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적 사고와 숙고적 사유의 질적 차이와 양립 가능성
상태바
계산적 사고와 숙고적 사유의 질적 차이와 양립 가능성
  • 강학순 안양대학교 명예교수·철학
  • 승인 2021.09.19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책을 말하다_ 『하이데거의 숙고적 사유: 계산적 사고를 넘어서』 (강학순 지음, 아카넷, 604쪽, 2021.07)

 

현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기반이 되는 ‘계산적 사고’이다. 첨단 기술 산업사회의 체제와 제도권 하에서 계산적 사고는 유일하고 유용한 사유로 인정되면서,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유’의 가능성이 배제되고 있다. 그리하여 사유 일반은 이제 한갓 정보와 데이터로 대체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유의 학문인 철학마저도 계산적 사고에 영합하면서 변화를 시도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쓸모없는 학문으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당연히 과학기술을 추동하는‘계산적 사고’만이 현실 적합한 사고방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미래의 기술시대에는 사고의 특별한 한 가지 사고양식, 즉 계산적 사고만이 모든 사고를 특징짓는 유일한 사고로 간주되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획일화와 균질화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사유의 위기를 감지하고서 그것과는 차별화된 근원적인 ‘다른 사유’, 즉 ‘숙고적 사유’(besinnendes Denken)를 제시한다. 이런 참된 철학적 사유는 과학에 의해 전제되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사유되지 않고 있는‘참으로 존재하는 바의 것’, 즉 모든 존재하는 것에 드리워져 있는 존재 자체(동양의 道, 서양의 Logos)를 숙고한다.
 
본서에서는 근대 이후에 전개된 좁은 의미의 이성(ratio)에 바탕을 둔 계산적 사고가 주도하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지적 상황 속에서,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의 핵심인 ‘숙고적 사유’를 다루고자 한다. 그의 예견대로 현대인은 멈출 줄 모르고 쇄도하는 기술의 힘에 할 말을 잃은 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술문명에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진 셈이다. 그는 이런 ‘계산적 사고’의 지배와 획일화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우선 두 사유방식의 질적 차이를 명료하게 밝힌다. ‘계산적 사고’는 측정하거나 계량할 수 있는, 즉 양화 가능한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계산적 사고란 현상과 대상의 조건과 근거를 따지고 계산하는 사유방식이다. 반면 ‘숙고적 사유’는 계산적 사고와는 달리 양화(量化)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사유이다. 저러한 사유는 계산적 사고의 그물에 걸리지 않아서 빠져나가는 것, 이른바 계산적 사고가 미칠 수 없는 근원적인 사태를 밝히고자 한다. 숙고적 사유는 뜻(Sinn)을 음미하는 사유로서 존재자의 은닉된 의미를, 그 자신이 내보이는 바 그대로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저런 사유는 존재자를 ‘보이는 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밝히고자 한다. 여기서 ‘뜻’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부여하는 의미(Bedeutung)나 의미 부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에 이미 있어 왔고, 계속 주재하는 존재 자체에 속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비교한 바대로, “계산적 사고는 고요하게 머무르지도, 숙고에 이르지도 못한다. 계산적 사고는 결코 숙고적 사유가 아니다. 즉 계산적 사고는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전개되고 있는 그 의미를 사색하는 사유가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이 계산적 사고는 사태의 본질이나 근원을 사색하는 숙고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현대인들은 계산적·기술적 사고의 동굴에 갇혀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굴 밖의 존재의 빛 아래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는 성스러운 자연과 존재자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계산적 사고에 흡수되어 있다. 저런 계산적 사고에서 깨어나서 본래 존재의 빛 안에 드러나는 뭇 존재자들의 참모습과 아름다움을 보도록 일깨우는 것이 철학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본서에서는 계산적 사고와 숙고적 사유의 배타적 관계보다도, 두 사유방식이 공존할 수 있는 양립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계산적 사고’와 ‘숙고적 사유’를 대립시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 사이의 질적 차이와 각각의 고유영역을 밝히고자 한다. 후자를 앞세워 전자를 배타적인 대립항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각각 저 나름의 방식으로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고, 또한 그때마다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저자의 분석과 해석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두 사유의 비교는 양자를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공존과 균형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계산적 사고의 필요불가결한 이용에 대해서는 긍정하지만, 그것이 사유의 본질에 위협을 가할 때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파스칼(B. Pascal)의 말대로, 우리는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계산적 사고의 무제한적 확산과 숙고적 사유의 빈곤을 대비시킨다. 이로써 전자의 일방성과 불충분성을 드러내고, 그것의 극복방안으로 후자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밝히고자 한다. 계산적 사고의 증대로 인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세계는 갈수록 왜소해지고, 존재는 궁극적으로 지배될 수 있는 것으로 해소되며, 존재자가 갖는 독자적인 성격은 사라지고, 존재자의 존재상실은 완성된다. 따라서 계산적 사고는 필요하지만, 거기에 포박되거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결국 계산적 사고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본서를 통해 저자가 목표로 삼는 것은 하이데거가 제시한 그리스적 기원을 둔 숙고적 사유를 살펴보면서, 그러한 기원을 갖지 않은 비서구적 사유의 시원성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우리가 미래에 걸어가야 할 사유의 길에 대한 문제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이 주제를 이끌어가고자 한다. 동아시아 문화에 해박한 상호문화철학 분야의 권위자인 엘버펠트(R. Elberfeld)가 지적하듯이, “하이데거는 동아시아에서 영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사유노정에서 아시아 철학자들과의 대화가 동반된 첫 유럽의 대철학자이다.”

