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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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욥기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9.12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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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2강〉_ 김회권 숭실대 교수의 「〈성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욥기」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1. 서양사상 제 2강 김회권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성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욥기

 

김회권 교수는 성서 66권 가운데 마태복음, 요한복음, 욥기를 결론적으로 말하여 “죄 없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라는 서로를 “느슨하게 묶어주는 주제”를 통해 소개한다. 그를 위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이 속한 ‘복음서’ 장르, 그리고 욥기가 속한 ‘성문서(聖文書)’ 장르가 무엇인지 살펴본 다음, 우선 공관복음서 안에서 발견되는 마태복음의 특별 위상과 마태복음의 특별 메시지 산상수훈 8복에 대해서 깊이 다룬다. 이어서 “독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이끄는 다면적이고 다중 음성적인 책”인 요한복음의 특수성과 구조를 들여다보고, 욥기의 구조와 그것이 제기한 질문들을 꼼꼼히 따져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조리한 고난”, 즉 “죄 없는 자도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우발성이 창조 질서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욥기의 논리를 확인한다.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죄 있는 자들의 양심을 찔러 대속적인 정화 효과를 창조하는 창조적 고난”임을 말한다. 

 

지난 7월 24일, 김회권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들어가는 말 

성서 66권 중 마태복음, 요한복음, 욥기를 관통하는 단일 주제나 관심사를 선뜻 발견하기는 힘들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복음서”(유앙겔리온[εὐαγγελίον]) 장르에 속한다. 기원전 70년 전후에 저작된 마태복음(처음에는 아람어로 저작되었다가 후에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가능성)과 기원후 90년 전후에 저작된 요한복음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구약성서 욥기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서 27권은 어떤 책을 보더라도 기독교회의 자기 복무적 이익을 도모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특정 종교를 세우고자 시도하지도 않는다. 신약성서 각 책은 나사렛 예수를 믿고 모방하라는 급진적인 권면과 명령, 호소와 설득을 담고 있다. 특정한 방향의 삶을 ‘살아내라’는 긴박한 호소가 신약성경의 핵심 관심사다. 신약성서에는 제도화된 종교 권력자들의 권익(權益)을 지지하는 구절이 단 하나도 없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존숭하는 사람들에게 급진적이고 종말론적인 자기 부인과 사랑을 요구한다. 신약성서 각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시(正視)하고 급진적으로 예수를 체현하는 삶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왜곡할 어떤 사사로운 이유도 갖지 않았던 저자들의 증언을 담고 있다. 

신약성서 외의 문헌들, 즉 당대 역사가들의 저작에서는 이렇게 무시당한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까? 예수가 단순히 사상이나 계율을 남기는 것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깊은 곳부터 움직이는 거룩한 영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대답에 비해 이차적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답변이 있다. 나사렛 예수가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된 이유는 제자들이 그에게 바친 사랑과 헌신 때문이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실재라고 증거했던 증인들의 투신이었다. 그들은 말과 글, 삶과 공동체의 문화를 통해 나사렛 예수의 사람됨과 신격(神格)을 탁본해내었다. 나사렛 예수의 신격을 말과 글, 삶과 공동체 문화로 탁본하고 체현한 제자들의 선두에 사도 바울이 있다. 48-60년경에 저작된 사도 바울 서신들은,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의 효력을 이방 선교 현장에서 체험하고 증언한 최초의 문서들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보편적 효력만을 부각시킨 바울 서신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상에 발을 딛고 생성한 행적 대부분을 누락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 서신들은 십자가 죽음 이전의 예수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 궁금증이 복음서 장르가 등장하는 데 기여했다. 바울 서신들이 저작된 후 20-30년 후인 70-90년경에 복음서가 등장한다.  .....

 

2.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와 마태복음 

신약성서 27권은 장르상 복음서, 역사서(사도행전), 서신서(바울서신, 공동서신, 요한서신) 그리고 묵시록(요한계시록)으로 나눠진다. 바울 서신에서 항상 선포의 대상이던 예수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자신의 육성을 되찾아 “선포자”로 등장한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the synoptic Gospels)”는 “나사렛 예수를 똑같은 관점으로 바라보는 복음서”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이 공관복음서이다. 두 가지 면에서 이 세 권은 공관복음서로 분류되며 나머지 요한복음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첫째, 이 세 복음서들은 나사렛 예수를 철두철미하게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그의 3년간 공생애와 십자가 처형, 3일 후의 부활, 그리고 부활 후 40일 만의 승천(昇天)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 혈투를 벌이고 유혹에 시험당하는 예수의 인간다움을 주목한다. 이 복음서들은 인간 예수의 길에 초점을 맞추되, 인간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는지 그 과정을 “귀납적으로” 조사하여 제시한다. 특히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귀납적인 방식으로 수집하고 분석한다. 둘째, 예수의 사역을 유대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가 갈릴리로 철수한 후 다시 유대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는 요한복음과 달리,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가 예루살렘에서 종결되었다고 본다. 

