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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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9.1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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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3강〉_ 이창우 가톨릭대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1. 서양사상 제 3강 이창우 교수(가톨릭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 교수는 ‘서양 지성사 최초의 윤리학 책’이라는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해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제시한다. 이때 첫 번째 물음은 “‘성격에 관한 것들’을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학(ethica)’”이 “우리가 흔히 아는 윤리학과 어떻게 다를까”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물음은 ‘성격에 관한 것들’이 “이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압축하는가” 하는 것이 되는데 그에 대한 답을 위해서 인간의 ‘좋음’과 ‘행복’ 그리고 ‘덕’과 ‘실천적 지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그리고 그렇게 느껴왔다는 혹은 그렇게 경험해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할 뿐 “철학적 윤리학의 논증들과 개념들”이 “‘결론을 확실히 낼 수 있는’ 정당화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윤리학은 ‘인간적 좋음’에 관한 명확한 지시(指示, pointing)적 기술(技術)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을” 도울 따름이라며 “근대 이후 형성된 규범 윤리학”과 변별점을 시사한다.

 

지난 7월 31일, 이창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서론: 텍스트 제목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여는 첫 문장은 인간 삶에 관한 근본적 사실 하나를 지적한다: “인간의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good)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들이 추구(혹은 욕구)하는 것이 좋음이라고 옳게 규정해왔다.”(i1, 1094a1-3) 그 사실은, 인간의 모든 의식적 행동이 어떤 좋음을 목표로 삼고 이를 욕구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것들’, 즉 인간 아닌 동물들도 어떤 것을 목표로 삼아 이것을 욕구하고 추구하는 행동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소개 명칭 안의 ‘윤리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미리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있고 그와 연동해서 던지고 싶은 한두 가지 예비적 질문이 있다. 첫째, 책 제목 ‘윤리학(ethica)’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아마도 후대의 편집자(그의 아들 혹은 안드로니코스)가 붙인 것이다. 편집자가 중성 복수 명사 ‘ethica’(그리스어: ethika)라는 명칭을 책 제목으로 만든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텍스트 안에서 여성 단수 형용사 ‘ethikê’(ethical)라는 단어가 몇 번 출현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중요한 사실은 형용사 ‘ethikê’는 ‘성격(性格, character)적’ 혹은 ‘성격에 관한’을 뜻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혹은 우리가 학교에서 흔히 배웠던 (서양)윤리학은 ‘사람의 성격에 관한 학문’은 아니다. ‘사람의 성격에 관한 학문’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한테는 낯선 말이다. 이런 점에서, 편집자가 ‘ethika’라는 말을 책 제목으로 잡았을 때에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윤리학’이 아니라 아마도 ‘성격에 관한 것들’의 의미가 떠올랐을 것이다.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성격에 관한 것들’을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학’—이것 역시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은 우리가 흔히 아는 윤리학과 어떻게 다를까? 

둘째, 어느 편집자라도 자신이 책 제목을 뽑았을 때 그의 생각에는 그 제목이 그 책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압축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성격에 관한 것들’은 이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압축하는가? 혹은 ‘성격에 관한 윤리학’이라는 표현어는 가장 적절한 제목이 맞는가? 

 

2. 인간의 좋음과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식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던 질문은 일단 “좋음은 무엇인가?”이다. “좋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인간의 삶에서 좋음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의 좋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번역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지작거리는 단어는 대부분 일상 언어이지만, 그는 일상인들이 부여해왔던 의미를 만지작거려서 그 단어의 의미를 고급화하거나 명료화한다. 그러므로 원래 질문 “좋음은 무엇인가?”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인도된다. 

그런데 ‘최고의 좋음’이라는 말도 고급화 혹은 명료화를 요구한다. ‘최고’라는 말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명료화 방식은 이 말을 가장 단순하게 양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만지작거리는 최고선과 다른 선들의 차이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종류의 문제에 놓여 있다. 

