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본성대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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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본성대로 읽기
  • 손필영 국민대학교·국문학
  • 승인 2021.10.2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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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잘못 읽어왔던 한국시 다시 읽기』 (손필영 지음, 빗방울화석, 224쪽, 2021.09)

 

  이번 가을에 출간한 〈잘못 읽어왔던 한국시 다시 읽기〉라는 다소 불편한 제목의 책은 20년 넘게 시 수업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계간지에 연재한 것을 엮은 것이다. 그사이 한국에서 시행된 시 교육은 소재만 바뀔 뿐이지 바뀐 게 없었다. 책에서 다룬 시인들은 한국시사에서 끝 봉우리를 이룬 작고한 시인과 아직 살아 계시지만 큰 봉우리로 남을 황동규와 신대철 시인이다. 오독의 경우와 개념적으로 읽어 온 경우를 다시 읽어 시를 시답게 읽어보려고 했다. 문단 중심으로 언급되었던 것도 피하고 유명한 것보다는 시사에서 언급되어야 할 시의 질감을 읽어보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보내드리오리다.”가 김소월 <진달래꽃>의 한 구절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중등교육은 받은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시제가 과거일까, 미래일까? 물으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미래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시는 미래조건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냐고 물으면 학생들은 모두 이별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이별이 왜 슬프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가봐야 알겠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별을 가지고 이별의 정한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 시가 슬픔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별을 조건으로 사랑을 고백한 시라고 말하면 학생들은 더욱 당황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시적 화자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시적 화자는 “만약 당신이 나를 역겨워한다면 나는 당신을 같이 역겨워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말없이 고이 보내 줄 정도로 사랑한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그냥 보내지 않고 꽃도 뿌려줄 것이고 절대로 울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랑 고백을 한 것이다. 비록 가정한 이별이지만 슬픈 상황과 진달래꽃은 잘 어울린다. 같은 봄꽃인 개나리꽃이나 우아한 목련은 처연하고 아린 진달래의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 다시 학생들에게 ‘죽어도’를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를 물어보면 모두 비장하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어도’는 우리 나라말에서는 부정어를 강조하는 부사어로 쓰인다. “죽어도 안 가”, 혹은 “죽어도 못 해”와 같이 ‘죽어도’는 ‘안 하다,’ ‘못 하다’와 같은 부정어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이 시를 읽어보라고 한다면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이니까 즐겁게 기쁘게 읽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시를 학생들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시에 쓰여 있는 부분과는 다르게 읽고 있어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학생들에게 시를 읽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물어보면 스스로 얘기를 하지 못 한다. 부분 부분은 비유법과 이미지를 설명하거나 느낌은 말하지만 전체적으로 시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으냐 물으면 말을 못 한다. 이 부분은 중고등학교 국어과 선생님들을 연수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은 오독한 시를 정정해서 배우고 내용에 동의를 하시면서 학교 교안과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고 묻는다. 사실은 이렇게 쓰여 있지만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풀 때면 기존의 내용으로 써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제대로 배운 대로 답을 체크하면 문제를 낸 선생님의 정답과 다를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특히 문해력이 중요하다. 시는 압축과 비약으로 되어있고 비유와 상징이 많다. 밀려온 정보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골격을 읽지 못 하면 내용과는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시의 내용과는 별개의 의미 부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분을 크게 보는 자유에서 기인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을 왜곡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기본적인 내용 파악도 하지 않고 상징이나 비유를 붙이면 시는 개념이 되어 시적 즐거움을 느끼기보다 주장으로 읽게 된다. 시인이 시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주장이 아니라 시의 어법으로 뭔가를 느끼게 하거나 정서를 흔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산문을 보고 ‘이 글은 이런저런 내용으로 되어 있어’라고 말하듯이 시를 읽고도 전반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한 구절이 좋아, 느낌이 좋아’ 정도로 말한다. 시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면 훨씬 시를 풍부하고 시답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시를 즐기기 위해 암송해보라면 암기과목 시험 보듯이 싫어한다. 시 없이 문학 공부만 있었던 것 같다. 시의 내용과 무관하게 비유나 상징을 읽는다면 시인마다 다르게 쓴 언어의 질감을 모를 것이다. 꽃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무조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별을 소재로 하면 꼭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습관적이고 관성적인 읽기는 시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시에 나온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면 좋고 모르는 세계는 무시하는 태도를 지닌다. 특히 시를 파악하기도 전에 작품 외적인 요소들인 시대적 요소라든가 작가의 전기적 요소에 맞춰 시를 해석하려고 하면 시를 읽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시를 먼저 읽고 시를 풍부하게 읽기 위해 이러한 공부를 하면 좋을 것이다. 대학에서의 전공 공부도 마찬가지다. 김소월의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1920년대나 30년대의 식민수탈을 조사하게 하고 그 시대의 다른 시인의 시도 같은 맥락으로 읽으라고 한다면 시마다 다른 질감과 특징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한용운의 시를 말할 때 학생들은 <님의 침묵>에 나타난 님을 조국과 부처와 여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물론 역사 전기적으로 측면으로 보면 부처나 조국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한 번에 세 가지 대상을 향하여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한 번에 한 대상을 향해 글을 쓰는 것도 어려운데 질감이 다른 세 대상을 동시에 놓고 진정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고적한 밤>이나 <나룻배와 행인>의 경우 다른 톤과 질감을 가지고 있는데 구별하지 않고 ‘님과의 이별’이라고만 말한다. 하나는 님과 잠시 떨어져서 솟구치는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는 사랑이 끝나 죽을 것같이 힘든 마음이, 하나는 님을 기다리다 지친 원망의 마음이 드러난다. 

