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만나는 노자와 루소의 대담록 - 자연으로 돌아가자!
상태바
연극으로 만나는 노자와 루소의 대담록 - 자연으로 돌아가자!
  • 정세근 충북대·동양철학
  • 승인 2021.09.27 07: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에게 듣는다_ 『노자와 루소: 여든하나의 방』 (정세근 지음, 지식산업사, 584쪽, 2021.08)

 

노자와 루소, 만날 것 같은가? 그들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이 책은 그 가능성에 대한 서술이다. 

노자는 기원전 5세기의 중국 사람이고, 루소는 18세기의 프랑스 사람이다. 노자는 사관(史官)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행적이 모호한 사람이고, 루소는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했지만 당시에는 정치적 망명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노자는 싸우지 말자고 그렇게 주장했건만 루소의 사람됨은 신경질적이어서 누구와도 다퉜다. 노자는 나름의 덕목으로 어머니처럼 자애롭게 살자고 했는데 루소는 평생 데리고 다니다가 말년에서야 결혼한 테레즈를 ‘보충 대리’(supplément: 데리다가 나중에 이 말을 애용한다)로 써먹었다.  

노자는 내버려 두면 잘 될 것이라 말했지만 그의 주장이 교육학적인 표준이 되지는 못했다. 내버려 두는 것이 교육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의 교육적 상상은 그를 현대 교육학의 비조로 이끌었다. 학생들을 내버려 둘수록 잘 크기 때문이었다.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내세워 나라건 사람이건 소규모일수록 행복함을 말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오가지 않는 공동체가 최상이었다. 루소도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같은 작은 나라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소의 도시국가는 민주정의 아테네가 아니라 군정의 스파르타였다. 

노자는 유학자들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았지만 그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환영받았다. 관직에 나가면 유가였지만, 그 노릇을 관두면 다들 도가가 되었다. 정치를 하고 제도를 세우고 문명을 이루는 데는 유가의 이념이 좋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역시 소박한 삶이 몸과 마음을 위해 최고였다. 

루소는 서양사상사에서 정말 이단아다. 철학사에서 그런 뒤집기를 이룬 이를 꼽으라면 니체다. 그는 글쓰기조차 새로웠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 다시 보기를 통해 니체는 그의 원군을 확보하여 독보적인 지위를 누린다. 루소의 사상도 서양적 맥락과는 전혀 이질적인데도 너무도 독특했는지 이후 루소를 따르는 철학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루소야말로 서양사상을 기준으로 볼 때 이단 중의 이단이다. 니체가 뒤집어보기를 했다면 루소는 뿌리 파기를 했다고나 할까. 니체는 보지 않았던 나무의 뒷면을 보았다면 루소는 새로운 나무를 심었다고나 할까. 

루소를 잇는 혁명가는 있었다. 처음은 로베스피에르이고 다음은 엥겔스다. 로베스피에르가 출정을 하면서 루소에게 헌사(1789.4.25. 밤)를 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덕분에 루소는 늦게나마 혁명의 횃불을 밝힌 사람으로 인정되어 파리의 판테온으로 이장된다. 그러나 문제는 로베스피에르가 루소를 빌어 그렇게 많은 사람을 공포정치 기간에 죽였다는 사실에 있다. 루소의 ‘자유롭게 강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근거로 로베스피에르는 많은 사람의 자유를 강제했다. 

다음, 엥겔스의 사유재산과 가족제도 그리고 화폐에 대한 분석이 공산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데 그 가운데 사유재산의 탄생과 권력화에 대해서는 일찍이 루소가 그려낸 것이었다. 한 사람이 먹을 것이 많고 열 사람이 먹을 것이 없으면 열 사람이 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먹는 것이 당연히 벌어질 일인데 법률이 그것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는 일정 부분 루소에게 빚질 수밖에 없다. 

루소는 그런 점에서 두 가지 단초를 서구사회에 마련해주었다. 첫째는 프랑스혁명이고, 둘째는 공산혁명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강조되지 못하는가? 

노자를 위시한 도가도 사실상 비슷한 처지다. 중국 내 혁명은 종교의 탈을 뒤집어쓰고 벌어진 적이 많았다. 한말의 오두미교(천사교)가 그랬고, 청대 태평천국이 그랬다. 노자를 교조로 받드는 오두미교에는 노자의 반전 평화 사상이 들어있었고, 기독교적인 틀을 지녔다는 태평천국의 태평은 오두미교 직전에 일어난 태평도(황건적의 난)에서 그 어휘를 빌려오고 있었다. 아울러 노자에 이어 장자의 제물(齊物) 사상은 혁명의 기치인 평등의 이념으로 쉽게 탈바꿈되었다(장태염).  

