학이 철학을 시녀로 삼는다는 비판과, 철학은 신학을 신화로만 간주하는 이성중심주의의 오류를 범한다는 규탄을 무색하게 한다. 

6장에서 데리다는 일반적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 인식되는 철학의 종교적 회귀가 사실은 1970년대에서도 일어났으며, 이런 종교적 회귀는 엄밀한 차원에서 회귀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정치적 행위와 불가분적이어서 항상 존재해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치의 핵심인 “주권성, 정치성 등이 이미 종교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258). 

이 책은 『현상학과 ‘신학적 전회’』라는 책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이 책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도미니크 쟈니코의 논의는 나머지 부분을 쓴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쿠르틴, 장-루이 크레티앵, 미셸 앙리, 쟝-뤽 마리옹과 폴 리쾨르라는 철학자들의 신학적 전회를 규탄하는 차원에서 쓰여졌다. 쟈니코에 반대하여 다른 네 명의 철학자들은 “종교의 현상학: 철학과 종교를 위한 새 가능성”이라는 표제 하에, 철학은 바로 신학과 어깨를 같이한다고 주장하며, 종교적 개념인 ‘존재의 용기’, 신의 선물, 소명 등의 개념을 다룬다. 이러한 철학과 신학의 뫼비우스적 관계는 2016년 『계몽 안의 신』이라는 책에서 윌리암 불만을 필두로 10여명의 비평가들이 계몽은 신을 죽이고서야 가능하였다는 일반적 시각을 뒤엎고 근대의 국가 개념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사건이 종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특히 J. C. D. 클라크는 「‘신’과 ‘계몽’: 신적 자산과 영국 담론의 범주문제들」이라는 글에서 영국 계몽주의 담론과 종교의 불가분적 관계를 상세히 설명한다. 테리 이글튼은 이들보다 앞서서 현대의 문화는 신의 죽음을 논하면서 신과 결별하기는커녕 다양한 문화·정치적 기제를 통해 신의 대리자를 내세워서 영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이글튼은 “쉴러의 시각에서 이성의 기능은 . . . 감각의 영역에 침투해, 그 안에서부터 그것과 접촉하고 세련화하여서 이것이 도덕적 법의 선포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할 필요가 있다. . . . 신화의 챔피언들처럼, 쉴러는 이성이 감각적 삶으로 손을 뻗칠 때 철학과, [종교에 더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가교가 되는데 관심을 둔다”고 하였다. 특히 이글튼은 앎의 계몽이든 신의 종교이든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이글튼은 계몽과 산업의 시대에 현대적 주체들, 즉 “산업사회의 중산 측 계급의 당혹감들 중의 하나는 이것[현대사회]의 특유의 사고 유형들(합리주의, 실용주의, 세속화, 유물론, 공리주의 등)이 자신들의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상징적 자산들을 침해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 . . 이 상황의 아이러니는 명확하다. 순식간에 속세적 처리를 위해 종교를 저버린 바로 그 체제는 또한 더욱 더 종교가 제공하는 상징적 일치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글튼은 “전통적 신앙이 이런 일치감을 주지 못한다면, 이것의 새로운 형태가 신화로부터 인간성의 종교, 헬리니즘 문화 . . . 뒤르카임의 가정된 사회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했다”고 말하면서, 신의 빈자리 대신에 국가, 사회 같은 정치적 기제와 인간성의 이데올로기가 대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이글튼은 이런 대리자로서는 종교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음을 지적하기 위해, “로마의 교황에게서 얼굴을 돌린 사람들이 오거스트 콩트 같은, 파리의 인간성의 대사제에게로 몰려들 것 같지 않다”라고 본다. 이글튼은 예술적 혹은 정치적 신의 대리자들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형식들은 공정하고 인정심 많은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려면 급진적 해체를 겪어 내야한다. 이 해체의 증표는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와의 연대이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이글튼의 이런 시각이 이번 저서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시각이다. 1장의 가타리는 현대주체의 산업 및 포스트산업 사회의 당혹감을 다루면서 현대주체는 더 이상 계몽시대의 이성의 주체가 상정하는 개인주의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미세한 차원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로 통제하고 감시하는 과정에 개입해야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서로가 다양한 배열 속에서 공통으로 겪어내야 하는 사회적 불합리와 불공정을 다수적 집합소의 차원에서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분자혁명을 강조하였다. 이런 집합소들의 분자혁명은 “창조력을 결합해 . . . 지평선에 떠오르는 [네오파시즘적인] 야만주의의 시련, 정신적 폭발과 혼돈의 발작을 막는” 케이오스모스적 생명력과 활력의 저항의 기제임을 밝힌다. 