최고선과 그렇지 않은 선들 사이의 비교 논점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설명적인 것이다. 우리 삶에서 이 최고의 좋음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사람들은 그 최고선을 ‘행복’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이라고.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키워드임에 틀림없기에, 최초의 파피루스 편집자가 책 제목을 ‘행복에 관하여’로 잡았더라면 그것은 이후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책 제목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학은 ‘행복의 윤리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고대 그리스인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행복’ 사이에는 의미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 혹은 ‘그렇게 되어야 행복’ 혹은 ‘이상(理想, ideal)으로서의 행복’이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행복의 윤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방하다. 하지만 이 행복 윤리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관한 혹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만 행복해지는가에 관한 탐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은 어떤 특별한 욕구적 가치임에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특별한 가치의 특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첫 번째 특질은 좋음의 ‘완전함(completeness)’이다. 어떤 가치 가 ‘완전한 좋음’이라는 말은 이렇게 정의된다. 즉 첫째, 는 그 자체를 위해서 욕구된다. 둘째, 가 아닌 다른 어떤 좋음, 예컨대 를 위해서 욕구되는 경우는 없다. 셋째, 아닌 모든 다른 좋음들은 를 위해 욕구된다(i7, 1097a25-34). 두 번째 특질은 자족성(sufficiency)이다. 가 자족적 가치라면 그리고 우리가 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의 어떤 필요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그 필요에 대한 욕구도 가질 이유가 없다(i7, 1097b6-16). 

‘최고선’과 ‘행복’이 동일한 것을 지시한다는 점 그리고 최고선 개념의 형식적 특질이 완전함과 자족성이라는 점을 이해한다고 해서, 행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ergon, 일, 활동) 분석을 통해 행복을 개념 내용적으로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이 정의 도출을 위한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물 일반에 있어서, 즉 그것이 인공 종이든 혹은 자연 종이든, 사물의 ‘좋음’ 혹은 ‘잘됨’은 사물이 수행해야 할 혹은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는 고유한 기능(일)에 비추어 정의된다. 자동차가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하게끔 해주는 특질을 우리는 자동차의 탁월함이라고 부르고, 이런 탁월함을 갖춘 자동차를 우리는 ‘좋은’ 자동차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경주마가 경주마로서의 일을 잘 발휘하게끔 해주는 특질을 우리는 경주마의 탁월함이라고 부르고, 이런 탁월함을 갖춘 경주마를 우리는 ‘좋은’ 경주마라고 부른다. 또 마찬가지로, 피리 연주자가 피리 연주가로서의 일을 잘 발휘하게끔 해주는 특질을 우리는 피리 연주가의 탁월함이라고 부르고, 이런 탁월함을 갖춘 사람을 우리는 ‘좋은’ 피리 연주가라고 부른다. 이 발견적 논리는 인간 종 자체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피리 연주가 혹은 의사 혹은 아버지 혹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는 일을 잘 발휘하게끔 해주는 특질을 우리는 인간의 탁월함(덕)이라고 부를 것이고, 이런 탁월함을 갖춘 인간을 우리는 ‘좋은’ 인간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는 고유한 일은 무엇일까? 생장은 식물도 행하므로 인간의 기능이 아니다. 장소 이동, 감각, 욕구는 동물도 행하므로 인간의 기능이 아니다. 남는 것은 이성적 활동이다. 즉 “이성을 동반하는 영혼의 활동과 행위”(i7, 1098a14)가 인간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좋음은 (인간의)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만약 덕이 여럿이라면 최상의 그리고 가장 완전한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1098a17-8)

 

3. 덕 

“인간의 좋음은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 결론은 행복과 덕 사이의 어떤 방정식을 세운다. 왼쪽 피정의항에는 ‘행복’이, 오른쪽 정의항에는 ‘덕’이 자리 잡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덕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덕이라고도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가 뜻하는 바는, 행복의 정의항의 핵심이 덕이라는 것이다. 혹은, 행복을 구성하는 결정적 인자가 덕이라는 것이다.

좋은 것들도 여럿이지만 덕도 여럿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분류는 인간 영혼의 내적 구분을 따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영혼의 식물적 부분을 사상한 채 인간 영혼의 나머지 두 부분에 특별히 주목한다. 하나는 엄밀한 의미의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듣고 따를 수 있는” 부분(욕구적 부분)이다. 인간의 덕 또한 이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지적 덕이고, 다른 하나는 성격적 덕이다. 