그런데 루소는 어떻게 그렇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내 글의 시발점이 여기에 있다. 

나는 루소가 노자를 보았다는 착안을 갖고 오랫동안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글은 심증의 결과물이다.  

근사한 근거는 루소가 열 살 때 외사촌 형 아브라함과 함께 목사 밑에서 라틴어를 배웠음을 적어놓고 있다는 것, 루소가 죽은 지 십 년 후 1788년 1월 10일 영국 왕립학술원 회원이던 매튜 레이퍼(Matthew Raper)가 노자를 소개했다는 것, 나아가, 루소 당시 인도의 동인도회사에는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해 놓은 라틴어판 노자가 돌아다녔다는 것(레이퍼가 그것을 가져온다)이다. 그리고 이미 주역을 라이프니츠에게 부베(Boubet) 신부가 1703년 4월 1일 편지를 통해 소개한다는 것(라이프니츠의 인공언어의 구상이 이미 3천 년 전에 중국에 있었다고)이다. 

게다가 사상적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당시 루소의 학문적 정적이었던 볼테르가 『논어』 속의 공자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중국 열은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볼테르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으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을 주장하는 계몽주의자답게 ‘종교 없이 도덕정치를 이룬 공자’에 홀딱 반해 있었음이 글로 남아있는데, 이에 정면적으로 반대하는 루소가 기댈 데는 노자밖에 없었다. 

공자의 정명(正名)과 노자의 무명(無名)이 대척점에 있듯이, 볼테르와 루소는 그 시절 대립관계에 있었고, 볼테르의 비난과 루소의 응수는 오랜 기간 동안 유가와 도가의 실랑이와 많이 닮아있다. 많이 엉뚱한가? 노자와 루소의 중복되는 개념을 보자. 

소박(素朴)이라는 말을 영어로 쓸 때 아직도 불어로 많이 쓴다. 왜냐? 서양어에서 소박(naive)이란 말은 좋은 뜻이 아니다. ‘생각이 나이브하다’고 할 때의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정제되지 않은, 세련되지 못한, 원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루소가 이 말을 매우 좋게 쓴다. 그래서 그것의 명사화된 형태로 그러한 의미를 지닐 때는 불어처럼 굳이 부호를 붙이면서까지 소박(naiveté; naïveté; naivety)이라고 쓰는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소박은 좋은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박의 어원이 누구인가? 바로 노자다. 박(樸; 朴)이 노자 철학의 핵심이다. 박으로 돌아가라. 꾸미지 않은 대로, 엉성한 대로, 버려진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받아들이란다. 소박의 소는 깨끗함, 박은 거침이다. 아기들 살결이 얼마나 흰가. 그래서 소하다. 아기들이 아무 데나 오줌 싸지 않는가. 그래서 박하다. 그런 원초적인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노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 가자와 상통하지 않는가? 

루소도 자기가 말하는 자연 상태가 원시 상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상정하는, 제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자연 상태를 스스로 표제어(exergue)로 단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사회 상태(état de société)에 반하는 자연 상태(état de nature)는 야생(sauvage)이 아니다’라고 볼테르의 비난에 루소는 항변하는 것이다. 