2장에서는 포스트산업적 사회의 양상을 초국가적 모델로 파악하여 제국이라는 유령에 대항하는 하트와 네그리의 저항적 전략을 소개하였다. 하트와 네그리가 글로벌 시대의 주체 역시 개인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다중이라는 의미로서 접근해야하며, 초국가적 제국의 시대에서 기존의 좌파적 이데올로기가 정체성 정치에 입각하여 현대적 주체를 대변하고 해방시키는 것을 실패하였음을 지적한 이후  다중의 틀로 이동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네그리가 왜 데리다의 지성적 기획이 문학 혹은 글쓰기에 국한되어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가를 성토하는 것을 살펴보았고, 또한 아감벤 역시 자기처럼 ‘삶의 시너지 또는 진실로 헐벗은 삶의 생산적 힘’을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수동적 시각을 견지함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그 반대로 헐벗은 삶이 될 수 있는 엄청난 역량  . . 다중의 생산적인 협동의 새로운 역능”을 보여준다는 입장을 살펴보았다. 

네그리의 다중의 ‘새로운 역능’의 예를 제시하기 위해, 3장에서는 랑시에르를 통해 모든 인민의 타고난 지성적 평등의 시각을 보여주고, 소위 노동자, ‘프로레타리아의 밤’은 사회의 통치자들이 미화시키듯, 노동한 사람들의 육체의 노동이 잠으로 보상된다는 입장 대신에 프롤레타리아의 밤에는 시와 철학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살폈다. 5장에서는 벤야민의 정치신학과 약한 메시아주의라는 표제 하에, 벤야민의 철학이야말로 철학과 종교가 함께 공존하는 모델임을 보여주면서, 호모 사케르 같이 약한 주체를 통해 철학과 종교가 함께 꿈꾸는 이상적 사회가 가능하다는 약한 정치학을 살펴보았다. 

 

파울 클레의 Angelus Novus(새 천사): 뒤러의 천사가 온갖 건축기구 앞에서 무력감과 수치를 느끼듯이, 벤야민의 이론에서도 천사는 신이 죽고 이성과 계몽이 판치는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의 날개가 역사의 ‘진보’이라는 대폭품에 갇혀서 힘이 없이 미래를 향하고 있는 무력한 천사로 그려진다. 이는 기독교가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 신의 충만성(pleroma)이 각각 다른 모습의 신적 요소들(aeons, Aions: 천사 포함)로 나타나서 때로 잘못을 저지르고 다시 신의 충만성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하는 것을 상기시킨다. 벤야민의 힘없는 ‘역사의 천사’ 설명은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소위 역사테제의 글]의 섹션 IX에서 설명된다: “그의 얼굴은 과거로 향해 있다. 우리 앞에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에서 그는 하나의 재앙을 보는데, 이것이 파멸에 파멸을 그의 발 앞에 던져 놓는다. 천사는 멈춰서, 죽은자를 일깨우고 파멸된 것을 온전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폭풍이 천국으로부터 밀려오고 그의 날개가 잡혀 있다.”(벤야민)

4장의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을 통해 철학과 종교가 뫼비우스적 관계를 엮어가는 것을 본 후 6장의 데리다에서는 레비나스가 윤리학에 매몰된 것에 대한 카운터 담론으로서, 진정한 메시아성은 이상 사회의 건설로 역사에서 끝을 맺는 종말론적 메시아주의를 극복하고 정치적으로 현재의 민주주의의 약점을 극복하고 ‘도래할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시각을 살폈다. 또한 홀로코스트 이후 시가 쓰일 수 없다는 아도르노의 홀로코스트 규탄처럼 데리다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 자칫하여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홀로코스트를 규탄하는 것을 살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Melencolia I: 레비나스는 스승인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초월해 ‘존재아님’을 추구하였고, “존재에만 고착되어 타자에 대한 책임”을 못느낄 정로로 자기의 존재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권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이 그림을 언급한다: “진정한 존재는 자기에게 [권태와] 수치를 느끼는 법이다. . . 뒤러가 건축 현장 중심에 망치, 대패 그리고 기호학적 기구로 둘러싸인, 날개는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육중한 천사를 배치해놓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62)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신에 대한 어떤 ‘앎도 있을 수 없다. 타자는 바로 형이상학적 진실의 장소이며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필수적이다’(하이데거, 본저 159)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형이상학과 달리 만물에 대한 사랑과 염려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 시각’이다(178).

