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공화국과 토지 공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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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공화국과 토지 공개념
  • 권내현 고려대·한국사
  • 승인 2021.10.1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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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다음의 내용을 주장한 인물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첫째,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토지의 점유 권한은 농민에게 있다. 셋째, 생산은 공동으로 하되 분배는 각자 투입한 노동력에 따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친북좌파’의 주장으로 매도될지도 모를 급진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실학자인 정약용이 구상한 토지개혁론 일부다.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도 토지 소유의 불평등으로 인한 경제력 격차는 오늘날 못지않게 개혁적인 지식인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들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주요한 전제 조건을 토지 국유화에서 찾았다. 정약용보다 백여 년 전의 인물이었던 유형원도 지주들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재분배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너무 과격하고 이상적인가? 그렇다면 한 집의 기본 토지 소유 규모를 정하고 그 이상은 무제한의 매매를 통해 균등한 소유를 지향했던 이익의 주장은 어떠한가?

이들은 기본적으로 토지를 공공재로 간주하며 일하는 농민들에게 이용의 우선권을 주도록 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놀고먹는 상류층도 생산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일한 만큼 자신의 몫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이는 일종의 불로소득에 대한 제한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 역시 토지 사유제의 폐해를 간파했다. 하지만 이미 고착화한 소유권을 부정하기 어려웠던 그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를 국가가 세금의 형태로 수취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른바 근대적인 토지 공개념의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1987년에 개정된 우리 헌법에도 토지 공개념의 정신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토지와 주택을 포함한 부동산 문제는 난마처럼 얽혀 부의 불평등을 갈수록 키워왔다. 역대 정부는 경기 부양이란 명분으로 끊임없이 개발을 부추겨 우리 사회를 토건 공화국, 부동산 공화국으로 전락시켰다. 투기라는 본질에 애써 눈감은 채 가격 폭등이나 폭락만을 막아서 현상을 유지하려다 이마저 실패를 거듭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 과정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투기 세력은 대장동 사건에서 보듯이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과 카르텔을 형성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다.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이 커질수록 노동의 가치는 존중받지 못한다. 더불어 경쟁의 출발선에서 불평등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이는 다시 기회의 불평등으로 확장될 것이다. 부의 상속은 그러한 불평등을 심화하고 계층의 고착화를 가져온다는 점 또한 명확하다. 청소년들까지 건물주를 꿈꾸는 사회에서 그 꿈을 실현하는 확실한 방법은 건물주인 부모를 만나 상속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 파생된 문제들은 결국 소수를 제외한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불행으로 귀착된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조선 시대 개혁가들의 이상처럼 토지를 국유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구상한 것처럼 소유에 상한을 두거나 불로소득을 제한할 수는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미 택지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이나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토지초과이득세법이 만들어진 전례도 있다. 정부나 이해 관계자들의 외면으로 축소되거나 사문화한 토지 공개념을 전면화하는 것이야말로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첩경이다. 기존에 나온 토지보유세 강화나 장기 공공임대주택의 확대 외에도 토지나 주택 소유의 제한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도 대장동 사건을 계기로 개발 이익의 공적 환수에 동의하는 듯이 보이니 이익이나 정약용의 기대가 일부나마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권내현 고려대·한국사

한국근세사전공,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최근 저서로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모두의 한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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