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의 약속은 깨졌는가? 지금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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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약속은 깨졌는가? 지금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는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0.1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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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

■ 능력주의와 페미니즘: 베스텐트 한국판 8호 |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엮음 | 파트리크 자흐베·자라 렌츠·에벨린 슈타머·다니엘라 시크·카르슈텐 울리히 외 19명 지음 | 사월의책 | 284쪽

 

비판적 사회이론으로 20세기 사상운동의 한 축을 이끈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비판적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모임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같은 저명한 20세기 사상가들은 물론, 의사소통 이론으로 유명한 위르겐 하버마스와 인정투쟁 이론으로 새로운 사유 지평을 보여준 악셀 호네트 등의 뛰어난 동시대 학자들 역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다. 이러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실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펴내는 공식 저널이 바로 『베스텐트』(WestEnd)다.

잡지명인 ‘WestEnd’는 사회연구소가 속해 있는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서구의 종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색깔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2012년부터 연간지로 발행되고 있는 ‘베스텐트 한국판’은 현대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들에 대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심도 깊은 사회철학적 논의들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독자적 편집권을 갖고서 한국 연구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 있다. 

올해 출간된 베스텐트 한국판 8호 『능력주의와 페미니즘』은 ‘사회적 계층 상승과 몰락’이라는 주제와 ‘디지털 페미니즘의 정치적 지형’이라는 주제를 한데 엮어서 능력주의와 페미니즘 이슈를 심도 깊게 탐구한다. 

▶ 능력주의의 약속은 깨졌는가? 지금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는가?

세습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믿음은 근대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규범적 원칙 중 하나다. 그러나 오늘날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 저하되면서 능력주의 약속이 도처에서 깨어지고 있다. 그 반작용으로 능력주의 원칙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또한 능력주의가 개인들에게 주어진 불평등한 조건을 ‘능력’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는 비판 역시 거세지고 있다. 능력주의 약속의 붕괴와 능력주의 원칙의 강화 및 비판이 동시에 나타나는 기묘한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불안과 혐오 정서 뒤에는 능력주의 약속의 붕괴라는 현실이 숨어 있다. 사회적 계층 사이에 새로운 장벽이 세워지면 계층 상승에 대한 ‘투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빈곤의 대물림, 세대 간 지위 안정화, 금융계급의 사회적 구별짓기 등과 같은 실제 사례들에 대한 치밀한 관찰 및 분석을 통해 능력주의 이슈를 다각도로 해부함으로써 모순된 사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능력주의 약속의 붕괴라는 현실은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정치가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나아가는 조건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사회적 계층 몰락에 대한 불안이 소수자 혐오로 나타났듯이 페미니즘의 흐름들 속에서도 난민이나 트랜스젠더 혐오가 등장했으며, 유리천장 깨뜨리기 담론은 생존이나 야망 담론과 결합되면서 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한 전략으로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혐오 정치, 남성-약자 서사 구축, 대림동 여경사건, 여성리더 담론 등과 같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상황 속에서 페미니즘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 ‘평준화된 중산층 사회’는 어떻게 붕괴하는가?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의 급증은 비단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에 따라 그 원인과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 역시 전 세계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은 ‘사회적 계층 상승과 몰락’이라는 1부의 쟁점 주제 아래 독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능력주의 사회의 붕괴 현상을 다룬다. 주로 독일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지만 우리 실정과도 많이 닮아 있어 충격을 준다.

독일 사회는 전통적으로 ‘평준화된 중산층 사회’로 여겨져 왔으나 최근 들어 “계층 몰락 사회”나 “재봉건화” 같은 시대진단적 표현들로 재규정되고 있다. 또한 빈곤 상태에서 계층 상승을 이뤄낸 자서전적인 이야기들도 큰 관심을 얻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 계층 상승과 몰락이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중산층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불안을 말해준다. 사회적 이동성이 저하되고 사회 구조의 침투 불가능성이 강화될수록 사람들은 불평등 문제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약속이 붕괴되는 상황이자 동시에 능력주의 원칙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다. 이 책의 1부는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몇 가지 명제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회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상세한 관찰과 심층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 능력주의의 붕괴인가? 능력주의의 강화인가?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파트리크 자흐베, 자라 렌츠, 에벨린 슈타머가 공동 집필한 글 「능력주의 약속의 붕괴? 불평등 증가 추세 속의 주관적 계층 상승 인식」은 능력주의의 자명성이 붕괴되는 현실 속에서 불평등 및 사회 이동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양적, 질적 연구를 모두 수행한 사회학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계층별로 계층 상승에 대한 인식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중상층에서는 지위 상승에 대해 ‘개인주의적 해석’을, 중하층에서는 ‘투쟁적 해석’을 보였는데, 여기서 개인주의적 해석은 멘토의 개인적 도움에 의해서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고, 투쟁적 해석은 계층 상승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희생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계층 상승 지향성 자체가 와해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능력주의 약속의 붕괴 속에서도 개인적인 성취적 특성은 여전히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 약속의 붕괴와 능력주의 원칙의 강화가 계층별로 전혀 다른 방식의 압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음으로 빈곤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다니엘라 시크, 카르슈텐 울리의 글 「특권 없는 계층 가족들의 계층 상승 및 유지를 위한 행위와 전략: 빈곤을 대물림하는 세대들에 대한 “문화적” 관찰」과 세대 간 이동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미리암 샤트, 니콜레 부르찬의 글 「중산층에서 세대 간 지위 안정화의 문제: 두 자영업 가족 분석」은 하류 계층이나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고, 유지하고, 보장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고, 이런 노력이 무엇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인 지그하르트 네켈은 「포섭적 배제: 글로벌 금융계급 환경에서의 사회적 구별짓기」라는 글에서 우버(Uber)부터 에어비앤비(Airbnb)에 이르는 현대적 공유경제 문화 속에서 어떤 방식의 구별짓기가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제 계층 간의 구별짓기는 더 이상 유형의 사치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포섭과 배제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공유경제의 구별짓기에서 중요한 것은 평등 위에서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역설, 더 정확히 말해 포섭을 통해 배제한다는 역설이다.”(79쪽)

