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 연간 천주교의 중국적 특징을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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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연간 천주교의 중국적 특징을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추적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9.13 0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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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륭제와 천주교 | 이준갑 지음 | 혜안 | 392쪽

 

이 책은 청대의 절정기였던 건륭 연간(1736~1795) 천주교의 중국적 특징을 종교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추적한 연구서이다. 그간 전통시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천주교 연구에서는 선교 현장에서 돈은 매우 필요하고 요긴하게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한 접근은 소홀히 한 채 서양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이나 궁정에서의 활동, 관료나 신사층과의 교유 등을 다루었다. 저자는 청대 서양인 선교사들도 중국에서 포교할 때 끊임없이 필요로 한 선교 자금의 출처와 쓰임새를 본격적으로 분석했다.

그 분석의 출발점은 청조의 절정기였던 18세기의 세계 백은 유통망과 중국 국내 백은 유통망의 연결 양상을 해명하는 것이다. 당시 세계 기축 통화로 자리매김한 백은은 세계 경제는 물론 중국 경제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기왕의 연구에서는 유럽의 백은이 어떤 경로로 중국 국내 백은 유통망과 연결되는지 추적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백은은 대부분 무역을 통해 중국에 유입했으나 그 백은이 어떻게 중국의 국내 유통망으로 흘러 들어갔는지 무역 자료들을 통해서는 알아낼 수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백은이 천주교의 선교 자금으로 유럽에서 마카오로 유입하고 다시 중국의 국내 백은 유통망으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우회적인 연구 방법을 선택했다. 역설적으로 건륭 연간(1736~1795)의 지속적인 천주교 탄압 덕분에 남겨진 선교사나 천주교도의 진술에는 백은 유통 양상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술을 통해 세계 백은 유통망의 한 거점인 마카오로 유럽의 천주교 선교 자금 즉 백은이 유입한 사실과 산서 상인, 섬서 상인 등 장거리 교역 상인 겸 천주교도들이 마카오 천주교당에서 백은을 수령하여 내지에 숨어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 전달한 사실, 선교사들이 중국 국내 시장에서 백은을 화폐로 사용하면서 포교했던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백은 유통망 추적에서 출발한 연구는 불가피하게 건륭제와 건륭 연간의 천주교에 대한 분석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백은은 선교사의 선교 자금으로 유입되었으므로 천주교 측의 포교 활동은 물론 이를 단속하는 최고 권력자 건륭제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련한 지휘자로서 건륭제의 모습은 이 책 서술 분량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륭대교안(1784~1786)’의 처리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황제는 지방의 총독이나 순무들에게 미심쩍은 부분을 캐묻고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다시 조사하라고 명령하면서 교안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 이따금 총독과 순무들의 보신주의적 행태로 판단이 흐려졌지만, 저자는 건륭제의 이런 모습에 매혹되어 본질이 천주교 탄압사건이었던 ‘건륭대교안’의 전반부는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폈지만, 후반부는 지휘자인 건륭제의 전기를 쓴다는 입장에서 접근했다.

건륭제는 기왕의 연구에서 한결같이 천주교를 철저하게 탄압한 군주로 지목된다. 그러나 저자가 살펴본 건륭제의 모습은 달랐다. 건륭제는 자신의 측근에서 봉사하던 카스틸리오네를 비롯한 선교사에 대해서는 포교 활동을 하거나 팔기 기인 소유의 토지를 매입하는 등의 불법 행위가 발각되더라도 감싸고 처벌하지 않았다. 건륭제는 이런 처분을 ‘파격적 은혜’라고 자칭했다. 건륭제의 탄압 대상이 된 천주교 관련자들은 지방에서 숨어서 몰래 포교하던 서양인 선교사들이거나 내지인 천주교도들이었다. ‘파격적 은혜’와 탄압이라는 양면성은 청대 다른 황제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건륭제만의 독특한 측면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가경제와 그의 시대는 주인공인 아버지 건륭제와 그의 시대를 빛내주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조선이나 일본에서 천주교는 오로지 탄압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반면 청나라는 금교 정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제한적으로 천주교를 허용했다. 청조는 천주교당이나 천주교 자체가 법령에 위배되지는 않으나 선교사들이 내지인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거나 내지인이 천주교를 신봉하는 행위는 법령에 저촉된다는 이중적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교황청을 비롯한 천주교측은 교리 우선이라는 선교 노선을 지키기 위해 중국 전통의 철저한 부정으로 나아갔다. 뒤프레스 사천 대목구장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유교 이념과 유일신 신앙에 기초한 천주교리는 평행선을 달릴 뿐 결코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중국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유교 경전에 대한 교육을 비난하고 배척하면서 경전 교육은 미신이나 방종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19세기 초 가경 연간은 청조 측의 천주교 강경 탄압 일변도의 법령과 천주교 측의 중국 전통 배제 위주의 교령이 충돌하면서 건륭 시대와 같은 ‘제3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없어졌다. 가경제의 치세는 절정기를 지난 청조가 쇠락의 길로 접어든 시대였다. 시선을 좁혀서 천주교 정책만을 살펴보더라도 강경 탄압 일변도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가경제 치세에서는 건륭제 시대의 역동적인 양면성이 사라져버린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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