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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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면피가 성공한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1.09.27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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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란 또 저명한 강연에서 정치인의 덕목으로 정열, 책임감, 판단력의 세 가지를 들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비단 정치인뿐 아니라 기업인, 행정가, 가장 등등 사람을 상대로 하는 모든 직업이나 신분에 적용될 수 있는 덕목이다. 나는 안 팔리는 ‘정치란 무엇인가’(일조각, 2018)라는 책에서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자질을 구분하고, 덕목으로 사명감을, 자질로는 판단력과 통솔력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이상적인 요소에 속한다. 모든 정치학 교과서와 정치 논평들이 비슷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 딴판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한국의, 미국의, 과테말라의 정치인들이 과연 정열과 판단력과 통솔력과 사명감을 갖춘 사람들인가? 예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에 새삼 실망해서는 안 된다. 동서고금에 공통된 이 사실에 일일이 실망하다가는 세상을 온전히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어떤 작가는 ‘후흑학’이란 책을 써서 과거 지도자들의 검고 얼굴 두꺼운 면모들을 파헤쳤다고 하던데, 읽어보지는 못하고 그냥 주워듣고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가 이런 정치인들의 ‘후흑’을 비판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어서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역시 책을 읽지도 않고 얘기하자니 문제가 있도다. 

정치인으로서 성공하려면 성실함이니 책임감이니 정열이니 따위가 문제가 아니고, 무엇보다 얼굴이 두꺼워야 하고 남의 고난과 불행에 눈 깜빡하지 않을 비정함도 갖추어야 한다. 서두에서 말한 이상적인 덕목들과는 달리 낯 두꺼움과 비정함은 정치인의 ‘성공 요건’이라 할 만하다. 기업인으로서의 성공도 마찬가지일 테고, 줄타기로 올라가는 고위 관료들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제도권에서 출세하는 학자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사회 전반이 아니라 정치인 개인의 이익으로 보면 이 성공 요건이 덕목이나 자질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데 왜 정치학 교과서나 교양 있는 담론들에서는 이 중차대한 요소들을 무시할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 지망생들이여, 그대들의 성공 여부는 그대들이 얼마나 철면피인가에 달려 있다”라고 설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야지 “거짓말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말도 해야 한다”라고 가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옆으로 걸어도 너는 앞으로 걸어라”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다.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요건은 극강의 권력욕이다. 모든 고난과 역경과 모욕과 비난을 무릅쓰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를 모두 물리칠 권력욕이 있어야 한다. 마약 중독자가 안 되는 줄 알면서 마약에 또 손을 댈 수밖에 없듯이, 집안과 가족이 모두 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강한 권력욕이 이 난장판 정치세계에서 정치인을 살아남게 만든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감각과 통찰력과 비전을 갖고 있어도 권력욕이 강하지 않으면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없다. 아무리 두뇌가 뛰어나도 공부하기 싫으면 학자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극강의 권력욕은 사람을 철면피로 만든다. 비정하게도 간교하게도 만든다. 삼국지의 조조가 오해로 한 사람을 죽였는데 오해였던 것을 알고서도 나머지 가족들을 몰살한 일이 있다. 복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것이 비정한 철면피의 권력욕이다. 성공하고 싶은 정치인들아, 이를 본받아라. 그런데 그러면 뭐 하냐. 조조, 만날 싸우기만 하다가 삼국 통일도 못 하고 병들어 죽었다. 영웅호걸들의 영웅담이 즐비하더니 막판에는 허무하게 그냥 다 죽고(싸우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통일은 엉뚱한 사람들이 하고... 삼국지도 참 용두사미다.

말이 조금 샜다. 결론을 내리자. 정치판이 아사리판인 것은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사판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인생판도 마찬가지일까? 그래도 성공 요건을 덕목이나 자질과 조금 더 가깝게 만드는 것이 그나마 좀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오지 않을까?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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