몬테나 숲에서 백 살을 맞이하여 자이나교도의 자살(살레카나: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굶어 죽는 것)처럼 스스로 삶을 마무리한 스콧 니어링의 부인인 헬렌이 쓴 ‘단순한 생활’이 ‘소박한 밥상’으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말에서 소박이란 말이 얼마나 좋은 뜻으로 쓰이는가를 느꼈다. 그렇게 루소도 그런 소박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렵지만 또 있다. 루소의 개념 가운데 ‘완성가능성’(perfectibilité; perfect ability)은 프랑스 사전에서 루소의 말로 등재된다(책의 「머리말」을 보라). 나는 이 말에 해당하는 노자의 말이 무엇인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런데 맞아떨어지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된다, 스스로 이룬다는 ‘자화’(自化)라는 개념이었다. 알다시피 기독교 문화에서 자화는 불경이다. 스스로 완성된다는 것은 독신이다. 신의 도움이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경향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가 13세기까지 무슬림의, 유대인의 철학자로 이단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그의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을 떠올리라. 완성태라는 개념도 그에게는 있다. 거기에 신이 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루소는 ‘스스로’(auto)라는 말은 피해 간다. 그러나 노자에게 ‘스스로’(自)는 얼마나 좋은 말인가. 자연을 비롯하여 만물은 ‘자화’(自化)하고 천지는 ‘자정’(自淨)하고 인민은 ‘자부’(自富)하고 마침내 하늘의 도조차 ‘자래’(自來)한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넘치는 나의 마음을 어찌할꼬? 그래서 이 책이 나왔다. ‘여든하나의 방’이라는 말에서 노자를 읽어본 사람은 눈치챌 것이다. 노자의 81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었구나. 그렇다. 노자의 81장을 연극적 장치를 통해 루소가 묻고 노자가 답하거나, 노자가 묻고 루소가 답한다. 지은이인 나는 거기에 훈수꾼으로 불쑥불쑥 들어간다. 노자와 루소도 결코 알지 못하는 한국적인 상황이나 문제를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자나 루소의 말이 나의 말이 아닌 것은 당연하니, 훈수꾼의 역할은 최소화했다. 그래도 못 다한 이야기는 『노자와 루소, 그 잔상들』(2020)에 실었다. 

81막은 모두 연극적 분위기를 내기 위해 ‘검은 방: 진리와 세계-그 길만이 길은 아니다’, ‘금은보화가 넘치는 방: 진정한 가치-건강한 삶’, ‘거울이 있는 방: 하나의 기-나의 바람’, ‘개다리 밥상이 있는 방: 자연이란 말의 탄생-말을 아끼자’, ‘잔치가 벌어진 방: 고독한 자아-홀로 서라’, ‘나무토막 빼내기 놀이(Jenga)가 있는 방: 부득이로의 권유-어쩔 수 없듯 하라’, 심지어 ‘노래방: 황홀의 세계-길을 열다’도 있다. 이렇게 노자와 루소가 매번 색다른 설치 환경 속에서 문답을 통해 놀게 해 놓았다. 참고로, 이 책의 표지에 늘어져 있는 엉성한 그물은 ‘제73막 그물이 쳐진 방: 자연의 그물-성글면서도 놓치지 않는다’에서 그 모티브가 나왔다. 

이미 서구화된 한국인이라서 이 글의 후반부에 나오는 루소를 중심으로 비교되는 홉스와 로크(제57막) 등의 이야기가 더 재밌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발췌독을 해도 좋지만 후반부(「덕경」인 제38막 이후)부터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공자, 맹자, 칸트, 헤겔, 이이, 이익이 등장한다고 해서 겁낼 것은 없다. 모두 한 마당에서 어울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이 어는 산속에서 글을 썼지만 참으로 신나는 마당이었다. 이것을 연극으로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다. 배우까지 지정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국립극단의 전문가가 옆에 있어 물어보았더니 억 단위란다. 억! 

노자와 루소의 공통점은 성선이란 가치에 있었다. 성선을 어렵게 보지 말자. ‘사람을 믿어보자’는 것이다. 내버려 두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굳이 건드려서 탈내지 말자. 그래서 나는 노자의 무위자연을 이렇게 푼다. ‘남을 어쩌지 말라는 것이 무위이고,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듣자는 것이 자연이다’라고. 그래서 남에게는 무위이고, 나에게는 자연이다. 우리의 괴로움의 처음이 바로 ‘남을 어쩌고 싶어’ 생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자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루소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더욱 권하고, 노자와 루소를 통해 동서양의 철학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더더욱 권한다. 이 책은 노자의 번역서 대신 봐도 될 정도로 소상한 ‘노자 쉽게 읽기’이자, 루소의 전반적인 사상을 당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하여 소개하는 ‘루소 쉽게 읽기’다. 

내 글이 난삽하다고 생각하시는 어떤 분께서 전화를 주셨다. ‘허허, 이번 글은 읽혀. 대화 잖아, 대화!’ 


정세근 충북대·동양철학

국립대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워싱턴 주립대에서 비교철학을 강의했으며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동철학회 회장을 3년 동안 연임했으며, 여러 철학회에서 연구위원장과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철학회 차기회장이다. 주요 저작으로 《제도와 본성》(학술원 우수도서), 《노장철학》(문체부 우수도서), 《철학으로 비판하다》(올해의 우수도서)를 비롯해서 《노자 도덕경: 길을 얻은 삶》,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그밖에 《위진현학》(문체부 우수도서)을 편집했고, 《광예주쌍집》(상·하)을 번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