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살인범의 인상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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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살인범의 인상착의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9.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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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㉒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㉒_ 조선시대 살인범의 인상착의

 

범죄자 수배전단, 그리고 몽타주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거리에서 범죄인에 대한 공개수배 전단을 종종 보곤 했다. 거기에는 살인, 강도상해, 특수강간 등 죄목만 들어도 무서운 흉악범죄자의 사진은 물론이고 이름, 나이, 체격 조건, 말씨 등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에는 길거리에서 더 이상 이런 전단지를 잘 찾기 어렵지만, 지금도 경찰은 시민들의 결정적 제보를 기대하고 공개수배 전단을 작성, 배포하고 있다.

경찰청 훈령 952호 ‘지명수배 등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살인, 강도, 성폭력, 마약, 방화와 같은 강력범, 또 피해금액이 크고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경제사범, 부정부패 사범, 기타 신속한 검거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들의 경우 공개수배 위원회를 개최하여 매년 6월과 12월 중요지명피의자 종합 공개수배 전단을 작성하여 전국에 공개 수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공개수배 전단은 언론매체, 정보통신망 등에도 게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경찰청에서 운영하는 스마트 국민제보 ‘목격자를 찾습니다’ 사이트에 올라오는 전단이 그 한 예이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암살범에 대한 수배 전단. 

최근의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수배 전단에 이름이 오르면 검거율이 거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높다고 하는데, 지명 피의자를 선정하여 전단을 제작하고 배부하는 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리다보니 그 사이 피의자가 잡히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범인의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경우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을 활용하여 도주한 범죄자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이 몽타주 제작이다. 눈, 코, 입 등의 생김새, 머리 모양, 안면 윤곽 등 인상착의는 범죄 수사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먼저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기록한 조선시대의 문서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기록한 용파(容疤)

조선시대에 사람의 인상착의를 ‘용파(容疤)’라 불렀다. 용파의 용은 용모(容貌)를 말한다. 또한 파는 흉터를 의미하는데, 파기(疤記)라 하면 사람의 몸의 특징을 찾아내는 데 중요한 흉터를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용파 속에는 얼굴 생김새, 신장을 비롯하여 마마를 앓고 남은 곰보 자국, 온 몸에 난 흉터, 기타 여러 신체 조건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이야 태어나면서부터 키, 몸무게 등을 측정, 기록하는 신체검사가 매우 일상적인 일로서 학교 생활기록부에 꼭 들어가는 항목이다.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할 때나 병역 판정을 받기 위해서도 신체검사는 필수다. 이에 반해 전근대사회에서 신장 등 신체 조건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있었던 일이었고,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시대에 인상착의를 비롯한 신상 정보가 기록된 문서는 많지 않다. 이들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지금의 병적부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적(軍籍)이다. 현재 남아있는 속오군(束伍軍) 군적에는 각 군병들의 신분, 지역, 병과와 함께 신장, 곰보 자국 등 얼굴의 흉터, 수염 여부가 기재되어 있다.

 

◀ 1878년 훈련도감 포수를 지원하는 예천군에 거주하는 포보(砲保) 명단을 적은 군안 『예천군래 기묘식 포보 개도안(醴泉郡來己卯式砲保改都案)』. 규장각 소장. 오른쪽의 첫 번째 보인(保人)인 강응문(姜應文)에 대한 기재 내용을 보면 하단에 주소(住), 신장(長), 얼굴의 마마자국(面鐵), 수염과 흉터(髥疤) 항목이 보인다. 다만 조선시대 사람들의 신장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는 서울대 조영준 교수에 따르면 조선후기 군적의 경우 실제 신체검사를 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적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군적 외에도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에 조세를 선적하여 서울로 보내면서 담당 관리, 선주, 사공 등의 용모와 신장을 기록해 둔 자료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아무래도 조세곡을 운반하는 중대한 일을 맡은 자들이므로 이들의 인상착의를 분명히 기록해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리라. 

한편 용모를 기록한 또 하나의 사례는 중죄인을 유배 보낼 때 그의 인상착의를 기재한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한제국기에는 종신형을 받은 죄인을 유배지로 보낼 때 용모와 파기를 기록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예컨대 1905년 법부(法部)에서 전라도 완도군에 유배되어 있던 죄인 이세직(李世稙)의 유배지를 추자도로 옮기는 지시가 담긴 훈령(訓令)에서 그의 용모, 파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세직은 1894년에 홍종우와 함께 김옥균 암살에 참여하고 이후 법부 형사국장 등을 거친 인물이었다. 흥미롭게도 훈령 속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세직은 신장이 4척 2촌이며, 얼굴에는 곰보 자국(鐵)이 있으며, 치아는 온전하며, 흉터로는 좌우의 뺨에 검은 사마귀(黑痣)가 엄청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지금의 범죄자 수배전단에 기록한 것처럼 도망간 범죄인을 수배하기 위해 그 인상착의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제부터는 검안에 기록된 당시 범죄인의 인상착의를 알아보자.