7장에서는 현대철학의 화두가 되는 바울을 지젝이 바울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바디우의 담론을 넘어서서, 바디우가 간과한 죽음충동과 기독교 문화의 상관관계를 논하였다. 예루살미의 시각을 빌려, 보편화된 기독교와 유대교주의의 단절을 믿는 바디우와 달리, “프로이트가 ‘아버지-종교’로 정의한 유대교와 ‘아들-종교’로 정의한 기독교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지젝의 The Monstrocity of Christ(예수의 괴물성): 예수께서 저항적 제스처로 오른손 손가락을 신에게 욕하는 듯이 하고 있다. 지젝은 바디우가 그리스도를 보편화시킨 바울과 동일시 하느라, 바울이 12사도 중 배신자, 저항적 제스처의 유다의 속성을 못 본다고 비판한다. 지젝에게서도 이 책의 철학자들이 약한 정치, 약한 메시아주의처럼 강령적이고 권위적인 메시아주의가 아니라 열린 약한 정치성을 받아들여, 신의 나약함, 자신을 비움으로써 예수로서 ‘고통 중이신 신’ 그리고 초월의 신에 대한 저항의 신으로서의 ‘나약한 신’의 모습을 강조한다. 지젝은 미켈란젤로의 위의 그림이 인간의 몸으로 그의 편에서 고난을 당하는 예수의 ‘강한 신’에 대한 저항의 모습을 예수의 손가락 모습과 눈길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예수의 괴물성을 논한다. (지젝의 그림 설명: 333)
지젝은 이 그림을 미켈란젤로가 후원자인 귀부인에게 선물했다가 그림에 부적절한 것이 있어 반환을 요구했다고 말한다. 귀부인은 그림을 돌려주기를 거부하고, 미켈란젤로에게 묘한 흥분을 느낀 것을 고백한 후 그림을 면밀하게 탐구했다고 한다. 지젝은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손 주의 손가락이 묘하게 꼬부라져 있어 저항의 주먹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언급한다. 지젝은 그림의 예수 얼굴에서 눈이 위로 향해 있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스 홀바인의 The Ambassadors(대사들)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계몽에 밀려 왼쪽 끝 벽면 위에 숨겨져 있듯이 작게 그려져 있다면, 현대철학의 종교적 전회는 예수의 괴물성을 통해 열린 사고의 혁명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철학과 종교의 뫼비우스적 관계는 기존의 유대교와 서구 기독교의 단절을 믿는 시각에 도전한다. 유대인으로서 박해를 피해 프랑스 군인으로서 싸웠던 레비나스처럼,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한 철학자 독일의 한스 요나스도 영국군에 입대해 나치와 싸운 후 레비나스처럼 책임의 윤리학을 펼쳤다.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진 요나스는 유대교가 창조 이론에 방점을 둔다면, 기독교는 예수의 육화론을 강조하는 차이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요나스는 기독교-이전-영지주의(pre-Christian Gnosticism)라는 말이 모순어법일 정도로 기독교가 이단으로 탄핵하는 영지주의는 예수 사후 1세기 교부들의 시대에 함께 담론을 이어온 사유의 형태들이다. 종교와 철학의 뫼비우스적 관계는 요나스의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을 새롭게 성찰하게 한다. 