  시의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면 시를 거칠게 읽고 개념적으로 말할 것이다. 이 책을 쓴 이유는 시를 시답게 읽어보자는 것이다. 연구자들도 이론을 적용하여 시를 읽고 해석하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섬세하게 시답게 읽고 난 후에 연구를 한다면 시를 훨씬 풍부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의 님과 사랑을 소재한 시도 톤이 다 다른데 같은 맥락으로 보면 말만 따라가게 될 것이다. 시를 시답게 섬세하게 읽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난 말에만 치중해서 시를 너무 맛없게 읽어 온 결과일까? 요즘에 유행하는 시는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된 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난 이미지로 된 말의 성찬이다. 그래서 요즘 시는 난해하다고 말한다. 아마 단어 하나라도 자신의 상황과 맞는 사람은 그나마 그 시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점차 시를 읽지 못하게 만들고 멀리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어느 시인의 문학관에 어떤 상을 받아서인지 자랑스럽게 진열해 놓은 시가 있다. 그런데 그 시는 시의 앞뒤가 다르고 또 몇백 명이 죽어가는 전쟁의 폭탄 터지는 소리를 ‘장쾌한 멜로디’로 또 ‘황홀한 광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시인을 위해서라도 그 문학관은 그 시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김종삼 시인의 <물통>처럼 비유의 힘을 놓쳐버려 시를 반만 읽는 경우다. 시를 보면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를 보고 많은 경우 물 몇 통을 시적 화자, 즉 시인이 길어다 준 것으로 읽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뒤에 “머나먼 광야의 한 복판 얕은/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하여금’이라는 조사는 행동을 시킬 때 쓴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툭 끊어지는 환경 속에서 시인은 누군가에게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 그 대상은 영롱한 날빛을 시켜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답하고 있다. 물 몇 통은 육체의 갈증을 해결하는 사물이 아니라 영혼을 위로하는 사물이 된다.

  시를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정보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 때 잠시 만난 박두진 선생님께서 필자가 정지용의 <장수산>을 가지고 동양적 아름다움이니 어쩌고 했더니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라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이라도 시 자체를 주목해서 읽는다면 시를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손필영 국민대학교·국문학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99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빛을 기억하라고?」가 당선되어 시작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제1회 아시아예술창작거점사업에 추천되어 몽골에 파견되었다. 제4회 김기림문학대상을 수상했다. 개인시집 『빛을 기억하라고?』, 『타이하르 촐로』, 『그 바람이 어찌 좋던지』 등이 있다. 공동시집 『산늪』,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빙폭』, 『금강산에 살다 죽어도』, 『천지에서 바이칼로』, 『백두대간 시집-혼자 걸어도 홀로 갈 수 없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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