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판의 반지성주의와 무책임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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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판의 반지성주의와 무책임이 걱정스럽다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
  • 승인 2021.09.2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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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_ 대학직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 이후 벌써 일곱 차례나 대선(大選)의 경험치가 쌓였다. 심지어 부적격한 대통령을 선택했을 때 국가와 국민이 얼마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지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일례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일으킨 대(大)혼란, 사회적 갈등, 임기 중 직접 관여한 부패 스캔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탄핵소추와 인용 등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였다. 지금 그 두 전직 대통령은 대한민국 감옥에서 형을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애당초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 불상사이다. 

이점에서는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45대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했던 미국인들도 지난 4년간 그의 습관적인 거짓말, 독선, 편 가르기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대외신인도 추락이라는 국가적 수모를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도 사실상 트럼프의 즉흥성과 장삿속에서 비롯된 아마추어 외교가 빚은 대(大)참사로 보인다. 작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간 정부를 배제하고 탈레반과 전격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지만 않았더라도 어쩌면 이런 불행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트럼프 외교의 패착이 지금 바이든 대통령과 무고한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다. 

지금 각 당에서는 내년 3월 9일 20대 대선에 나설 후보 확정을 위한 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일찌감치 경선 일정에 돌입한 민주당은 10월 10일 최종후보 확정일까지 불과 20여 일을 남긴 상태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여당보다 경선 일정을 늦게 잡은 국민의힘도 지난 15일 1차 컷오프를 통해 8명의 후보를 확정한 이후 본격적인 경선체제를 가동 중이다. 양당의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론조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유권자들도 그들 못지않게 시시각각 변화추이를 살피고 있다. 이는 ‘될 사람 민다’라는 사표 방지 심리와 1등 아니면 끝이라는 냉혹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그 틈새에서 정치권과 언론의 교묘한 유착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이른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가 창출된다. 
 
이렇듯 정치권·언론·국민 3자가 대동소이하게 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하다 보니 좋은 정책이나 정치이념은 사치나 들러리쯤으로 여겨지고 제아무리 훌륭한 자격과 자질을 갖춘 후보라도 지지율이 높지 않다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역으로 정치경력도 없고 준비도 전혀 안 된 인물이라도 대중적 인기가 치솟으면 정치권의 호출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수개월 간 고공행진하자 과감히 직책을 내던지고 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다. 그는 “여론조사가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안 왔다”라며 국민이 자신을 정치판으로 불러냈다고 정당화했다. 그는 최근 지지율이 급락하자 같은 논리로 “국민이 대통령까지 하라면 하는 거고 여기서 멈추라면 멈추는 거다”라며 은근슬쩍 퇴로까지 열어두었다.

한국 정치판이 왜 이렇게 반지성적이고 무책임한 인기영합주의의 종속물이 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불행한 현대 정치사에서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언 70여 년째 운영돼 온 대한민국의 정치제도는 본래 자생종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남한 정부 수립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미국식 대통령제라는 정치체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이 외삽되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제도의 틀과 인식의 틀이 함께 이식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해방정국과 남북 분단 시기까지만 해도 우리 땅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좌충우돌하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던 민족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좌·우 정치이념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미군정 세력은 남한 입성 후 기존의 토착적 정치이념들을 대부분 탄압하고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외피로 포장된 반공주의를 강요했다. 사실상 미소 양국의 이념적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던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는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박정희식 군부 파시즘과 결합되어 이른바 ‘한국적’ 보수주의의 근간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체불명의 보수 이념을 표방하는 여당과 맞서야 할 야당도 이른바 ‘진보’ 이념을 재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좌파 이념을 공개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반미·반독재라는 거울 이미지, 즉 ‘반(反)여당주의’ 노선뿐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정통 좌파 이념에 비춰본다면 그들의 진보라는 것은 이념적 알맹이가 빠진 맹탕 진보, 즉 '한국적' 좌파 이념일 수밖에 없었다. 

선명한 정치이념의 토대 위에 세워지고 성장해온 유럽의 유서 깊은 정당들과 달리 이념의 토대가 허약했던 우리 정당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부족분을 충당할 뭔가가 필요했다. 정당들이 선택한 방법은 각기 진영논리를 개발하여 정치이념의 대체재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진영 싸움에서 자당에 승리를 안길 수 있는 인물, 즉 특정 정치세력의 우두머리를 당의 대표로 내세우고 그에게 당론이나 정책 방향을 총괄하도록 위임하는 보스주의 전통이 수립된 것이다. 이른바 ‘3김 시대’는 이런 관행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우리 정당들이 선거 때마다 승리를 안겨줄 행운의 인물 찾기에 혈안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현실에서는 수시로 인물들의 승률을 발표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사실상 선거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택을 좌우하는 중심 척도이자 미래를 가리키는 풍향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선거판은 정책보다 인물이고, 1등 아니면 적어도 2등은 해야만 의미가 있으며, 1, 2위 후보는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과 마타도어가 아니면 승리할 수 없다는 공식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이 공식은 말 그대로 반지성주의와 무책임의 극단적 형태이다. 이런 선거판은 너무 전근대적이고 너무 무기력하며 타성에 젖어 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아마도 이런 관성을 일거에 타파할 유일한 해법은 우리 정당들이 선명한 이념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뿐일 듯하다.

긴 안목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룩해야 할 이념 정당체제로의 전환과 별개로, 우리 앞에는 지금 당장 숙고해볼 개인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가 놓여있다. 정책과 공약을 보고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특정 인물의 승률에 베팅할 것인지, 대통령 자격을 잘 갖춘 가장 준비된 후보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손익계산에 따라 후보의 치명적 흠결을 못 본척할 것인지, 현재 나와 우리 가족의 이익인지 아니면 우리 대한민국 국가공동체 전체의 미래인지 사이의 선택은 오롯이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각자의 선택이 내일 우리 각자에게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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