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방법서설』: 새로운 철학 프로그램 헌장
상태바
데카르트 『방법서설』: 새로운 철학 프로그램 헌장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9.27 06: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4강〉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4강〉_ 이재환 목포대 교수의 「데카르트 〈방법서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1. 서양사상 제 4강 이재환 교수(목포대 교양학부)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데카르트 『방법서설』: 새로운 철학 프로그램 헌장

 

이재환 교수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첫 번째 저작인 『방법서설』이 어떤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평생에 걸쳐 완수할 ‘새로운’ 철학적 프로그램 헌장을 담고 있는지” 살펴본다. 왜냐하면 이 저작이야말로 17세기 서구 지성사 현장에서 볼 때 “기존 교육 체계에 대한 강력한 고발서이자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헌장”이었기 때문인데, “그 헌장의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는 “이성의 자율성”을 꼽는다. 즉 “외부의 권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양식을 통해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그 “기초 위에서 학문을 쌓아 올라가는 것”이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이야기한다. 비록 “모든 학문들이 하나로 종합되는 ‘보편학’의 비전”, 그중에서도 “수학을 통해서 모든 학문을 통합하는 보편 수리학(mathesis universalis) 기획”은 실패하고 “그의 ‘과학적’ 주장” 또한 “틀렸지만 『방법서설』에서 보여준 그의 프로젝트의 범위와 높이는 그를 영원한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고 평한다. 

 

지난 8월 7일, 이재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4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헤겔은 『철학사』에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를 철학의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철학의 신대륙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성찰(Meditations)』(1641)의 유명한 슬로건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고 최초의 토대들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AT Ⅶ 17)라는 데카르트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과 공명한다. 이러한 전통에 대한 반항아이자 새 시대를 여는 개혁자로서의 데카르트가 자신의 철학 프로그램을 대중들에게 선포한 첫 번째 책이 바로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1637)이다. 비록 익명이지만 처음으로 출판한 책인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의 기초 위에서 도시를 건설하기를 거부하고, 도시를 부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반항아이자 개혁자로서의 데카르트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방법서설』은 기존 교육 체계에 대한 강력한 고발서이자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헌장이다. 데카르트는 “스승들의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글공부를 완전히 떠났다. 그리고 나 자신에서 혹은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데카르트의 혁신적인 방법의 발견은 “나 자신 안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AT Ⅵ 10) 나서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신 안에서만 길러낸 학문적 체계를 제시한다. 

『방법서설』의 급진성은 글쓰기 스타일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뿐만 아니라 이후 작품에서도 인용보다는 장식 없는 문체로 자신만의 고유한 학문적 주장을 전달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양식(bon sens)’을 가진 일반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프랑스에서 명확한 사유와 뛰어난 문체의 모델이 되었고 이를 반영하듯 1987년 『방법서설』 출간 350주년에 나온 책 제목이 『데카르트, 그가 곧 프랑스다(Descartes c’est la France)』일 정도였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의 마지막에 “[나는] 여기서 하나의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며, 나는 이 선언이 나를 세상에서 주요 인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고, 나 또한 조금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라고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방법서설』의 선언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세상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2. 

전통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신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방법서설』은 애매모호한 저작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전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6부에는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구절도 있다. 

또 잘 알려진 것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음과 같이 위대한 이성의 민주주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양식은 세상에서 가장 잘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AT Ⅵ 1) ‘양식 혹은 이성’은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힘”이고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동등하다.”(AT Ⅵ 2) 그런데 곧 데카르트는 이러한 평등주의에 반하는 주장을 한다. 모든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양식 혹은 이성을 바탕으로 지식을 재건축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이성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며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더 많은 독자에게 자신의 프로그램을 호소하기 위해서 『방법서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책을 쓰고, 또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반박을 보내라고 요청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내게 가할 수 있는 반박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경험은 내가 그 반박들에서 어떤 이익을 희망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AT Ⅵ 68)라고 말한다. 

 

3. 