마지막으로 사회철학자 슈테판 포스빙켈은 「사회학의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지위적 인간」이라는 글에서 지위 상승 동기를 “암묵적 인간학”으로서 사회과학 연구에 도입하는 것이 얼마나 이론적으로 정당한지를 탐구한다. ‘지위 지향적 인간’의 모형은 ‘경제적 인간’의 모형만큼이나 사회과학 영역들에 널리 퍼져 있는 가정인데, 이는 지위 다툼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지위 상승 지향이 마치 개인들에게 핵심적인 것으로 보편화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정당한 것인가? 포스빙켈은 ‘기업가적 자아’가 보편화된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삶의 지향을 추구하며, 지위 다툼보다 오히려 ‘보통의 삶’을 유지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 디지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적 불안의 만남

이 책의 2부에서는 현재 한국의 온라인 페미니즘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 현장감 높은 시도들을 선보인다. 2016년 본격화된 ‘미투’ 열풍은 디지털 매체를 통한 네트워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학자들은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페미니즘 제4의 물결’ 또는 ‘디지털 페미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정치는 신자유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나아가기도 했다. 가령 페미니즘의 흐름들 속에서도 난민이나 트랜스젠더 혐오가 나타나기도 했으며, 유리천장 깨뜨리기 담론은 생존이나 야망 담론과 결합되면서 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한 전략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온라인 페미니즘에 대한 분석 작업을 넘어서 이를 신자유주의적 불안의 확산이라는 거시적 맥락과 연결시키고 기존 페미니즘 담론들이 젠더 정의를 구현하는 데서 가지는 한계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부록으로 게재된 조현준과 주디스 버틀러의 대담은 버틀러의 작업 전반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한국 내 페미니즘 상황에 대한 중요한 의견 교환을 담고 있다.

1.
먼저 김보명의 글 「‘혐오’의 정동경제학과 페미니스트 저항의 정치학: ‘일간 베스트’, ‘메갈리아’, 그리고 ‘워마드’를 중심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불안이 어떻게 혐오로 전치되고 있는지 그 정치학의 전반적 지형을 조망해준다. 남성중심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 베스트’ 이용자들의 신자유주의적 불안이 여성, 퀴어, 이주민 등과 같은 타자에 대한 혐오로 전치되는 상황뿐 아니라 이에 저항하여 등장한 ‘워마드’가 난민과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등 자신이 비판하는 혐오의 문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황까지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2.
다음으로 김수아와 이예슬의 글 「온라인 커뮤니티와 남성-약자 서사 구축」은 온라인 공간에서 남성들이 어떠한 서사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는지를 분석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 커뮤니티의 남성 이용자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여성들에게 발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특권’으로 이해한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원리에 충실한 이들은 기계적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를 ‘공평함’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소수자들을 위한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피해자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한국의 남성들이 남성-약자 서사 속에서 젠더 정의를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공평성으로 치환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이어지는 추지현의 글 「“생물학적 여성”을 통한 젠더 변혁의 불/가능성」은 일부 래디컬 페미니즘이 강조하는 “생물학적 여성”이 안티페미니즘의 정서와 연결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여준다. 추지현은 대림동 여경사건을 둘러싼 담론을 분석하는 가운데 불법촬영물에 저항하는 혜화역 시위가 기반으로 삼았던 “생물학적 여성”이야말로 대림동 여경의 무능을 비난했던 안티페미니즘이 기반으로 삼았던 차별의 기반이며, 이런 점에서 양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물학적 성별을 자연화시키는 데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마지막으로 이현재는 「신자유주의 시대 젠더 정의와 ‘유리천장 깨뜨리기’」라는 글에서 ‘유리천장 부수기’ 담론이 신자유주의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개인적 성공 담론으로 전치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나아가 개인적 성공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흐름이 혐오세력에 의해 전치된 공평성 개념만큼이나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능력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글들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의식은 디지털 시대 혐오 정치와 페미니즘 정치는 신자유주의적 불안 속에서 또 다른 소수자 혐오, 능력주의적 공평성, 피해자 물화, 생존을 위한 성공 담론으로 전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젠더 정의를 위한 새로운 틀 짜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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