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몸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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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몸의 인식
  • 정우진 경희대·동양철학
  • 승인 2021.09.1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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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몸의 연대기: 동아시아 몸의 역사와 철학』 (정우진 지음, 소나무, 344쪽, 2021.07)

 

종종 동아시아에는 심신이원론이 부재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역전된 오리엔탈리즘의 무반성적 되새김질일 뿐이다. 너무나 명백하게 심신이원론을 선언하는 혼백개념은 차치하자. 『장자』 등의 철학성이 농후한 문헌에서 매우 정밀하게 다듬어진 심신이원론적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 동아시아 인간관에 대한 심신일원론적 해석은 서구의 시선을 내화한 현대 동아시아인의 대표적 오독 중 하나로 선전되어야 마땅하다. 덧붙여 말하거니와 심신론이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심신론의 신은 주로 사회적 자아를 지칭하는 글자였다. 로저 에임스와 리처드 슈스터만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오해하지 말라. 서구의 유명한 학자라서 이들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지적한 국내 학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 인식’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동의보감』을 펼치면 제일 앞에 서문이 있다. 서문에 이어지는 집례에서 허준은 집필 의도와 중심사상 그리고 서명이 ‘동의보감’인 까닭을 서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집례는 현대의 일러두기와 유사한데 『동의보감』 집례는 두 번째 서문 같은 느낌이다. 이 글에서 허준은 『동의보감』의 ‘동의’가 중국의 의학을 북의와 남의로 나눈 것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속적 태도라고 비판할 수 있겠으나, 나는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의학을 선도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허준의 시선은 이 땅에 갇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의 부제, ‘동아시아 몸의 역사와 철학’에도 이처럼 한국의 몸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한국의 몸은 동서양의 비교사적 혹은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탐색되거나, 동아시아 몸의 전개라는 맥락에서 연구될 수 있다. 한국의 고유성에 천착하지 않고 동아시아 몸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탐색될 때, 한국의 몸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몸은 동아시아 몸을 견인했던 수행과 의학을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단지 선언에 그쳤던 유학이 의학의 철학이라는 구호를 실제로 구현했다. 모두 최초의 일이었다. 혹자에 따라서는 수행론의 의학적 차용은 단순한 답습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으나, 동아시아의 인간관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 혹은 한국의 수행이 종교의 경계에 갇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해석이다.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 『동의수세보원』의 신체관, 그리고 감악산 백련사 나한도의 지층을 보라. 맨 아래에는 가장 오래된 심장의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심장만 있었다. 심장은 신神이 거주하는 신전이었다. 오해는 금물! 신은 몸을 주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신령한 생명력이라고 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몸은 심장이라는 샘에서 흘러나온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과 그곳에 담겨 있는 생명을 총칭한다. 그릇으로서의 육체는 이성으로서의 마음이나 생명과 다르다. 그러나 육체에 담겨 있는 생명에너지인 기氣는 생리적이면서 심리적이다. 동아시아의 몸은 그릇으로서의 육체와 이성으로서의 심心, 그리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영역에 두루 미치는 기의 셋으로 이뤄져 있다. 

유학에서는 심을 중시했으나 도가에서는 기를 강조했다. 서양의 이성에 부합하는 심은 사려 판단 등의 기능을 함으로 유학자들에 의해 중시되었으나, 개체성의 극복을 주장하는 도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의식을 단단히 붙들어 매는 닻과 같은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공명을 추구했던 도가는 떨림을 매개하는 기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탐구하는 맥락에서 보자면 당연히 기를 담고 있는 육체도 중요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육체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동아시아 몸의 역사를 서술해온 수행론과 의학 어디에서도 육체는 중시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수행가와 의학자가 갖고 있는 세계관 즉, 끝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역동적 운행은 정지되어 있는 유형의 육체와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점을 자꾸 잊는다.  

수행론에 의해 심장과 감관 그리고 몸을 채우고 있는 기가 그려지던 몸의 성장기가 있었다. 한대에 이르러 『황제내경』이 저술되자, 의학이 몸의 주도권을 쥐었다. 의학자들은 수행을 일부 포섭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수행과 무관하게 몸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지만, 수행론도 의학의 성과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 단계는 이미 성립한 의학과 수행의 발전기라고 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 이르면 수행이 의학의 구도로 사용됨으로써 수행과 의학의 질적 결합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는 수행이 본연의 위상을 회복했음을 상징한다. 동아시아 몸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보자. 『동의보감』의 시기를 전개기에 이은 성숙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신형장부도와 백련사 나한도

신형장부도와 마찬가지로 감악산 백련사 나한도도 내단에 토대하고 있다. 백련사 나한도의 연원인 『성명규지』와 『혜명경』은 모두 내단 관련 문헌이다. 이들 문헌에서 연원한 감악산 백련사의 도태도는 내단의 단을 의인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한도에서 묘사하는 모습의 진정한 연원은 태식호흡이다. 물론 태식호흡을 대표하는 『황정외경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내단과 태식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난해한 일이다. 게다가 태를 부처로 형상화한 것에서 존사수행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도 있다. 결국 백련사의 나한도는 존사수행과 태식호흡법 그리고 내단의 다양한 수행법이 뒤섞인 몸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사상사적 층위에서 또 다른 융섭을 확인할 수 있다. 백련사의 나한도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소승과 대승을 종횡했던 이 땅의 자유로운 수행문화를 보여 준다.

『동의보감』에 큰 영향을 준 『의학입문』의 저자 이천은 유학이 의학의 토대라고 말했는데, 사실 허풍이다. 『의학입문』 어디에도 제대로 된 유학의 흔적이 없다. 유학이 의학의 토대라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신체관과 질병관에서 유학의 영향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한의학사에는 유의儒醫라고 불리는 유학의 이념에 충실했을 이들이 있었다. 유의를 대표하는 금金·원元 사대가四大家가 그 시기의 한의학사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학체계에서도 유학이 진정 의학의 기본 구도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동의수세보원』은 의학을 유학에 토대지우는 작업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뤄 냈다. 도덕적 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규정되는 『동의수세보원』의 몸에는 유가 수양론의 이념이 반영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몸 인식’을 탐구한 이 책의 여정은 전국시대 언저리에서 출발한다. 그로부터 거의 이천년 동안 의학과 수행은 서로를 비스듬히 바라보면서 ‘몸 인식’의 역사를 그려왔다. 그러나 한국의 몸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의학과 수행이 온전히 결합한 ‘몸 인식’은 부재했다. 의학과 수행이 합주해낸 동아시아 몸의 전개는 한국의 몸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결실을 보았다. 도교수행론이 의학의 토대로 제시되었고, 유가 수양론이 의학과 결합했으며, 도교수행론이 불교수행으로 수용되었다. 한국의 몸은 종교와 수행 그리고 의학의 경계 없는 융섭을 상징한다. 이 책의 종점에서, 우리는 한국적 신체관의 의미를 상기하고 미래의 논의를 전망한다.        


정우진 경희대·동양철학

고려대학교 철학과와 한국학대학원에서 공부했고, 경희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사천대학교와 대만 대중과기대에서 방문학자로 도교를 연구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한의철학, 도가도교 및 동양과학 분야를 연구해 왔으며, 주요 저·역서로 『양생』, 『몸의 신전: 황정경 역주』, 『감응의 철학』, 『몸의 노래(공역)』, 『노자상이주역주』, 『한의학의 봄』 등이 있다. 현재는 도가·도교와 불교의 수행철학적 성취 그리고 정신의학과 인지과학의 과학적 성과에 토대해서 마음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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