‘서설(discourse)’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방법서설』은 자신의 ‘방법’을 적용한 결과인 세 개의 논고—『굴절광학(Dioptrique)』, 『기상학(Météores)』, 『기하학(Géométrie)』—의 서론으로 출판된다. 방법서설의 부제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들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서설(Discurs de la méthode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t chercher la vérité dans les sciences)”이다. 여기서 ‘이성’은 물론 데카르트의 이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방법서설』을 쓴 “내[데카르트] 의도는 저마다 자신의 이성을 잘 인도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방법을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이성을 인도하려고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것”(AT Ⅵ 4)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실천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앞서 언급한 세 편의 논고를 자신의 방법의 결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이 이론보다는 실천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방법이 실천과 관련이 있다면 방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따라할 수만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통해서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의 본(本), 하나의 ‘파라데이그마(paradeigma)’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이 ‘방법’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아니라 독자를 자극해 그 가치를 독자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책을 하나의 모델로, 모델 없이 스스로 발견한 모델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방법서설』의 독특한 점은 작가 자신을 교육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제시하려고 하는 모델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모든 학문들이 하나로 종합되는 ‘보편학’의 비전을 전달하려고 한다. 『방법서설』 이전에도 방법을 가르치는 많은 교과서와 주석서들이 있었지만 그 책들이 한 가지 학문에 적용되는 방법을 제시했다면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보편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보편학은 수학을 통해서 모든 학문을 통합하는 보편 수리학(mathesis universalis) 기획이다. 물론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보편 수리학은 “어떤 특정한 주제에 한정됨이 없이 순서와 척도에 의해 연구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어떤 일반적인 학문”(AT X 378)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서 자기 생각을 스스로 검토하는 것이 스승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된 전문가만큼이나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통해 열고자 했던 근대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과학적 방법의 기준은 외부의 권위에 있지 않고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의 빛’에 존재한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것처럼, 데카르트가 연 근대의 “합리성은 더 이상 실질적으로, 즉 존재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절차적으로, 곧 우리가 과학과 삶에서 질서를 구축할 때 사용하는 기준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경우 합리성은 [인간 내부의] 어떤 규칙들에 따라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규칙들이 바로 데카르트의 ‘방법’이고 데카르트는 이 방법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 ‘자연의 빛’으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 

진리 탐구는 당시의 ‘철학이나 종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의 빛에 관한 진리 탐구』의 시작 부분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자기 삶을 지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다른 이로부터 아무것도 빌려옴이 없이 자기 자신 안에서 찾도록 해주고, 나중에 자기 공부로 인간 이성이 소유할 있는 가장 정교한 모든 인식을 획득하게 해주는 수단들을 각자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영혼의 진정한 풍요로움을 명증하게 제시하고자 했다.”(AT X 496) 

 

4.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 세 개의 논고에 서문 역할을 하는 『방법서설』은 여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데카르트는 이 여섯 개의 부분을 다음과 같이 직접 요약한다. “1부에서, 사람들은 학문들에 관한 다양한 고찰들을 발견할 것이다. 2부에서, 저자가 탐구한 방법의 주요 규칙들을, 3부에서, 저자가 이 방법에서 끌어낸 도덕 규칙 몇몇을, 4부에서, 저자의 형이상학의 토대들인 신과 인간 영혼의 현존을 증명해주는 근거들을, 5부에서, 저자가 탐구한 자연학적 문제들의 순서를, 특히 심장 운동 및 의학에 속하는 몇 가지 다른 어려움들에 대한 설명을, 그런 다음 또한 우리 영혼과 짐승 영혼과의 차이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 탐구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저자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며, 어떤 이유들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는지를.”(AT Ⅵ 6) 그런데 이 요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방법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과 이성을 잘 인도하고 ‘보편학’을 전달한다는 부제와 달리, 『방법서설』의 구조는 언뜻 보기에도 하나의 통일된 작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패치워크’처럼 보인다. 

『방법서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비일관성과 ‘패치워크’는 데카르트가 처음부터 이 책을 출판하려고 계획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의 보다 포괄적이고 일관적인 학문적 체계를 담고 있는 책인 『세계』의 대체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기존의 지배적인 철학적 신념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단절하고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는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5. 

『방법서설』 1부와 2부 전반부는 데카르트의 지적 자서전이다. 데카르트의 대표적인 저작인 『성찰』에서 성찰자(meditator) 역시 ‘나’이지만 『방법서설』의 ‘나’와 같은 개인적인 나가 아니다. 『성찰』의 ‘나’의 자리는 성찰을 하는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나’이다. 반면에 『방법서설』은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작가의 삶, 책의 목적, 출판 과정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금방 드러나는 ‘개인적인 나’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방법서설』을 자신의 지적 자서전으로 시작하는 것일까? 