우리말 ‘덕’에 상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어 ‘aretê’의 외연은 세 종류의 범위를 가진다. 가장 넓은 외연은 사물 일체에 적용되는 외연이다. 그 다음으로 넓은 외연은 인간의 지적 덕과 성격적 덕을 합친 외연이다. 가장 좁은 외연은 성격적 덕에 국한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별다른 문맥적 신호를 주지 않으면서 ‘aretê’를 사용한다면, 보통 그것은 세 번째 용례, 즉 성격적 덕을 지칭한다.

성격적 덕은 영혼의 욕구적 부분의 내재화된 반응(행동으로 표출되든 감정으로 표출되든) 양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개념 안에는 어느 선까지는 행동주의(behaviorism)적 이론 요소가 들어가 있다. 한 사람의 덕은 외부 자극에 대한 그 사람의 거의 즉각적인 반응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유덕자로(혹은 악덕한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근거가 그 사람의 반응적 행동 양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덕은 즐거움(쾌락)과 고통이라는 기저 감정으로 표출된다. 즐거움과 고통은 두 가지 종류다. 우선, 타인의 그리고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윤리적 승인 혹은 불승인의 표시로서 내가 느끼는 즐거움과 고통이 있다(ii3, 1104b3-13). 덕이 관계하는 두 번째 즐거움과 고통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그런 점에서 자연적인 것이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과 고통은 인간적 본성에 공통적이며, 교육 및 성장과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겪게 되는 바의 것이다. 욕망, 갈망, 분노, 두려움, 기쁨 등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ii5, 1105b21-3). 

내가 첫 번째 종류의 즐거움(고통)을 느꼈다면, 이 사실 자체는 내가 유덕한(악덕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된다. 이에 반해, 내가 두 번째 종류의 즐거움(혹은 고통)을 느꼈다면, 이 사실 자체는 내가 유덕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내가 두 번째 종류의 즐거움(혹은 고통)을 느낄 때 이 느낌을 내가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지가 내가 유덕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된다. 

첫 번째 종류의 즐거움(고통) 감정, 즉 그 자체로 윤리적으로 상관있는 즐거움(고통)은 두 번째 종류의 즐거움(고통)의 발생 과정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시킨다. 그 사람이 유덕한 사람이라면, 그가 느끼는 윤리적 즐거움 혹은 고통은 그가 느끼는 자연적 즐거움들 혹은 고통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들이 가야 할 방향대로 막힘없이 흘러가도록(단, 어떤 한계 내에서) 도와준다. 

그러므로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나의 도덕성은 내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에 의해 증거되고, 심지어 강화된다.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내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라는 말이 정확하다. 

 

4. 실천적 지혜 

내가 유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덕을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예컨대, 내가 용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용감함을 갖추는 것으로 충분한가? 내가 유덕한 혹은 용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추가로 이성(즉 실천적 지혜)을 필요로 하지 않은가? 인간은 덕에 덧붙여 추가로 이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행복은 “이성을 동반하는 영혼의 활동과 행위”(i7, 1098a14)로 규정되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잘못된 혹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내가 덕을 갖추었다면 나의 이 덕에는 이미 이성이 그 안에 혹은 그 옆에 구현되어 있다. 주어(主語)를 바꿔서 표현하자면, 내가 실천적 지혜를 갖추었다면 이미 나는 덕을 갖추고 있다. 덕은, 그게 덕이라면, 이성을 추가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덕은 이성으로부터 개념적으로는 분리되지만 덕으로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이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성은 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덕에 내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둘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덕은 이성에 따른(kata, according to) 품성 상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동반한(meta, with) 품성 상태다.”(vi13, 1144b26-7) “실천적 지혜 없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성격적 덕 없이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1144b30-31) “덕이 없다면 ‘영혼의 눈’(즉 실천적 지혜)에 이런 품성 상태가 생기지 않는다.”(vi12, 1144a31)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1144a36) 그러므로 실천 이성과 결합되지 않은 덕은 사실 덕이 아니다. 

