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의 비밀 레시피, 『푸른 독서노트』
상태바
미셸 투르니에의 비밀 레시피, 『푸른 독서노트』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 승인 2021.09.27 0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베르타스]

 

2016년에 타계한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르 클레지오, 모디아노와 함께 노벨 문학상 후보로 해마다 이름을 올렸지만 수상의 영광을 안지는 못했다. 투르니에가 파리 맹아 학교의 첫 점자책으로 그의 소설 『방드르디』가 출간되어 초청받은 자리에서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만큼 값진 일”이었다고 회고한 것을 보면 이 상에 대한 미련이 어느 정도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문학이 창작이고 ‘새로운 것’을 쓰려는 작가의 성과물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때 이 작가는 그런 생각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투르니에는 무릇 독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는 안 되고 어디서 보고 읽은 듯한 것을 다시 발견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철학의 길을 걷다가 문학에 입문한 이방인이기 때문에 문학의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할 수 없고 독자에게 익숙한 방식의 글쓰기에 충실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투르니에가 세상에 있는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쓰기 위해서 빌려온 소재는 성경과 신화, 전설, 『로빈슨 크루소』 같이 이미 신화적 지위를 얻은 소설이다. 독자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기대처럼 ‘익숙한 것’을 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다시 쓰기를 넘어서 자신의 창작 과정과 작품의 의도를 낱낱이 밝히기까지 한다. 투르니에 작품의 연구자 입장에서는 작가와 작품 분석에 들이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자신의 분석의 깊이와 비평의 날카로움을 과시하기 힘들어진다. 2006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푸른 독서노트Les vertes lectures』(현대문학)도 일종의 서평집 내지 독서록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의 창작과정을 말해주는 글쓰기 ‘비밀 레시피’이다. 작가는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소설의 창작과정과 작품 탄생에 영향을 준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밝힌다. 그는 쥘 베른부터 루이스 캐럴, 러디어드 키플링, 대니얼 데포에 이르는 11명의 작가와 그들의 소설에 대한 자신의 관심, 문학적 영향 등을 들려준다. 이들의 공통점을 보면 ‘세계명작’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로 재생산되고 있는 모험과 동화적 상상력으로 충만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것이다. 동화 혹은 우화적 성격의 이야기에는 ‘빈틈’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작가적 상상력의 ‘개입’이 쉬운데 투르니에는 그 틈을 파고들어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1924.12.19.∼2016.1.18)

투르니에는 누구보다도 쥘 베른을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겸 지리학자로 평가한다. 그는 쥘 베른이 말라르메의 섬세함 그리고 프루스트의 분석과 대척점에 있는 ‘청소년용’ 작가로 평가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의 대결 속에서 벌어지는 ‘영웅적 인식 주체의 합리성의 추구’ 혹은 ‘주체와 존재의 모험’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 말하면 ‘선험적 앎’과 ‘지리적 현실’이 부딪치는 소설이 바로 『80일간의 세계일주』이며 이 모험 소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철학을 신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문학에 이식’하는 것을 작가적 목표로 삶았던 투르니에 다운 이해방식을 보여준다. 쥘 베른 소설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의 모험담은 작가의 장편소설 『레 메테오르』의 장과 폴의 입문적 여행으로 변형되어 어김없이 다시 태어난다.

『정글북』을 쓴 키플링에 대한 평가와 이해도 날카롭다. 우선 인도의 ‘정글’은 열대지방의 ‘원시림’이 아닌 ‘사막’을 의미한다는 지적으로 시작하여 인도를 알기 위한 열쇠는 대부분 가짜인 것처럼 키플링이 들려주는 인도와 모글리의 모험담도 그의 개인적 경험담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다만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읽어낸 “인간은 동물과 유사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동물을 꿈꿨다”는 원시 자연 속에서의 행복을 『방드르디』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특히 『방드르디』와 관련해서는 소설의 탄생 배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문명인, 미개인’의 구분은 서구의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고독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최초의 창작 의도였다는 것, ‘고독은 현대병’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는 것 등이 그의 깨달음이자 작품의 핵심주제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왜 투르니에는 독자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는 자신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는 작가임을 선언한 이상 『푸른 독서노트』와 같은 창작 노트를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시 쓰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어 다시 태어난 이야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