아마도 데카르트는 자신의 지적 자서전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이 제시하는 ‘방법’이 독자가 주의를 기울일 만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서전적 서사를 제공하면서 자신이 단지 양식을 공평하게 분배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이 양식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삶이 독자들이 모방할 만한 모델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방법서설』이 이전의 장르와는 다르게 고대의 모델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텍스트 참조 없이 고대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방법서설』 1부에서 흥미로운 점은 데카르트가 “이 글을 하나의 이야기(story)로만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하나의 우화(fable)로만 내놓을 뿐”(AT Ⅵ 4)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왜 자신의 방법을 하나의 ‘모델’로, 그래서 새로운 학문의 출사표이자 헌장으로 제시하는 데카르트가 이것을 ‘우화’로만 내놓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데카르트가 『세계』에서 구상했던 자연학의 기초는 지동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갈릴레오가 유죄 판결을 받자 데카르트는 1634년 4월 메르센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갈릴레오는 그의 견해를 가설로만 제시한 것처럼 변명하지만”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교 재판소는 천문학에서 이러한 가설의 사용까지도 금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AT I 288-289) 여기서 우리는 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이 글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하나의 우화로만 내놓을 뿐”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나 우화로 제시한 것을 단지 당시 권력으로부터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우화’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방법-우화’가 담고 있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우화는 자신의 교훈을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독자는 우화를 읽거나 듣고 난 후 자기도 모르게 그 교훈을 내면화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2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데카르트 역시 『방법서설』에서 베이컨처럼 학문의 ‘거대한 전환’을 기획한다. 하지만 경험적인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베이컨의 방법과 달리 데카르트의 방법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에 기초해 있다. 

『방법서설』 2부의 방법은 데카르트가 『규칙』에서 논의했던 것의 일부분이다. 데카르트는 『규칙』의 제4규칙 제목을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진리 탐구에 왜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말한다. “방법이란 확실하고 쉬운 규칙을 의미하고, 이 규칙을 정확히 지키는 사람은 결코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쓸데없는 것에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그래서 그는 지식을 점차 늘려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AT X 372)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은 네 가지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규칙은 ‘명증성’의 규칙이다. 즉 명석하고 판명하게(clear and distinct) 인식하는 것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명석하다’는 것은 한 대상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하고, ‘판명하다’는 것은 명확하게 파악한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데카르트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전통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전통 철학을 비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명증성은 삼단논법의 형식이 보증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의 기초는 감각이다. 하지만 첫 번째 방법에서 데카르트는 명증성이 감각이 아닌 정신적 직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것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학문의 명증성이 감각 경험이 아닌 정신을 통한 인식에서 온다는 점이다. 둘째, 정신적 직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첫 번째 방법은 확실한 동시에 새로운 내용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학문은 “모든 주제에 대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 범위가 확장”(AT X 374)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분석의 규칙이다. 이 규칙은 “내가 검토한 어려움들 각각을 가능한 만큼 그리고 그 어려움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만큼 작은 부분들로 나누는 것”이다. 세 번째는 종합의 규칙이다. 이 방법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쉽게 인식되는 대상들에서 시작해 조금씩, 계단처럼, 가장 복잡한 대상들의 인식에까지 올라가기 위해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인도하는 것”이다. 이 규칙은 삼단논법에서처럼 항(term)에서 명제(proposition)로 논증이 형식적으로 복잡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란 가장 확실한 기초에서부터 쌓아 올라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방법이 데카르트가 『규칙』에서 말한 연역과 연결된다. 마지막 규칙은 열거(enumeration)의 규칙이다. 이 방법은 “내가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정도로 완전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에는 우리가 ‘완전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할 수 없는 신비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수학에 기초한 확실성을 자연과학을 비롯한 다른 모든 학문에 확장하려는 기획의 일환이다. 데카르트가 『규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지식은 확실하고 명증적인 인식”(AT X 362)이어야 하는데 이 확실하고 명증한 인식을 담보해주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그래서 이러한 수학적 방법을 바탕으로 자연을 탐구한다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자연 역시 ‘수학의 언어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보편 수학’의 기획을 통해서 계획도시처럼 통일된 학문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태양의 빛이 여러 다양한 대상들을 비춘다고 해서 그 빛이 다른 것이 아니듯이, 학문들도 서로 차이가 없”(AT X 360)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도시를 떠받치는 기초가 바로 통일된 ‘방법’의 사용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을 통해서 생각한 ‘보편 과학’ 혹은 통일된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삶의 유용성이다. 사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의의가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생각은 『방법서설』에서도 드러난다. 6부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방법’을 제시한 이유가 “삶에 매우 유익한 여러 인식들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저 사변 철학 대신 사람들은 그 개념들에서 하나의 실천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AT Ⅵ 61)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때 하나의 실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학문의 나무’의 열매인 ‘기계학’ ‘의학’ ‘윤리학’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가 열매를 맺게 되면, 『방법서설』의 그 유명한 구절에서처럼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되는 것은] 지상의 열매와 모든 편의를 노고 없이 제공하는 무수한 기술의 발명을 위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삶에서 으뜸가는 선이자 다른 모든 선의 기초인 건강의 유지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정신조차도 신체의 기질과 기관의 배치에 의존하는 바가 아주 크므로 인간을 전체적으로 지금보다 현명하고 유능하게 만드는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의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AT Ⅵ 62) 철학의 목적이 삶에 유용함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데카르트는 그중 가장 유용한 것이 바로 의학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의학에 대한 강조는 데카르트가 중세와 결별하는 또 다른 장면 중의 하나이다. 