 

5.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학과 규범 윤리학 

이제 서론에서 던졌던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행복은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 논증적 결론은 충분히 설득적인가? ‘행복은, 타인을 희생하더라도, 오직 나의 쾌락이다’를 주장하는 그리고 신념화되어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에 충분한가? ‘행복은 오직 돈이다’를 굳건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철학적 윤리학이 도덕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도덕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리라고 믿었을까? 만일 그가 이런 믿음이 없다면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만큼 야심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과도한 야심은 과도한 윤리학을 산출하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형이상학이나 신학이나 자연철학은 어떤 점에서 과도한 혹은 과격한 목표를 가질 수 있어도 인간의 삶을 다루는 윤리학의 목표는 과도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윤리학 강의의 청취자 그룹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설정한다. 그의 강의를 듣는 이들은 전통적인 교육 방식의 길을 따라 이미 “잘 양육받은” 성장한 성인들이다(i3, 1095a2-11). 이들은 이들의 교육받음의 결과로 인해, 덕을 계발하고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 여길 뿐 아니라 이 일에 전념할 태도가 구비돼 있다. 이들은 경제적 부와 쾌락을 그 자체적 가치로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 영리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부감, 즉 고통과 불편함을 느끼도록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덕을 좋음의 핵심 요소로 놓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자 하는 입론, 즉 도덕 회의주의자들의 입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왜 덕에 전념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전념이 최고선의 개념과 행복 개념으로 연결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윤리학은 도덕 회의주자들의 전향을 위한 설득적 증명이 아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윤리학은 행복과 덕 사이의 방정식을 궁극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논증도 아니다. 이 윤리학 안에는 수많은 논증들이 있지만, 이 윤리학은 이 논증들을 재차 그 밑에서 떠받쳐주는 정초적(foundational) 철학적 논제를 탐색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이야 할 궁극적 철학적 정당화는 이 윤리학 안에 없다. 최초의 출발점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어떤 것이 그러그러하다’는 인간 삶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것이 왜(why) 그래야 되는지 정당화가 안 되거나 우리의 정당화 시도를 항상 빠져나간다. 

이런 까닭에 고귀하고 정의로운 것에 관해,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치학[=윤리학]의 문제들에 관해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좋은 습관을 통해 훌륭하게 자랐어야 한다. 제일원리(archē, the first principle)는 사실(to hoti, that something is so)이며, 이것이 충분히 분명하다면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을 통해 훌륭하게 자란 사람은 제일원리들을 이미 가지고 있거나 쉽게 취할 것이다. (i4, 1095b5-8)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그리고 그렇게 느껴왔다는 혹은 그렇게 경험해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철학적 윤리학의 논증들과 개념들은 ‘결론을 확실히 낼 수 있는’ 정당화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모든 정당화는 부분적이거나 임시적이거나 심지어 파편적이다. 윤리학은 이론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윤리학자는 자신의 말의 힘의 한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또 어떻게 행할지를 도와주는 말이다. 윤리학의 말들은, 우리의 삶의 느낌들과 경험들이 무엇인지 명료화해주고 그것들을 우리의 인격의 튼실한 부분이 되게끔 도와준다. 

이 도움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윤리학의 목적은 앎이 아니라 행위이니까. 또 수강생이 나이에 있어 젊은이이건 품성에 있어 풋내기이건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 그 모자람은 세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살며 이런 식으로 각각의 목적들을 추구하는 데서(diôkein hekasta)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앎은 …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반면 이성에 따라 자신들의 욕구를 이끌고 행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많은 이득(polyôpheles)을 가져다 줄 것이다. (i3, 1095a4-11) 

윤리학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한 ‘아주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행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윤리학은 ‘인간적 좋음’에 관한 명확한 지시(指示, pointing)적 기술(技術)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을 돕는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근대 이후 형성된 규범 윤리학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정초적 철학적 논제를 찾고, 이 정초 위에서 모든 원리들을 한 통로로 정당화하고, 이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또 이 원리들을 삶의 특수성에 제약되지 않는 보편적인 행위 규칙으로 성문화(codify)하려는 근현대적 규범 윤리학은, 이 기획의 성공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회의적일 것이다. 플라톤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만큼, 그만큼 회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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