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유목민을 찾다”…유목과 정주, 두 문명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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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유목민을 찾다”…유목과 정주, 두 문명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9.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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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 기행 신화부터 역사까지, 처음 읽는 유목문명 이야기 |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96쪽

 

초원의 인문학자 공원국이 과거 제국을 자처한 국가들의 박물관부터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 텐트까지, 2년여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유목문명의 흔적과 이야기를 찾아 엮은 책이다. 이로써 유목문명이 정주문명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융화한 인류 역사의 한 축임을 밝힌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정주문명에 산다. 농사짓지는 않더라도 고정된 일터와 주거지가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눈감을 때까지 태어난 국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국가' 자체가 울타리와 성벽, 도시에서 이어진 정주문명의 산물이다. 그런 우리에게 유목문명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다. 광활한 초원을 가축과 함께 돌아다니는 유목민의 모습이나, 말에 올라 세계를 지배한 몽골제국의 이야기 정도를 떠올릴 뿐이다. 우리에게 그들은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유목문명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우리야말로 진짜 아웃사이더일지 모른다. 이 책은 정주문명과 함께 인류 역사를 이끈 한 축으로서 유목문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원의 인문학자 공원국은 “지역적으로는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시간상으로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누비며 유목문명의 흔적을 찾는다. 그 흔적이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고, 원래 모습을 간직한 유물이나 유적이기도 하지만, '자유', '공유', '환대' 등 여전히 유효한 정신적 가치이기도 하다.

인류가 처음으로 삼림에서 나와 초원을 밟은 서기전 3500년경부터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19세기까지 유목문명의 긴 이야기는 정주문명과의 충돌과 융화로 점철되어 있다. 두 문명은 서로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인류 역사를 끌어왔다.

저자는 그러한 상호작용의 첫 번째 계기로 여신 신앙을 지목한다. 고대에는 지구 곳곳에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찬양하는 여신 신앙이 부흥했다. 그런데 자연을 착취하는 생산양식(농사)과 “폭력적인 위계 체제(국가)”에 바탕을 둔 정주문명이 힘을 얻으며 여신 신앙 또한 핍박받게 된다. 이에 여신은,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즈음 “(척박한) 환경에서 동물의 욕구를 맞추며 탄생한” 유목문명에서 마지막 안식을 누린다. 저자는 여신 신앙을 둘러싼 이 '대립'에 주목한다. 여신 신앙 자체는 곧 자취를 감추지만, 착취와 비착취라는 두 문명의 근원적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운 스키타이는 정복해도 지배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충돌할 상황이 되자 그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는 잃을 도시도 곡식을 심을 땅도 없다.”

유목문명과 정주문명이 충돌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융화하며 역사에 다른 길을 제시했다. 저자는 흉노와 한나라, 위구르와 당나라의 관계에서 그 예를 살핀다. 서기전 200년 화친을 맺은 후부터 한무제 등장 전까지 70여 년간 흉노와 한나라는 충돌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립과 타협으로, 즉 정치로 위기를 관리했다. 위구르와 당나라도 비슷한 경우다. 안녹산의 난으로 위기에 처한 당나라를 위구르가 돕자, 두 세력 간 견마 무역이 시행된다. 전성기에는 1년간 말 1만 마리가 거래될 정도로 거대한 시장이었다. 경제에 기반한 평화 체제가 정착한 것이니, 이 또한 유목문명과 정주문명이 충돌 대신 융화를 택한 결과다.

이처럼 얽히고설킨 충돌과 융화의 실타래를 풀며, 결국 저자가 찾고자 하는 것은 '우리 안의 유목민'이다. 우리가 누리는 정주문명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유목문명과 상호 작용한 결과다.

책은 여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유목문명의 다음 행선지로 서기전 2500년경의 우랄산맥을 조명한다. 그곳의 목축민은 초지를 향해 점점 남하하면서 정주민과 충돌하기 시작한다. 충돌의 과정은 파괴 일색이었으나, 저자는 이후 벌어진 어떤 현상에 주목한다. 유목문명 안에서 폭력을 반성하고 창조를 모색하는 도덕률이 탄생한 것이다. 

저자는 창조를 모색한다는 데서 유목문명의 제일 척도인 자유의 가치를 본다. 이때 자유는 이동의 자유만을 뜻하지 않고, 생각의 자유를 포함한다. 이는 창조 행위와 타인을 아우르는 행위로 이어지는데, 우랄산맥의 목축민에 이어 소개되는 페르시아인의 역사가 좋은 예다. 유목민 출신인 그들은 이방의 모든 부족신을 인정하고 아우르는 유일신 개념을 창안해 인류 정신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다. 생각의 자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모든 유목민이 자유의 가치를 수호한 것은 아니다. 책은 유목집단에서 유목국가로, 다시 유목제국으로 강성해지는 유목문명의 역사를 따라가다가, 그 끝에서 어떤 '변종'을 소개한다. 바로 칭기즈칸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는 “자유를 포기하고 강함을 얻었다”고. 칭기즈칸은 기존의 씨족, 부족 체제와 완전히 다른 호(戶) 단위로 몽골제국을 조직하고, 평시와 전시를 가리지 않고 늘 이 상태를 유지하니, 이로써 '병영국가'가 탄생한다. 자유를 잃은 유목문명은 의의를 잃을 수밖에 없다. 칭기즈칸이 죽고 티무르라는 더 악독한 자가 잠시 위세를 떨친 뒤 사라지자 유목문명은 뚜렷한 존재감을 잃고 만다.

그렇다면 유목문명은 '배드 엔딩'을 맞은 것일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목문명의 거대한 주체들이 사라진 뒤에도 우리가 눈여겨볼 집단이 남았으니, 바로 카자흐다. 티무르 사망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카자흐도 칸이 있었으나, 그는 부족장들의 의견을 모아 일을 처리했고, 부족장들 또한 부족민의 의사를 존중했다. 정주문명의 열강을 자부하던 러시아의 관리들은 차르에게 절대복종하는 데 익숙한 탓에, 이처럼 “느슨한 지배 체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16세기 중앙아시아가 극심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 카자흐는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모굴리스탄칸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여기에서 저자는 유목문명 특유의 공유와 환대의 가치를 발견한다. 역사 내내 그들은 '사냥꾼의 윤리'를 견지했다. 사냥꾼은 함께 잡고 똑같이 나눈다. 이와 비슷하게 유목민은 모두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똘똘 뭉친다. 척박한 환경에서는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자유와 공유, 환대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많은 유목민이 있다. 기행길에 그들을 만난 저자는 유목이라는 삶의 방식 자체가 그러한 가치를 낳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이슬람을 믿는 유목민 여성은, 유부녀는 말을 타선 안 된다는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자유다. 척박한 땅에서 거둘 수 있는 것은 적고, 세간은 가축에 실을 만큼만 챙길 수 있으므로 모든 함께 나눈다. 이것이 그들의 공유이고 환대다. 이 가치들은 선의가 아닌 생존과 실용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렇기에 “지구도 약자도 한계 상황에” 이른 오늘날 더 큰 의의를 지닌다. “이것이 (저자가) 유목을 다시 불러내는 이유다.”

저자 공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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