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의 대 개혁가, 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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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세의 대 개혁가, 왕안석
  • 이근명 한국외국어대학교·동양사
  • 승인 2021.10.1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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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왕안석 평전: 중국 중세의 대 개혁가』 (이근명 지음, 신서원, 297쪽, 2021.08)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다. 심지어 중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땅에서 살았던 레닌도 그에 대해, ‘중국 11세기의 개혁가’라 칭하고 있을 정도이다. 왕안석은 역대의 황제라든가 사상가 몇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역사상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도 적지 않은 분량이 할애되어 왕안석의 개혁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 개척해간 선구자이자 대지주, 대상인의 횡포를 억제한 인물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왕안석에 대해 평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지녀왔다. 그러던 차에 십여 년 전 일본인 학자가 저술한 왕안석 전기 하나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것도 결코 일급 학자라 할 수 없는 사람의 저작이었다. ‘왕안석이 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기로서니 이러한 일본 서적까지 번역되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계에도 만만치 않은 중국사 연구의 전통이 있으며, 우수한 중국사 연구자도 적지 않다. 하물며 일본은 우리에게 복잡다단한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닌가? 중국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우리는 일본과 달라야만 할 것이다. 이후 천천히 시간이 날 때마다 왕안석의 평전을 적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왕안석의 개혁과 함께 송대의 역사는 급속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는 국가의 모든 것을 뜯어 고쳤다.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사회 등 모든 것이 개혁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두고 통상, ‘왕안석의 신법’, 혹은 ‘왕안석의 변법’이라 부른다. 신법의 도입과 더불어 북송의 역사는 전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이후 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송의 역사는 왕안석 및 그가 도입한 신법을 둘러싼 논란으로 지새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북송뿐이 아니었다. 남송 시대에도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정치, 경제, 문화의 각 분야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면서 북송의 정계는 확연히 두 진영으로 갈라섰다. 즉 왕안석 신법에 동조하는 측 및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측이 그것이다. 이 양 진영을 ‘신법당’과 ‘구법당’이라 부른다. 구법당은 왕안석 및 신법에 대해 실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왕안석 신법이 시행되던 시기 신법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신법당에 속했던 인물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대다수의 관료들, 특히 명망 있는 원로라든가 중견 사대부들은 모두 구법당이었다. 이는 무슨 연유에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왕안석의 신법’이라 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개혁’이라 알고 있다. 심지어 구법당이 신법에 대해 반대한 것은, 그들이 대지주 및 대상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즉, 신법은 중소 지주나 중소 상인을 보호하려는 취지를 지니고 있었고, 이것이 대지주나 대상인의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에 구법당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아직껏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구법당을 대표하는 인물은 사마광, 한기, 부필, 구양수, 소식, 정호 등이다. 모두 한결같이 그 시대 최고의 명신이자 최대의 학자들이었다. 사마광은 유명한 역사서 ≪자치통감≫의 저자이다. 한기와 부필은 왕안석이 집권하여 개혁을 추진할 당시 정계 최고의 원로였다. 또 정호는 동생 정이와 더불어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구법당 진영의 인물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학자들이었다. 설마 이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따라 ‘약자의 보호’라는 선의를 지닌 신법에 반대했으랴? 하물며 그들이 신봉하는 유학, 그리고 성리학은 천하 창생(蒼生)을 향한 인의(仁義)를 표방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들이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신법이 창생에게 절대적 선(善)이었다면 그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을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해석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러한 해석은 20세기 초중반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유물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역사를 오로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인식해야 된다고 여겼던 시대의 산물이다. 

왕안석의 신법이 ‘약자의 보호’라는 사회정책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재정 확충의 추구’라는 지향이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왕안석에게 이른바 겸병지가(兼竝之家), 즉 대지주 및 대상인으로부터 중소 농민과 중소 상인을 보호한다는 정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재정 확충이 그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집권기를 통해 그는 신법의 시행 실적을 가지고 지방관에 대한 고과를 결정하였다. 신법의 시행 실적이란, 다름 아니라 신법을 시행하여 얼마나 많은 재정의 잉여를 남겼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관들은 왕안석이 지니고 있었던 또 다른 지향, 즉 ‘약자에 대한 보호’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무리를 감수하며 신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폐단이 발생하였다. 구법당 인사들이 지적했던 것, 즉 ‘신법이 천하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산다.’는 정황이 이러한 구조에서 등장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당송시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것이다. 또한 시인과 사인(詞人)으로서도 결코 무시 못 할 지위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유학자로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왕안석은 자신의 학문, 즉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유학의 결정판이라 여겼다. 그의 학문을 신학(新學)이라 부른다. 신학은 북송 중기와 후기를 통해 도학(道學), 즉 후일의 정주학(程朱學)보다 월등히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는 자신의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 즉 ≪삼경신의(三經新義)≫와 ≪주관신의(周官新義)≫를 과거 시험의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심지어 문자학에 있어서도 자신의 이해(≪字說≫)가 최종적인 도달점이라 여겼다. 

이렇듯 박학다식하였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고 모두 유속(流俗)에 찌들었다고 몰아세웠다.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신법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첨예해졌다.

왕안석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학부 4학년 졸업 논문을 작성할 때부터였다. 이래로 30여년, 그 사이 다른 분야나 주제로 관심을 돌린 적도 많았으나, 왕안석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유지하였다.

이 평전은 가능한 한 평이하게 적으면서도 약간 필자의 목소리를 담으려 하였다. 교양적인 서적이되 왕안석과 관련한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소개한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더불어 정치가이면서도 문인이었던 왕안석의 면모를 살리고자 하였다. 정치가였던 왕안석에 대해서는 비판과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인으로서의 왕안석을 두고서는 고래로 찬사가 쏟아졌다. 왕안석이란 인물의 종합적 이해를 위해서는 자신만만하고 독선적이었던 정치가의 면모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치를 구사하는 문학가의 심성도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 평전에서는 명시, 명문장이라 평해졌던 문학 작품을 소개하며 이를 통해 왕안석의 생애와 행동을 살펴본다는 방침을 지니려 하였다.  

하지만 책을 출간하고 보니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왕안석의 개혁을 평가하는 핵심은 그것이 실제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에 대해 군데군데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였으나 조금 소략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대외 전쟁에 대한 서술이 지나치게 많고 다소 지리하다는 점도 실망스럽다. 대외 전쟁의 강조는 사실 이 저술이 지닌 특장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다. 왕안석의 신법이 신종의 절대적 지원 아래 추진되었다는 것, 그리고 신종이 염원하였던 대외 공업 달성의 의지에 부응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이 부분의 서술이 과도하였다고 여겨진다. 현대 역사학에서 바라보는 왕안석 상에 대한 소개도 조금 덧붙이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미진했던 부분은 금명간 보완하여 개정판에 담으려 한다.   


이근명 한국외국어대학교·동양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로 중국 중세사(송대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역사학회 회장, 송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된 저작으로 ≪남송시대 복건 사회의 변화와 식량수급≫(신서원, 2013), ≪왕안석 자료 역주≫(한국외국어대 지식출판원, 2017), ≪송명신언행록≫(편역, 전4책, 소명출판, 2019),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사계절,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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