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민주주의에서 어떤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가
상태바
나는 어떤 민주주의에서 어떤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가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1.09.19 15: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베르타스]

 

지지 파파차리시(Zizi Papacharissi)가 쓴 책 『민주주의 그 이후(After Democracy)』의 번역을 막 끝냈다. 저자가 세계 각지를 방문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백 건의 인터뷰를 진행한 후 결과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독특한 책이다. 인터뷰라고는 하지만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대화를 유도했고 저자가 던진 질문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딱 세 개뿐이었다. 

내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고 답하게 될까? (학교에 있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배제했다고 하니 설사 인터뷰를 했다 해도 분석 자료에서 빠졌을지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해서는 통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체제, 모두가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이라는 상식적 답변을 했을 것 같다. 시민의 자격이나 책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대답이 궁하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국적을 부여받았고 별 불만 없이 시민적 권리를 누리고 살고 있다. 시민으로서 스스로 무엇을 못 하고 있다거나 무엇을 더 해야 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지막 질문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치인들의 싸움을 보면서도, 선출직과 임명직을 통틀어 걸핏하면 비윤리적 행태가 발각되는 공직자들을 보면서도 민주주의는 본래 비효율을 감내해야 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데 그쳤다.

저자의 인터뷰 대상자들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책에 나와 있으니 상세히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저자의 분석과 의견에서 흥미로운 몇 가지 지점만 짚어보겠다.

                  원서와 저자 지지 파파차리시(Zizi Papacharissi)
                원서와 저자 지지 파파차리시(Zizi Papacharissi)

우선 완벽한 민주주의라는 집단 환상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완벽한 민주주의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 모두들 예전에 어디선가 존재했던 이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규모도, 당면 문제도, 특징도 달라진 오늘날 사회에 억지로 낡아빠진 민주주의 옷을 꿰어 입히려 든다고 한다. 적극적인 개선과 조정 노력도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는 투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마음에 와닿았다. 투표의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다. 예/아니오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후보자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선거에서는 충분히 자격 있는 사람, 기꺼이 내 한 표를 주고 싶은 사람이 없는 일이 많고 결국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이런데도 우리는 투표를 해야만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투표를 거부하면 무관심하고 비참여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투표율이 형편없다 해도 투표하지 않은 사람의 의견이나 논리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총투표수 중 과반을 기준으로 결정이 내려지는 건 부당하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이 두 가지 지점은 어쩌면 연결되어 있다. 투표가 구성원의 유일한 의견 표출 수단이 되는 건 과거의 민주주의 관행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이니 말이다.

저자는 다양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을 굴리는 두 바퀴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강력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좌지우지하는 현재의 상황을 뒤바꿔 강력한 민주주의가 유연한 자본주의를 도구로서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은 멋진데 구체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이미 강력해진 자본주의의 힘을 어떻게 뺄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인간은 개인의 물질적 이익을 넘어서 멀리 넓게 바라볼 줄 아는 존재인 걸까?

오래 번역을 해왔지만, 정치 얘기를 다루는 책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내 모습을 돌이켜볼 수 있는 작업이어서 좋았다. 독자들에게도 아마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리스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가 지금은 대학교수가 된 저자의 영어가 해독하기 참 어려워 개강 후까지 혼쭐이 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이 책을 오래 기억하게 만들 듯하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