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의 역할은 예술가를 꾸짖고 또 꾸짖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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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의 역할은 예술가를 꾸짖고 또 꾸짖는 일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10.12 0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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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음악을 말하다: 거장 극작가의 음악 평론 | 조지 버나드 쇼 지음 |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348쪽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인 버나드 쇼는 젊은 시절 극작가로 성공하기 위하여 런던으로 이주해 글쓰기에 전념했고, 각종 매체에 문학, 연극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평론글을 써내려갔다. “악보를 읽는 법도, 그 어떤 악기로 음표 하나 소리 내는 법도 모르”던 쇼는 순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력만으로 음악 평론가가 되었으며, 그렇기에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능히 읽을 수 있는 음악 평론”을 쓰고자 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이렇듯 쇼만이 쓸 수 있는, 쇼를 닮은 글이라 할 수 있다.

버나드 쇼는 약 13년간 신문과 잡지의 비평란을 담당하며 수많은 글을 남겼다. 출간된 음악 평론집만 해도 장장 2,7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책은 그 가운데서 오늘날 흥미롭게 읽을 만한 글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 쇼의 나이 서른 초반이던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에 걸쳐 약 6년간 〈스타The Star〉와 〈월드The World〉지를 통해 선보인 음악 평론이 그 가운데서도 정수로 꼽히는데, 이 책에 수록된 글들 대부분이 바로 그 시기에 쓰인 것들이다.

런던에서 가장 활발하면서 동시에 가장 논쟁적이기도 했던 쇼는 책의 서두에서 자신이 음악 평론가로 활동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나의 평론문은 당시의 지배적인 음악 평론 방식과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어 아마 다른 언론인들은 이 모든 게 한바탕 농담은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런 이유로 쇼의 글은 이론적인 차원에 집착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으레 쓰기 마련인 “학술적이기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읽기조차 힘들고 종종 앞뒤도 맞지 않는 글”쓰기 역시 지양함으로써 독자 곁으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다.

버나드 쇼는 모차르트와 바그너 음악을 높이 샀다. 예술에서의 가장 큰 성공은 본인이 속한 혈통의 시원始原이 아니라 마감자가 되는 것이라며, “100년의 시간이 다시 흘러 1991년이 오면 바그너가 20세기 악파의 시작이 아니라 19세기의 끝이자 베토벤 악파의 종결자였음을 온 세상이 이해하게 될 것”이며 이는 “모차르트의 가장 완벽한 음악이 19세기의 시언始言이 아니라 18세기의 종언終言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훌륭한 음악에 붙는 연주가 형편없을 경우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기도 한다. 어느 날 영국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라인의 황금〉 연주를 듣고는 “부디 더 이상 나빠지지만 말라고 내가 빌 정도로 형편없었다. 넘실거리는 강물을 표현해야 할 전주곡을 듣고는 마치 라인강이 끈끈한 시럽-그것도 여기저기 덩어리진 시럽-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쓴다.

                  버나드 쇼
                  버나드 쇼

대체로 평론가들은 특정한 작품을 비평할 때 최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한 채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쓴다. 작품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경우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은 없다며 애써 부연하기도 한다. 뛰어난 식견을 가진 전문가라 해도 예술가가 공들인 결과물을 평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는 당당히 ‘개인적 원한’ 때문에 혹평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심적인 평론가라면 예술가의 죄과에 상응하는 ‘박해’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예술가를 꾸짖고 또 꾸짖어 개전의 노력을 보이도록 이끄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작곡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공연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헨델 사후 꾸준히 이어지던 헨델 페스티벌의 〈메시아〉 공연은 보통 천 명에 달하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무대를 꾸리는 것이 마치 유행과도 같았다. 하지만 쇼는 이와 같은 대규모 공연이 템포나 표현 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하며 이를 ‘폭력 행위’로 규정한다. 심지어 천 명의 아마추어 예술가를 “천 개의 목구멍”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 거칠어지는 이유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오라토리오가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쇼가 생각하는 적정 인원은? 딱 스무 명이다.

평생에 걸쳐 수많은 글을 쓰며 인상적인 문장들을 남긴 쇼의 재능은 음악 평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책에는 “천박한 표현이었더라도 여러분을 웃게 하였다면 개의치 않으려 한다. 천박함은 문필가가 필히 가져야 할 가질 가운데 하나다”, “평론가는 시계를 멈추는 존재다. (…) 평론가는 돌로 만든 벽에 자신의 머리를 던져 짓찧는 존재다”, “단 한 차례의 끔찍한 공연에도 발끈하여 예술가의 개인적 원수가 되는 사람이 진정한 평론가요, 훌륭한 공연을 여러 차례 접하고서야 그 화를 누그러뜨리는 사람이 또한 진정한 평론가다” “훌륭한 유머만큼 진지한 것은 달리 없다”처럼 거듭 되뇌게 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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