영지주의와 현재 기독교가 동시대적 산물로서 정전화 과정에서 영지주의의 시각들이 이단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시릴 오리건은 『현대성 안에서 영지주의의 회귀』라는 책에서 이글튼이 종교와 철학의 불가분적 관계를 논한 쉘링은 물론, 헤겔, 특히 블레이크의 담론에서 영지주의의 회귀를 발견하는 도전적 시각을 제시한다. 요나스와 오리건의 영지주의에 대한 반대적 시각은 철학자가 한 종교, 그것이 기독교이든, 비기독교이든, 그 한 종교에 의해  편견을 극복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따라서 철학자는 자신이 속한 종교로 편향될 경향을 조심하고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은 약한 정치학을 강조하면서, 사회를 건설할 메시아적 주체는 강력한 주권자들이 아니라 약하고, 카프카의 잠자처럼 동물-되기를 겪은 나약한 주체임을 제시한다. 들뢰즈 역시 철학은 질문하고 배우는 주체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이번 책은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진정한 지성적 주체는 자신이 견지해 온 생각, 자신이 소속된 사회와 문명을 다시 공부하고 타자의 부름에 충실하는 주체임을 강조한다.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은 철학과 종교를 공부하는 현대 지성인에게 중요한 숙제를 제공한다. 요나스는 현대 기독교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자손인 예언자 무하메드가 그 당대의 기독교적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코란을 썼으며, 또한 기독교가 헬레니즘 특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본래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헬레니즘화할 때 초기의 모습을 강화하고 헬레니즘으로 오염되지 않게 만든 업적을 인정한다. 이번 저서에서 드러나듯, 유대교와 기독교의 단절주의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상호배척의 경향을 완화시킬 필요가 대두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종교의 특징들을 배우고 프로이트 라캉만이 아니라 그들이 배척하는 칼 융 같은 사상가들의 사고를 배우고 서로 연대하여서 서로 종교의 근본주의를 극복하게 도울 필요가 있다. 종교의 근본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산물로 몸살을 앓는 지구와 지구의 생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억압적인 정치 및 자본주의의 영리 위주의 실천의 굴레에서 현대적 주체를 해방할 사고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 철학하는 자들의 과업이다. 스스로 ‘마리아 형제회’ 신부들의 산물이라는 라캉은 진정한 종교는 풍부한 자원을 통해 끊임없는 새로운 읽기를 감행함으로써, 인류가 가지는 온갖 증후의 문제들을 “종교적 의미 안에 증후를 익사시킴으로써 그것을 억압하고 말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이제 종교와 불가분적인 관계의 철학이 이 입장을 실천할 때이다.   


신명아 경희대학교·영미어문학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어문전공 명예교수.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다코타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한국라캉과현대정신분석학회(현 현대정신분석학회) 회장, 한국비평이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Reconsidering Social Identification: Race, Gender, Calss and Caste (Abdul R. JanMohamed, 2011)와 공저로 출판된 『페미니즘, 어제와 오늘』, 『라깡의 재탄생』, 『젠더를 말한다』, 『20세기 미국소설의 이해』, 『라깡, 사유의 모험』, 『우리 시대의 욕망읽기』가 있으며, 역서로 『윌리엄 포크너: 현실과 피안을 넘나드는 예술가』, 『독자로 돌아가기: 신비평에서 포스트모던 비평까지』와 『라깡 정신분석 사전』(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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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명아 인터뷰》

 

현대철학에서의 윤리성과 종교성을 탐구하다

- 기존 철학의 아포리아를 해결하려는 치열한 투쟁의 산물들 -


◈ 《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를 구상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의 연구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출발합니다. 프로이트에게서는 무의식의 중요성을, 라캉에게서는 모든 담론과 지식체계는 상징계 안에 구멍을 가지고 있기에 그곳을 안 보이게 은폐하려는 집착, 즉 편집증(파라노이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현대철학이란 이렇게 문자, 상징계, 담론체계의 본질적 결여를 인정하고, 은폐되고 왜곡된 진리, 라캉적 용어로는 ‘실재’에 어떻게 하면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겸허한 지성의 산물입니다. 데리다의 ‘떠도는 기표’ ‘차연’ ’흔적‘의 개념도 진리가 드러나는 모습이고, 들뢰즈의 ’생성(되기, becoming)‘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진리의 비결정성을 표현합니다. 이는 벤야민의 사상에서 존재의 비결정성, 아포리아를 신적 차원, 즉 재현하기 어렵고 잡히지 않는 영원한 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메시아적인 순간은 마치 카이로스의 머리처럼 잡을 수 없지만, 놓친 듯하면서도 ’지금-시간‘이라는 순간에 섬광처럼, 혹은 ’정지상태의 변증법‘ 형태로 현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렇게 현대철학자들이 진리와 조우하는 면면을 포착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리는 벤야민처럼 신적 차원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 ‘종교적 회귀’ ‘신학적 전회’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한 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가 이 책에서 어떻게 드러나나요?

