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가 철학의 미래 : 천라이의 『인학본체론(仁學本體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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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가 철학의 미래 : 천라이의 『인학본체론(仁學本體論)』
  • 이원석 전남대학교
  • 승인 2021.10.04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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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에게 듣는다_ 『인학본체론: 사람에 대한 유학의 최종 인식』 (천라이 지음, 이원석 옮김, 글항아리, 744쪽, 2021.08)

 

이 책은 천라이(陳來, 1952~)의 2014년 작 『인학본체론(仁學本體論)』을 국역한 것이다. 천 교수는 중국 칭화대(淸華大) 철학과 교수이자 청화대국학연구원장으로서 당대의 대표적 중국철학 연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주희철학연구』(朱熹哲學硏究, 1988)와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1989)을 통해 주자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런 업적은 국가교육위원회로부터 인정을 얻어 “특별 공헌 철학박사학위 획득자”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98년에는 “세기횡단형 인재(跨世紀人才)”로 선정되었다. 

그의 저서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권 소개되었다. 방금 언급한 그의 대표작인 『주희철학연구』는 이종란 등이 국역하여 주희의 철학』(예문서원, 2002)으로 출간되었고, 『송명이학』(宋明理學, 1992)은 안재호에 의해 번역되어 『송명 성리학』(예문서원, 1997)으로 한국의 독자를 찾았다. 『유와 무의 경계 - 왕양명 철학의 정신』(有無之境-王陽明哲學的精神, 1991)은 전병욱이 번역하여 『양명철학』(예문서원, 2003)으로, 『고대사상문화의 세계』(古代思想文化的世界, 2002)는 진성수가 국역하여 『중국고대사상문화의 세계』(진성수 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8)로, 그리고 『공자와 현대 사회』(孔夫子與现代世界, 2011)는 강진석이 번역하여 『진래 교수의 유학과 현대사회』(예문서원, 2016)로 각각 출간되었다. 본서 『인학본체론』은 중국 광명일보사와 중국출판인협회가 발간하는 『중화독서보(中華讀書報)』에 의해 “2014년도 십대 도서”로 선정된 명저이다. 

이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천 교수에 따르면, 『인학본체론』은 리저허우(李澤厚, 1930~)의 두 저서 즉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該中國哲學登場了?, 이유진 역, 글항아리, 2013)와 『중국철학은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中国哲學如何登場?, 이유진 역, 글항아리, 2015)에 자극을 받아 저술되었다고 한다. 리저허우가 “정감본체론(情感本體論)”으로 중국철학의 핵심을 파악했던 것을 상기해 보면, 천라이의 『인학본체론』은 리저허우를 의식하여 지어졌음을 짐작게 한다. 

리저허우는 탈현대가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했으므로 이제 중국철학이 세계무대에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발언 이면에는 탈현대 사상 혹은 그 철학의 주요 논점을 중국의 전통 철학이 이미 선취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정감본체론을 통해 탈현대 사상과 중국 전통 철학을 회통시킴으로써, 단숨에 후자를 세계 철학의 한 주역으로 데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정감본체론은, 간단히 말해 인간 이성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 유기체의 지각 체계의 특수한 발전 양상에 해당되므로, 인간의 정감, 즉 감성에 철학적 사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감본체론이 이성의 전면적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성을 감성의 특수 양태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서 그친다. 

천라이 교수는 리저허우의 이런 입론이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철학 특히 중국 전통 철학을 생물학으로 해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다면 천라이는 이성만을 인간과 세계의 본질로 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그의 스승 펑유란(馮友蘭)에 대한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펑유란은 초기에 신실재론을 받아들여 리(理)를 실체적 존재로 여겼다가, 후기에는 도가(道家)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이른바 “대전설(大全說)”을 펼쳤다고 하는데, 천 교수는 이 두 가지 학설을 통합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펑유란식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의 통합을 시도하는 셈이다. 