 

                                                  하이데거 (1889년 ~ 1976년)<br>
                                                  하이데거 (1889년 ~ 1976년)

본서에서는 하이데거의 숙고적 사유(후기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의 적실성(適實性)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초반부터 독일과 유럽의 현실에서 전개된 시대정신과 대결한다. 말하자면 유대적 상업주의, 아메리카니즘으로 대표되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계획된 사회진보를 지향하는 볼셰비즘(Bolshevism)의 공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선택의 압력에 직면한다. 그는 인력, 자본, 기술을 결합하여 세계에 대한 전체적 지배와 독점을 지향하는 총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적 세계관을 문제 삼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유는 체제비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을 보존하고 고향의 역사적 전통과 풍습을 계승하는 문화적 지역공동체로 지향하는 정체(政體)를 희망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하이데거의 숙고적 사유는 추상적이고 현실부적합한 사유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숙고적 사유는 오늘날 인공지능 비판의 배경이론(H. L. Dreyfus), ‘조용한(calm)기술’ 및 ‘눈에 띄지 않는(invisible) 기술’의 배경이론(M. Wiser), 그리고 ‘존재론적 설계’(T. Winograd)의 배경이론으로 수용되고 있다. 또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테크노 인문학 담론 및 정보기술의 존재론(R. Coyne)과 심층생태론(deep ecology)에서 상당 부분 전유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회사(Red Associates)의 경영철학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실제 간호사, 환경운동가, 세일즈맨 등의 마케팅 전략으로 하이데거의 인간관이 활용되며, 마을 만들기, 슬로우 시티, 생태친화적 삶의 방식을 펼치는 운동에서 하이데거의 사유가 직·간접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숙고적 사유를 통해 현실을 변혁시키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거리를 둔다. 1930년대 하이데거의 이상은 그가 살았던 현실과는 거리가 멀게도 ‘한 민족의 역사적 실존’이 ‘시인’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고, 사유가에 의해 앎으로 조직되는 것이며, 국가의 건립자에 의해 역사적 공간에 뿌리를 내리는 것으로 본다. 진정한 철학자는 자신의 시대를 규정하는 존재자의 본질과 진리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그 시대를 정초한다는 것이다. 숙고는 일상의 현실에서 미미하고 무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세울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는 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상인이 이 시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잘 보존하고 계승한 독일어(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과 사상가들이 그러한 사명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만물의 존재가 자연, 역사와 세계 속에 저렇게 찬연히 빛나고 있지만 형상이나 형체가 없는‘존재’(있음)를 화두로 하는 숙고적 사유의 한계는 바로 철학의 한계이다. 숙고적 사유가 한편으로 비서구적 사유에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서구 편향적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유럽 중심주의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1966년 『슈피겔』지와의 대담에서 하이데거는 “사유를 바꾸기 위해서는 유럽의 전통과 그것을 새롭게 우리 것으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유는 동일한 유래와 규정을 가지고 있는 사유를 통해서만 변화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하이데거의 사유에는 독일 문화국수주의적 측면도 있다. 그에 의하면, 서구 및 유럽의 시원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은 모든 민족들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인 민족인 독일인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독일어와 독일민족은 라틴어와 로마제국의 정신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독일어를 보존하고 있는 독일인이야말로 유럽문명을 정신적인 퇴폐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이데거가 20세기 초·중반에 경험한 ‘계산적 사고’에 기초한 과학기술과 오늘날의 그것과는 시대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science of humanity), 인류를 위한 과학(science for mankind), 인류복지를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benefit of mankind)이 논의된다. 또한 인문학과 소통하는 조용한 기술(calm technology), 눈에 띄지 않는 기술(invisible technology), 따뜻한 기술(warm  technology)등이 논의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현대 과학기술의 기반이 되는 계산적 사고 비판이 시대 제약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결국 하이데거는 ‘사유의 전향’(Kehre des Denkens) 없이는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그보다 앞서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존재의 전향’(Kehre des Seins)이 요구된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존재의 전향을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사유의 전향을 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철학은 먼저 세계와 독립된 인식주관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존재자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기술적 의지를 절제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세계-내-존재’로서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계산적 사고’로부터 ‘숙고적 사유’에로 도약(Sprung)해야 한다. 따라서 사유의 근본적 혁신 속에서만 오직 위기에 처한 현대문명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하이데거가 숙고적 사유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 핵심적 메시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저자: 강학순 안양대학교 명예교수·철학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연구원 특임연구원(현), 독일 마인츠(Mainz) 대학교 철학박사.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한국 하이데거학회 및 한국 기독교철학회 회장 역임. 열암학술상 수상. 저서로는 『존재와 공간』, 『근본주의의 유혹과 야만성 』,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를 논하다』, 『박이문. 둥지를 향한 철학과 예술의 여정』, 『하이데거의 숙고적 사유: 계산적 사고를 넘어서』가 있으며, 역서로는 E. Hufnagel의 『해석학의 이해』, K. Lorenz의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 R. Wisser의 『하이데거. 사유의 도상에서』(공역), J. Macquarrie의 『하이데거와 기독교』, R. Wisser의 『카를 야스퍼스』(공역)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