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이상한 고요함’과 변혁의 불씨로서의 생명적 반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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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이상한 고요함’과 변혁의 불씨로서의 생명적 반복운동
  • 나병철 한국교원대학교
  • 승인 2021.10.04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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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반복의 문학과 진실의 이중주: 반복과 재현을 통한 진실의 구원』 (나병철 지음, 소명출판, 564쪽, 2021.08)

 

우리 시대는 물질적 삶이 화려해질수록 점점 더 진실과 정의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이다. 이 책은 풍요 속에서 모두가 목말라하는 진실과 정의를 되찾으려면 가슴의 동요 같은 생명적 반복운동을 회생시켜야 함을 살펴봤다. 오늘날 윤리와, 진실, 주체성이 낡은 단어로 버려지는 것과 심장을 움직이는 생명적 반복운동이 사라져가는 일은 표리를 이루고 있다. 

생명적 반복운동이란 험한 세상에 고통스럽게 던져진 존재가 원래의 능동적 신체로 회귀하려는 탄력성의 본능이다. 심장의 동요, 춤과 음악, 축제와 혁명이 그런 반복운동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춤과 음악, 축제와 혁명의 공통점은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디우는 사건이 일어나면 존재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진리(진실)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이 생기면 저절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타자)에 대한 공감으로 가슴이 동요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가슴의 동요를 축제와 혁명에서 부활하는 능동적 반복운동의 은유로 사용하고 있다. 축제에서 심장이 뛴다는 것은 신체가 춤과 음악 속에 몰입해 있다는 뜻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동요하는 사람만이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본능적인 반복이 위축되고 모두가 숨죽이며 살아가는 오늘날은 아직 남아 있는 가슴의 반복운동이 출발점이 된다. 오늘날은 능동적 반복운동이 회생해야만 진실과 정의가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가슴이 뛰는 사람만이 다시 일어서서 숨 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제까지 진실은 주체의 이성의 작동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은 진리는 이성이고 정동(affect)은 감성이라는 이분법을 부정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최고의 이성은 능동적 정동의 운동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진실을 말하는 능동적 정동’을 심장의 반복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은유로서의 ‘심장의 반복운동’이 회생해야만 능동적 정동이 생성되며 우리는 진실에 다가간다.   

오늘날 진실과 정의가 희미해진 것은 역사적 주체의 상실과도 연관이 있다. 과거에는 진실의 인식과 실천이 역사적 주체의 이성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주체도 민주화 시대의 민중적 주체도 사라진 시대이다. 우리 시대는 역사적 주체의 신화를 상실한 채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서사에 예속되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역사적 주체에 대한 회의는 신자유주의 이전에 이미 스피박에 의해 발해진 바 있다. 스피박은 역사적 주체란 지식인이 투명하게 개입해 만든 신화이며 실상 하층민 서발턴은 말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은 무력한 서발턴에서 더 나아가 하층민이 『기생충』(봉준호)의 기생충이나 『해피 아포칼립스!』(백민석)의 좀비처럼 살아가는 시대이다. 이 책은 타자가 서발턴과 기생충(앱젝트)으로 무력화된 시대에 어떻게 진실과 정의가 부활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오늘날 같은 고요한 세상에서는 역사적 주체 대신 타자의 반복운동을 주목해야 한다. 서발턴과 앱젝트는 이성적인 말을 할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반복운동을 하는 존재이다. 물속으로 사라진 세월호 학생들도 경찰에게 목이 눌린 플로이드도 이성적인 저항의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대신 그들은 반복운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가슴을 동요시키며 ‘이상하게 고요한’ 세상에 물결이 일어나게 했다. 플로이드의 ‘나는 숨 쉴 수 없다’는 본능적인 목소리는 유한한 세계에 갇힌 90%의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번져갔다. 그런 가슴의 동요의 무한 반복이야말로 레비나스가 말한 무한의 윤리일 것이다. 모든 게 자본의 포섭된 시대에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심장에 남아 있는 무한의 윤리이다. 

물론 가슴의 반복운동만으로 진실이 연주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운동은 이성적인 재현의 서사와 결합해야 현실성을 얻을 수 있다. 그처럼 재현이 중요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재현의 서사에 의해 역사적 주체와 진실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진실은 지식인의 이성이나 서발턴의 반복만으로 연주되는 고독한 독주(獨奏)가 아니다. 타자의 가슴의 반복운동은 90%들에게 공명을 일으킬 때 이미 이중주로 점화되기 시작한다. 그런 반복의 윤리는 이성적 재현과 결합하는 순간 이중주를 증폭시키며 진실을 구원할 수 있다. 

 

                                                                스피박과 프레드릭 제임슨

스피박처럼 역사적 주체를 회의한 또 다른 사람은 프레드릭 제임슨이었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대명사 총체성은 그것이 부인되는 움직임 속에서만 확인되며, 재현될 수 없음을 감지하는 순간에만 재현된다. 제임슨이 말한 재현불가능한 것이란 타자의 반복운동일 것이다. 총체성은 역사적 주체가 실현하는 것이 아니며, 재현불가능한 타자의 반복이 무한한 동요 속에서 재현과 결합할 때 비로소 진실로 확인된다. 재현불가능성(타자)과 재현(이성)의 결합, 반복과 재현의 이중주, 그 윤리의 정치의 결합(엔리케 두셀)이야말로 진실의 이중주의 과정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고독한 지식인도 무력한 타자도 진실과 정의를 회생시킬 수 없다. 그와 달리 사랑을 할 때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이중주만이 얼어붙은 진실을 해빙시켜 준다.    

진실의 인식과 실천을 이중주로 말한 또 다른 철학자는 하버마스였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주체-주체 관계의 이중주는 대칭적 교섭의 한계 때문에 체제 내의 변화에 머물게 된다. 반면에 자아와 타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이중주는 타자를 통해 재현불가능한 실재(The Real)에 다가가는 재현의 서사를 가능하게 해준다. 더욱이 오늘날은 인격성의 상품화로 재현의 영역이 상품창고가 된 세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품의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타자)이 가슴의 동요를 전파해야 비로소 진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촛불집회와 플로이드 시위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그처럼 진실의 이중주가 지금 사라져가는 생명적 반복운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와 비슷한 반복운동이 자본주의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M-C-M’의 회로를 무한 반복하며 사람들을 동원하는 기제이다. 하지만 자본의 반복은 사람들을 동원하는 동시에 실제로는 진짜로 가까워지지 못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에서 우리가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고독한 나르시시스트로 살아가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에 생명적 반복운동은 타자의 동요를 무한 반복하는 플로이드의 반인종주의 시위에서처럼 멀어진 사람들을 다시 가까워지게 만든다. 그처럼 멀어진 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반복운동은 희망버스, 촛불집회, 미투 운동 등 오늘날의 변혁운동 공통요소이다. 이 책은 타자와 교감하는 생명적 반복운동의 회생이 어떻게 고요한 세상에서 변혁의 물결을 일으키며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나병철 한국교원대학교·한국현대소설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문학의 시각성과 보이지 않는 비밀》, 《친밀한 권력과 낯선 타자》, 《감성정치와 사랑의 미학》,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소설의 귀환과 도전적 서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문화의 위치》(호미 바바), 《해체론과 변증법》(마이클 라이언), 《서비스 이코노미》(이진경)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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