천 교수는 이를 위해 슝스리(熊十力, 1885-1968)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에 주목한다. 슝스리는 본체와 작용의 불가분리를 주장하는 유기체적·일원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한편, 하이데거는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면서 동시에 스스로 숨는다.”라고 함으로써 현실 내 존재의 총체를 진리로 여긴 바 있다. 이렇듯 하이데거와 슝스리 사이에 형성된 존재론상의 유사점에 바탕을 두고 천라이는 본체 위주의 신실재론과 작용 위주의 실용주의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천라이 교수는 슝스리의 ‘본체’ 자리와 하이데거의 ‘진리’ 자리에 인(仁)을 갖다 놓는다. 그래서 천 교수에게 ‘인’이란 끊임없이 작용하되 저 자신의 동일성을 영원히 상실하지 않는 유기적 전체이자 각 작용 내에 편재하는 보편적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그에 따르면, 고대에 ‘인’은 단지 ‘이웃 사랑’ 정도의 소극적 의미만 띠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만물일체(萬物一體)”를 가능케 하는 원리이자 “만물일체” 그 자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은 초월적 실재이자 유기적 전체이므로 ‘인’에서 본체와 작용은 통일된다. 천 교수에 따르면 유가철학사는 ‘인’의 자기 개현의 역사이며, 유학자의 깨달음이란 개인이 ‘인’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이 인간 개체 속에서 스스로 발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천 교수의 이런 입론은 단지 주장만 나열해서는 성립되지 않으므로 그는 중국의 전통 유가 철학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그 논거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여러 논거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주희 철학의 존재론에 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이다. 그에 따르면, 주희는 만년에 이르러 리(理)와 기(氣)를 뛰어넘으면서 그 양자를 포괄하는 본체, 즉 ‘인’에 대해 적극 사유하였고, 이런 사유는 명대의 왕수인(王守仁)에 의해 정점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주자학을 “리학(理學)”으로, 양명학을 “심학(心學)”으로 호명하면서 그 두 가지를 대립시키는 것은 사태의 표면적 관찰에 불과할 것이다. 실상은 ‘인’이라는 본체가 송대에서 명대를 거쳐 가면서 자신을 개현(開顯)해 왔는데, 그 개현 양상에 따라 각각 “리학” 또는 “심학”이라고 불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천라이에게서 ‘인’이라는 본체는 영원히 변치 않고 존재하면서 동시에 시대에 따라 달리 발현하는 실재이다. 그것은 당연히 현대에도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인애, 자유, 평등, 공정, 화해의 다섯 가지 가치가 그 발현물에 해당된다. 그는 이 다섯 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중국의 시민사회적 덕목을 구성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들 가치 중 인애가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상이 역자가 이해한 이 책의 대체적 흐름이다. 저자가 제시한 논지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서구 근대의 비합리주의 계열 철학으로 유가 철학을 재해석했던 시도는 이미 20세기 중·후반 타이완·홍콩 등의 이른바 현대신유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천 교수의 시도가 새로울 것이 있겠느냐는 평가가 있을 수 있겠다. 또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리저허우의 입론과 천라이의 그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던질 법하다. 무엇보다도, 주희가 ‘리’와 ‘기’를 넘어서는 본체로서 ‘인’을 상정했다는 저자의 이해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킬 만하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념론적이라 하여 비판받았을 현대신유가적 사유의 한 갈래가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더 나아가 향후 중국을 인도할 정치·사회적 가치의 근거로서 재조명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더구나, “생활유학”, “제도유학” 등 유학으로부터 철학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윤리와 제도만을 실용적으로 섭취하려는 흐름이 중국의 민·관 양측에서 형성되는 이 시점에서 유학의 철학성을 대담하게 제창하는 저자의 기백과 통찰은, 일견 전일적으로 보이는 현대 중국 사상계의 이면으로부터 역동성이 다양하게 분출될 미래를 예시(豫示)한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이원석 전남대학교·동양철학

서울대학교에서 「북송대(北宋代) 인성론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근현대한국총서 시리즈 여섯 권(『서학의 충격과 접변』, 『동도서기의 의미지평』, 『서양 정치사상과 유교 지평의 확장』, 『사회사상과 동서접변』, 『동서사상의 회통』, 『동서접변 연구의 평가와 전망』)이 있고(2020), 역서로 『주희의 역사세계』(2015), 『이 중국에 거하라』(2012), 『주자와 양명의 철학』(2012)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정조와 윤행임의 「대학장구 서문」 해석과 인물성동이 논쟁」(2020), 「청년기 김굉필의 사상 전환과 그 지성사적 배경」(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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