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 발굴을 통해 본 천주교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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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발굴을 통해 본 천주교 순교자들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10.1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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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㉓_ 유해 발굴을 통해 본 천주교 순교자들

 

순교자 유해 발굴 소식

지난 9월 초 천주교 전주교구에서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의 유해를 230여 년 만에 찾았다고 발표하여 여러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발표에 따르면 이들보다 십 년 뒤에 순교한 윤지헌(尹持憲) 유해도 함께 확인했는데, 이들 세 분의 순교자 유해가 발굴된 장소는 전주 초남이 성지 바우배기 일대이다. 

초남이 성지는 조선후기 정조 때 천주교 전도에 힘썼던 유항검(柳恒儉)이란 인물이 교당을 지어 복음을 전했던 곳이고, 바우배기는 초남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과거 유항검의 가족묘지가 있던 곳이다.

초남이 성지 일대의 성역화 과정 중 무연고 묘소에서 찾아낸 유해와 유물은 성별검사, 치아와 뼈를 이용한 연령검사와 같은 과학적 방법, 유해와 함께 출토된 명문이 새겨진 지석(誌石)의 판독과 같은 고고학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하고 역사적 문헌을 종합하여 교회특별법원에서는 세 분의 유해임을 최종 확정하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초상화. 2014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제작한 것으로 왼쪽부터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이다.

필자의 눈에는 특히 해부학적 조사 결과가 인상적이다. 윤지충과 권상연 유해에서 참수형에 해당하는 소견이, 윤지헌은 능지처참형에 처해진 소견이 각각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즉, 윤지충 유해의 다섯째 목뼈 왼쪽 부분에서 날카로운 칼과 같은 예리한 예기(銳器)로 비스듬하게 절단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상 소견이 확인되었고, 윤지헌의 경우 둘째 목뼈와 함께 양쪽 위팔뼈, 왼쪽 대퇴골에서 예기 손상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시대 사형집행 방법은 교수형, 참수형, 능지처사형 세 가지가 있었다. 당시 법이 어떠했길래 이들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과 능지처사형에 처해졌을까? 이 중에서도 윤지헌은 어떤 이유로 목뿐만 아니라 팔, 다리가 절단되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순교자 유해 발굴을 계기로 이들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에게 가해진 죄목, 형 집행 방법 등 당시 법률 규정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순교자들에게 적용된 형률은?

이들 세 명의 천주교도들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들에게 적용된 형률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1791년(정조 15)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소위 진산사건은 천주교에서 신해박해라고 부른다. 전라도 진산(현재의 충남 금산 일대)에 거주하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내외종간 사이로, 일찍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전후로 ‘폐제분주(廢祭焚主)’, 즉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다가 논란이 되었다. 결국 유교식 제례를 거부한 이들은 전주 감영에서 모진 문초를 당하고 조정의 명으로 전주 남문 밖에서 목이 잘리는 극형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이 두 교인에게 적용된 형률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명률의 사무사술(師巫邪術) 금지 조항에 따르면 사술(邪術)을 부려서 백성을 현혹시킨 경우 교수형에 처한다는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대명률』 발총(發塚) 조항에 자손이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고 버린 경우는 참수형에 처하며, 신주(神主)를 훼손한 경우에도 시신을 훼손한 것과 동일하게 처형한다는 규정이었다.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한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신봉하며 신주를 훼손한 이들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두 가지 범죄를 함께 저지른 경우에는 무거운 쪽으로 처벌하였기 때문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에 처해졌다. 

 

『대명률』의 전체 목차 부분. 조선왕조는 『대명률』을 형법으로 수용하였으며, 천주교도들을 처벌할 때에도 대명률의 예율(禮律), 형율(刑律) 등 법조문에 의거하였다. 규장각 소장.

다음으로 윤지헌의 순교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의 일이다. 윤지헌은 윤지충의 동생으로 당초 진산사건으로 형 윤지충이 순교하자 고향인 진산을 떠나 전라도 완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외국 군함을 불러들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 했다는 이른바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체포된 후 전주 감영에서 능지처사형을 받고 순교했다.