 

2부의 ‘방법’에 이어서 『방법서설』 3부에서 데카르트는 ‘임시 도덕’을 제시한다. 2부에서 네 개의 인식론적 방법을 제시했다면 3부에서는 네 개의 윤리적 규칙을 제시한다. “첫 번째 준칙은,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고, 어렸을 적부터 신의 은총에 의해 배워온 종교를 확고하게 견지하며,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취하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먼 의견에 따라 나를 지도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준칙은 나의 행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확고하고 결단력 있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의심스러운 의견이라 할지라도 일단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그 의견이 아주 확실한 것일 때만큼 따르는 것”이다. “세 번째 준칙은 언제나 운을 지배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지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세상의 질서를 바꾸기보다는 나의 욕망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준칙은 “내 이성을 계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치고, 진리 인식에 있어 내가 규정한 방법에 따라 가능한 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2부 방법의 첫 번째 규칙, 명증성의 규칙은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 외에는 판단을 중지하고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규칙을 모든 영역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부딪히는 많은 문제는 명석하고 판명하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3부의 ‘임시 도덕’은 2부의 이 첫 번째 규칙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는 일상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목적이 한편으로 의학이나 기술(기계학)뿐만이 아니라 ‘삶을 위한 규칙을 갖는 것’ 즉 윤리학이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더 구체적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우리에게 윤리적 지침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는 윤리적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법을 통한 삶의 유용함인 의학에서 윤리학으로의 이행이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의학에서 윤리학으로 관심을 옮기게 되는 것일까? 데카르트는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따라서 병을 치료하고 인간 수명을 연장하는 의학이 철학의 열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내 데카르트는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의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하나 『방법서설』 3부에서 이상한 점은 3부의 네 개의 윤리적 규칙이 『방법서설』 전체 내용과 일관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첫 번째 준칙에서 외부의 권위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방법서설』의 핵심은 외부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통해서만 옳고 그름을 검토하라는 것이다. 또 세 번째 준칙은 스토아 철학에서 주장하는 윤리학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미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1부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을 포함한 ‘고대 이교도들의 저서’를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모래와 진흙 위에 세워진 궁전”(AT Ⅵ 7-8, CSM I 114)과 비교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3부의 윤리적 규칙들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첫 번째 준칙에서 데카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양식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라’는 것이지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임시 도덕’의 첫 번째 준칙을 외부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보수적 규칙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준칙 역시 자연의 질서와의 합일을 중요시했던 스토아 철학자들과 달리 데카르트는 자연의 진보를 믿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준칙과 연결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진리 인식, 학문에서의 노력이 ‘극도의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네 번째 준칙은 데카르트에게는 학문 연구가 우리의 행복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행동 자체가 실천적 함축을 담고 있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2부의 방법에 기초한 진리 탐구의 노력이 없다면 3부의 도덕 규칙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3부의 도덕 규칙들이 없었다면 2부의 방법에 기초한 진리 탐구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2부와 3부의 상호 의존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성찰』에서는 의심하는 동안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서설』의 ‘임시 도덕’과 같은 삶의 규칙을 내놓지 않는가. 우선 『성찰』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 세계 자체가 의심되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문제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 반면 『방법서설』의 ‘개인적 나’는 2부의 방법을 학문에 적용시켜야 하는 동시에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따라서 비록 『방법서설』 3부를 마지막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이 아니라 2부 방법 이후에 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어떤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평생에 걸쳐 완수할 ‘새로운’ 철학적 프로그램 헌장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 헌장의 가장 중요한 항목은 바로 이성의 자율성일 것이다. 외부의 권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양식을 통해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 기초 위에서 학문을 쌓아 올라가는 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통해서 무의미한 논쟁과 기성세대의 완고한 선입견과 마주할 때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그 모델은 오직 자신만의 합리성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제시한 청사진에 따라 철학의 도시를 건립했다면, 혹은 ‘학문의 나무’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면 사유하는 자아의 직접적인 직관(형이상학)으로부터 자연 세계를 설명(자연학)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인간을 ‘자연의 소유자이자 지배자’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가 ‘보편학’의 구축이라는 철학적 야망을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그의 ‘과학적’ 주장은 틀렸지만 『방법서설』에서 보여준 그의 프로젝트의 범위와 높이는 그를 영원한 존경의 대상으로 남겨놓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