 

검안에 기재된 수배 범인의 용모

알려진 것처럼 조선시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고을 수령이 시신을 검시하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신문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한 사건 조사 보고서가 검안(檢案)이다. 대한제국기의 검안 중에는 살인범이 도망간 경우 그의 수배를 위해 용모, 파기가 기재되어 있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1901년 충청도 괴산군 남중면 허문리에서 발생한 김호선 치사사건의 검안. 왼쪽은 초검과 복검을 함께 모은 보고서의 표지이며, 오른쪽은 도망간 범인 윤치언의 인상착의를 기록한 용파(容疤) 부분이다. 『괴산군 남중면 허문리 치사남인 김호선 시신문안(槐山郡南中面許文里致死男人金好善屍身文案)』. 규장각 소장.

예컨대 1901년 충청도 괴산군 남중면 허문리에서 발생한 김호선(金好善) 치사사건의 검안에도 가해자인 윤치언(尹致言)의 용모, 파기가 기재되어 있다. 본래 경주 사람이었던 윤치언은 동생 윤황룡(尹黃龍)과 괴산에 와서 피해자 김호선의 집에서 기숙하며 날품팔이로 생활하였는데, 주인 김호선이 제수(弟嫂)를 겁탈하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화가 치밀어 때를 노려 칼로 살해한 사건이었다. 초검관인 괴산군수 안기용은 윤치언이 도주하자 빠른 검거를 위해 그의 인상착의를 용파(容疤)라 하여 검안 말미에 기재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죄인 윤치언, 나이는 38세. 신장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코는 조금 높고 상처가 한 군데 있다. 인중은 짧고 얼굴색은 조금 검다. 수염이 조금 자랐고, 양쪽 뺨은 매우 뾰족한 모양이다.”

당시 피해자 가족은 도망간 윤치언이 동생 윤황룡과 공모하였으므로 동생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망간 윤치언의 행적은?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아 분명하지 않지만 바로 체포되지는 않은 듯하다. 지방에서 사건 보고가 올라오자 법부에서는 괴산군을 관할하고 있는 충청북도 재판소 판사에게 훈령을 내려 그를 속히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후 그가 붙잡혔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위의 괴산군 사건 4년 전인 1897년 강원도 낭천군에서도 동면 동촌리에 사는 임원일(任元一)이란 인물이 이웃과 다투다가 폭행치사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같은 마을에 사는 동서(同壻) 사이인 윤석화(尹石化)인데, 피해자 임원일이 염상(鹽商) 거간꾼인 자신을 거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소금을 구입한 것에 앙심을 품고 취중에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이었다. 가해자 윤석화가 도망을 가자 검시관인 금성군수 한병회(韓秉會)가 그의 부인 한여인을 신문하여 윤석화의 용모, 파기를 검안에 기록하였다. 

용파에 따르면 윤석화의 나이는 48세, 신장 5척 3촌, 얼굴에 곰보자국, 수염은 약간 있는데 그중 절반은 흰 수염이었으며, 오른쪽 뺨 위에 움푹 파인 흉터가 한 곳 있으며, 치아 한 개가 빠졌다는 정보를 적었다. 키, 마마 앓은 자국, 수염, 흉터, 치아에 이르기까지 얼굴의 모습을 매우 자세히 실어놓았다.

복원한 조선시대 수배전단 두 장. 십여 년 전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필자가 촬영한 것으로, 하나는 여성이고 하나는 남성이다. 용모, 파기 등 신체 특징을 묘사하고, 죄인 모습까지 그려 넣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투가 당시 고문서 양식과 맞지 않는 등 조선시대의 실제 공개수배 방문(榜文)이 이런 형태의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처럼 도망간 범인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묘사해 놓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수배 전단을 만들어 동리에 적극적으로 게시하지는 않았다. 인상착의를 적는 데서 더 나아가 이를 몽타주로 그려 신체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쉽게 알아보게 방(榜)을 붙였다는 기록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요컨대 당시 살인 등 형사범의 인상착의에 대한 정보를 주로 관아의 관속들끼리 공유한 반면 민간의 제보를 기대하는 적극적인 행정 시스템으로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비록 검안에 실린 용모, 파기는 살인과 같은 흉악범의 모습이기는 하나 사진이 보편화되지 못한 시절 조선왕조를 살아간 사람들의 인상을 우리가 떠올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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