윤지헌의 죄는 『대명률』 모반대역(謀反大逆) 조항을 범한 것인데, 외국 군대를 동원하려 한 죄가 역모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모반대역죄 규정에 따르면 주모자와 가담자 모두 능지처사형에 처할 뿐 아니라 그의 가족, 예컨대 아버지나 16세 이상 아들은 교수형, 나이 어린 자녀와 기타 가족들을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게 되어 있었다. 결국 윤지헌은 모역에 동참한 죄로 십 년 전 자신의 형 윤지충보다 한 등급 무거운 능지처사형에 처해졌으니, 당시 윤지헌의 나이는 37세였다. 이와 함께 그의 가족들도 연좌처벌을 피하지 못한 사실이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윤지헌의 부인은 흑산도, 그리고 세 아들은 거제도, 남해, 제주도의 관노비로 각각 배속되어 일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것이다.

 

순교, 끔찍한 고통을 승화시키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에 발굴한 세 분의 순교자 유해 속에는 처형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신체 절단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이들에 대한 처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 알아본다.

먼저 윤지충과 권상연이 목이 베이는 참수형을 당한 것은 앞서 본 그대로인데, 당시 일반적인 참수형 집행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즉 사형수가 형장에 도착하면 먼저 뒷짐결박을 하여 조리돌림을 하고, 이어서 죄수를 형장에 엎드리게 한 후 턱 밑에 나무토막을 괸 후 사형 집행인이 월도(月刀)로 목을 베었다. 간혹 잘린 머리를 며칠 동안 걸어놓기 위해서 미리 죄수의 상투에 줄을 매어놓고 목을 베기도 하였는데, 이를 효시(梟示), 혹은 효수(梟首)라고 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형 집행 상황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유해를 발굴한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윤지충은 5번째 목뼈가 손상되었고, 권상연은 목뼈 부분이 없었는데 모두 실제 참수형이 집행된 흔적으로 추정된다. 

 

순교자 유해가 발굴된 바우배기 일대의 묘지 위치. 천주교 전주교구 제공.

그런데 순교자 윤지헌이 겪은 능지처사형은 흔히 ‘능지처참’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인 형 집행 방법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사육신(死六臣)의 사례에서 보듯 능지처사형을 집행할 때 먼저 목을 베어 죽인 후 팔다리를 수레나 소에 매달아 절단하는 거열(車裂)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목을 벤 후 사지를 절단하는 방식이 수레가 아닌 칼을 이용한 것으로 바뀐 듯하다. 

능지처사형 집행 방식이 바뀐 근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鄭載崙)이 쓴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1644년(인조 22)에 역모 가담죄로 능지처사형이 결정된 심기원(沈器遠)의 형 집행을 담당한 관리에게 김자점(金自點)이 했다는 말이 적혀 있다. 내용은 역적을 처형할 때 먼저 목을 베고 뒤에 팔다리를 베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번에 심기원을 처형할 때에는 먼저 팔을 베고, 다음에 다리, 마지막에 머리를 베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로 볼 때 이 당시 능지처사형의 일반적인 집행 방식은 칼로 목을 베어 먼저 죽인 후 팔, 다리 등 사지를 절단하는 방식으로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Claude-Charles Dallet)가 집필한 『한국천주교회사』에도 옛날에는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었으나, 지금은 도끼나 칼을 이용한다고 적고 있다. 이상 두 가지 기록을 통해 볼 때 수레나 소를 이용한 거열(車裂) 방식으로 더 이상 능지처사형을 집행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순교자 윤지헌에게 돌아가 보자. 윤지헌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순교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예기 손상 흔적으로 볼 때 거열(車裂) 방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발굴된 윤지헌의 유해에 팔꿈치와 무릎 아래 뼈가 없다는 사실로 볼 때 능지처사형 집행 이후 절단된 사지를 관례대로 각각 다른 지역으로 보내 백성들에게 전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 천주교 전래과정에서 발생한 이들 순교자들의 희생은 끔찍한 처형의 고통을 승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이번에 발굴된 유해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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