이 책은 익숙한 한 세트의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를 9장과 1장에 각기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들뢰즈의 ‘신학적 전회’를 보여주는 이론적 틀이 가타리를 통해 정치사회적으로 견지됨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사회적 양상과 신학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 인간 삶의 불가분적 관계를 가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현대철학자들의 ‘종교적 전회(轉回)’란 철학 저변에 다시 초월적이고 해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유가 움트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책의 초기에 논의되는 현대철학자, 가타리, 스튜어트 홀, 하트와 네그리 같은 사람들은 계몽, 이성 그리고 정의 같은 근대적 철학의 관심을 초월해서 사회와 그 구성원인 개인의 상호관계에 천착합니다. 특히 가타리는 사회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미시정치적 차원에서 일상을 파고 들어가 주체들의 욕망을 통제하는 분자파시즘에 대항해 각 주체가 사회의 통제수단인 개인이라는 차원을 초월하여, 서로 미세하게 연결되어 생성되는 복합적, 다중적 주체성, 즉 '집합소'이므로 서로 연대하고 서로의 정체성을 횡단하는 분자혁명을 제시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가타리는 생태계와의 조화를 강조하는 생태철학의 입장도 견지합니다. 홀의 정체성 정치와 하트와 네그리의 탈제국적 주체성 탐구를 거쳐 랑시에르의 인민의 지성적 평등을 논의하면서, 현대철학의 주체성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논의하였습니다. 그 이후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에서 주체는 타자에게 볼모가 되는 양태를 신의 차원과 연결하여 논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벤야민, 데리다, 지젝, 아감벤, 들뢰즈의 ‘신학적 전회’가 논의됩니다. 벤야민을 통해 구원의 순간은 오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루 늦게 온다는 카프카의 구원관을 끌어 들여서, 구원의 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은 구체적 시간이나 일직선 상의 세상의 종말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배움의 학생들, 조수 혹은 카프카의 『변신』의 잠자처럼 영웅이 아닌 약한 주체와  관련있음을 ‘약함의 정치학’(weak politics)으로 논의하였습니다. 데리다에서는 기존의 신학의 메시아니즘을 극복하고,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을 통해 진정한 메시아적 현현을 역사적 정치적 순간과 무관하지 않게 ‘도래하는 민주주의’ 형태로 파악하는 과정을 포착하였습니다. 지젝에서는 죽음 충동, 즉 현재의 쾌락원칙, 충만성을 거부함으로써 실현되는 진정한 신의 케노시스, 비움의 정치학을 통해 ‘신학적 전회’가 형성됨을 파악합니다.

 

◈ 이 책에서는 벤야민, 데리다, 레비나스, 아감벤, 지젝, 들뢰즈, 가타리 등 다양한 현대철학자를 총 9개의 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부산대학교 이재성 교수님은 이러한 긴 여정의 끝에 들뢰즈의 초월적 존재론이 있다고 써주셨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철학자의 사상은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나요?

