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과 소설의 절묘한 결합으로 소설의 역사를 새로 쓰다
상태바
희극과 소설의 절묘한 결합으로 소설의 역사를 새로 쓰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0.12 0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희극적 소설 | 폴 스카롱 지음 | 곽동준 옮김 | 나남 | 472쪽

 

17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뷔를레스크 장르의 대가 폴 스카롱을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국내 최초로 번역 출간되었다. 당시 프랑스 문학계에 큰 화제를 일으켰던 뷔를레스크는 패러디의 한 장르로 고상한 것을 저속하게, 진지한 것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이 양자를 대조시킴으로써 웃음을 유발하고, 이를 희화화함으로써 야유하고 풍자한다. 이러한 뷔를레스크 장르는 당시 귀족의 세련된 취향과 재치를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프레시오지테와는 상반된 특징으로 서민대중과 지식인, 심지어 귀족들의 이목까지 집중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저자 폴 스카롱은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뷔를레스크 장르를 태동하고 유행시킨 거장이다.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우스꽝스러움, 희화화, 풍자, 패러디, 조롱 등 장르 특유의 기법을 성공적으로 문학작품에 녹여냈다고 평가된다. 《희극적 소설》은 1651년 1부, 1657년 2부가 출간됐지만 스카롱의 죽음으로 끝내 완성되지 못한 스카롱의 대표작이다. 

《희극적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인 한 유랑극단이 지방 각지를 전전하며 가는 곳마다 소란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일상이 난장판의 연속인 그들 앞에 납치, 결투, 모험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소설의 서술방식은 놀랄 만큼 독특하고 파격적이다. 유랑극단의 배우인 르 데스탱과 레투알이나 자신의 페르소나인 라고탱 등 등장인물들에게 일어난 모험을 화자가 이야기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화자가 되어 자기 이야기를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배우들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스페인 단편소설 4편이 삽입되어 등장인물이 이를 낭독하기도 한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에서도 이야기는 전체적인 짜임새를 갖추고 중심 이야기와 수많은 곁가지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고 포개지면서 사슬처럼 연결되어 내용을 풍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소설 속의 소설 등으로 이루어져 서사의 복합적 의미를 만드는 서술구조, 즉 미자나빔(Mise en abyme)은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의 미학적 원리가 되었지만,《희극적 소설》이 출간된 17세기 중반에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실험적이었다. 스카롱은 선구적인 형태의 미자나빔 방식을 치밀하게, 자유자재로 선보이며 문학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희극적 소설》은 17세기 중반 이전에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됐던 ‘희극적 이야기’와 ‘소설’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스카롱은 이 책에서 유랑극단 배우들의 현실을 패러디한 ‘희극적’ 요소와 현실을 환상적으로 보려고 한 ‘소설적’ 요소를 융합하고자 시도한다. 아무리 세속적이고 보잘것없는 현실도 소설의 제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예기치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가장 자유분방한 상상력 속에서 소설은 항상 삶을 비춰 볼 수 있는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스카롱은 서민이나 하층민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고, 그들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거칠고 저속한 언어와 난폭하고 상스러운 행동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그러나 익살스럽게 그려내며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서술해 웃음을 자아낸다. 한편, 전통적인 소설처럼 납치, 변장 등 주인공들의 온갖 우여곡절로 이야기의 줄기를 형성한다. 스페인 단편들에서는 외형상으로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는 귀족 부인들이나 대영주들처럼 가난한 시골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당시 생경했던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을 배경으로 적극 활용하며 허구 세계에 대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스카롱은 이렇게 한 작품 내에서 희극적 이야기와 전통 소설의 요소를 절묘하게 융합하며 자신의 창의성과 과감성을 유감없이 드러냄으로써 소설이라는 장르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평가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