앞서 다루지 못한 아감벤, 들뢰즈를 살펴보겠습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즉 헐벗은 생명이라는 미약한 존재가 바로 진정한 생명 특히 수치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의 윤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법과 권력의 차원인 ‘예외 상황’의 생명권력(biopower)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임을 다룹니다. 아감벤은 나중에 저서들에서 이런 진정한 존재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이 수도사들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할 정도로 더 본격적인 신학적 전회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들뢰즈는 사실상 가장 신적 차원과 멀어 보이며 무신론자로도 보입니다. 들뢰즈의 신학적 전회는 신은 ‘바닷가재, 이중집게발(더블 펜치), 이중구속이다’라는 명제처럼, 신은 모든 상반적 요소를 다 품는 존재로서 우리가 왜 이분구조를 폐기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신은 영토화면서 탈영토화하여 모든 기존의 체계가 해체되고 다시 사막화하여 무한한 신의 차원과 만나 새로이 탄생하여야 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이런 들뢰즈의 신적 차원은 데리다의 차연과 해체 이론이 사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아감벤도 모든 기존체계의 무효화(nullification)를 강조함으로써 ‘헐벗은 생명‘이 소생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들뢰즈와 데리다에게 사막은 [지금은 안 보이지만 도래할] ’사람들이 가득찬‘ 고독의 장소, 절대적 고독의 장소입니다. 들뢰즈의 ’초월적 존재론‘은 기존 철학의 초월적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자극하고 기다리는” 그런 사막의 고독 차원이어서 이곳을 사유하는 것은 ’국가‘ 차원이 아니라 ’부족‘의 차원입니다. 어느 거대한 조직체계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배제된 분자적 차원을 살려주는 신적 차원입니다. 들뢰즈의 신학적 전회는 “우리는 양들이다: ”사자 같이 [희생양] 피의 희생이 주어지던 신은 뒷배경으로 물러나고 희생된 신이 전면에 옵니다. 신은 도살된 동물이 되었다.“에서처럼 신약의 예수가 상기될 정도로 강력한 신학적 전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코로나 등으로 여러 가지 변화가 큰 현재와 같은 시기에 《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를 읽는 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들뢰즈가 호소하듯이, 피의 희생이 아닌, ‘희생된 신’은 우리에게 들뢰즈가 말한 ‘동물-생성’ 혹은 ‘동물-되기’ 등 다양한 희생자-되기의 개념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책에의 원제목에는 ‘위기의 시대’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현재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알 수 없는 원천에서 생성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다양한 생명 요소와 환경의 만남이 균형을 잃은 결과물입니다. 이 책의 독자들은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시작한 앞 장에서 후반부로 넘어 가면서 현대의 나는 타자와 불가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타자의 문명에 무관심한 자신을 반성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는 분자적이고 미세한 차원에서 우리가 무심코 차별하고 억압한 생명체들의 반란으로 드러나는 코로나19의 타격을 받고 있지만, 크게는 문명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이 손을 놓은 아프간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주시해야 하고, 그 정치적 변동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여성들, 정치적 탄압의 대상자들에게 무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체는 타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어느 곳의 평화와 행복이 다른 곳에서는 반비례 관계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글로벌 차원에서 어떤 정치적이고 이념적 횡포에 눈감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잘못된 환경의식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그 대지 위의 우리가 부정적 여파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타자와 그들의 문명에 무관심하고 왜곡할 때 그들의 고통의 소리는 벤야민의 ‘신적 정의’의 실현 과정에 어느 순간 내 가까운 이웃의 아픔으로 그리고 나의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 다음 책 계획이 있으시다면?

아프간의 탈레반 점령 이후 저의 관심은 이슬람 문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은 참으로 멀리 있습니다. 영어로 내용을 접하니 유럽 중심 시각으로 이슬람 문명을 접하지 않을까도 염려됩니다. 이 점에서 다음 저의 행보는 무거운 걸음이 될 것입니다. 저의 학문이 서구철학에 매여 있음을 탄식하고, 얼마 전부터 칼 융을 통해 인도 사상에 접해 보려하였고, 예수회 센터에서 서명원(Benard Senécal) 신부의 불교 특강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여러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슬람’은 평화와 구원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며, 이슬람 문명은 본래 평화를 구가하는 문명입니다. 지금 이슬람의 전투적인 성전으로 폄하된 지하드의 원래 뜻은 이 책에 서문에서 나온 철학자들의 아포리아와의 ‘투쟁’(strife) 혹은 그것을 해결해보려는 ‘노력’처럼 ‘죄를 짓지 않으려는’ 혹은 신의 명령에 충실하려는 ‘노력’ 혹은 ‘투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슬람인들은 자신의 어두운 자아와 싸우는 내적 노력을 ‘큰 지하드’(the Greater Jihad)라 부르고 신앙심 없는 자와 싸우는 것을 ‘작은 지하드’(the Lesser Jihad)라 부르며 내적 노력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런 이슬람 문명은 안과 밖에서 왜곡되어 안으로는 탈레반이 원래의 평화적 구도 자세를 왜곡하고 있고, 밖으로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인 이슬람혐오(Islmaphobia)가 팽배하게 나타납니다. 다행히 타리크 라마단(Tariq Ramadan) 같은 이슬람출신 학자들이 과감히 이슬람문명도 시대에 맞춰 변모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학자는 지하드라는 단어에 80개 정도의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전쟁으로 해석되는 경우는 단 하나의 경우일 뿐이라며, 전투적 이슬람주의를 비난합니다. 또한 이 책에서 살핀바와 같이 레비나스도 성경의 다양한 해석을 강조하였듯이, 이슬람계 학자들도 코란의 적용을 위한 해석을 다양하게 허락할 필요를 논하는 시점에서, 이 책의 철학자들이 보여준 신학적 전회를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어긋난 조우’를 연구하면서 실천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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