공관복음서 중 최초로 쓰여진 복음서인 마가복음서는 인간 예수의 길을 주목하며 그의 인간적 발자취를 따라간다. 나머지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메시지는 마가복음 메시지의 후기 확장판이다. 마가복음의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마태복음의 서사는 선(先) 갈릴리 사역 후(後) 예루살렘 사역으로 구분된다.  .....

 

2) 공관복음서 안에서 발견되는 마태복음의 특별 위상 

마태복음은 공관복음서의 하나이지만 그 자체의 특징들과 뚜렷한 신학적 메시지가 있다. 첫째,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된다. 역대상 1-9장은 바벨론 귀환 포로들의 지파별 족보를 나열한다. 물론 이 족보의 궁극적 목적은 나사렛 예수가 구약성경이 그토록 자주 예언한 인물, 즉 온 세상 만민을 하나님에게 이끌어갈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 이스라엘의 고토(故土)로 되돌이킬 다윗 왕의 이상적 후손 왕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둘째, 마태복음은 나사렛 예수를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순종을 상쇄시키는 순종의 화신이자 이스라엘을 먼저 회복한 후 열방을 다스릴 유대인의 왕으로 그린다. 예수는 가장 철저하게 유대인의 왕이면서도 동시에 동방박사의 경배 순례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궁극적으로 모든 열방들의 경배를 받게 될 만왕의 왕이다. 

셋째, 마태복음은 철저하게 유대인의 왕 예수를 부각시키면서도(마 10:11-16) 동시에 이방인들의 구주가 되고 온 세상 만민의 주와 왕이 됨을 강조한다. 동방박사 경배 순례부터 시작해 승천 직전 지상 선교 명령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눈은 이방인들에게 맞춰져 있다. 결국 마태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한데 어울려 만드는 새 이스라엘 교회 시대를 내다보고 있다. 

넷째, 마태복음은 구약 존중적이고 율법 완수적인 메시야 예수를 부각시키고(5:17), 율법 순종을 통한 신행(信行) 일치를 강조한다. 마태복음은 가장 빈번하게 구약을 인증하거나 인용해 예수의 언행을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야고보서와 궤를 같이 한다. 둘 다 허구적 신앙을 비판하고 행동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참 믿음이라고 칭송한다(약 2:21-22; 마 7:24-27).

다섯째, 마태복음은 예수의 제자 사역과 무리 사역을 구분하되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겉으로 볼 때는 마태복음은 제자도 복음이라고 할 만큼 고결한 제자도 실천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산상수훈(5-7장)은 예수의 제자 집중 육성 매뉴얼처럼 읽힌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 사역은 어디까지나 궁극적으로 무리를 견인하고 섬기기 위한 전략적 사역이지 단순한 엘리트 육성 사역이 아니었다. 산에서 훈련받은 제자들은 산 아래서 고통당하던 무리를 섬기기 위해 하산해야 한다. 

여섯째,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하늘나라)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을 드러낸다. 13장은 하나님 나라의 유기적 성장, 반전 드라마적 세상 출현, 하나님 나라 사역을 막는 대적들과 그로 인한 시련, 하나님 나라의 기만적 경쟁 세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대가, 하나님 나라의 심판 사역, 하나님 나라의 세계 완성적인 면모를 다채롭게 부각시킨다. 

일곱째, 교회 치리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복음서다(18장). 교회는 자신의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해 죄와 불법을 교회로부터 척결하되 인격적이고도 절차적으로 공정하게 척결하여야 한다. 교회의 치리는 허물을 범한 지체들을 출교시키는 데까지 가야 하지만 동시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줘야 할 용서의 무한 도량을 보유해야 한다. 치리와 징계를 받아 출교된 지체들도 또한 참회와 회개의 조건이 충족되면 490번이라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

 

3. 요한복음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사건의 구원사적 효력을 파헤친 바울 서신과 달리,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을 서사적인 드라마로 그려내고 있다. 마가, 마태, 누가 복음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방점을 찍고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를 잘 그리고 있다.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의 고양된 독생자 의식에 주목하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해석한다. 공관복음은 갈릴리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하되 연대기적 순서에 주목하며 예수의 공생애 동선을 추적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중심의 동선을 추적하며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의 고양된 의식에서 이뤄진 아들의 결단과 아버지와 아들의 깊은 교감을 조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의 생애에 대한 전기적 정보를 취득한다고 해도 요한복음의 예수 언동은 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렵다. ‘아버지 품속’이라는 독특한 시좌(視座)에 접근하지 못하면 요한복음은 난해한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들린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 과정 하나하나에 비상한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으면 요한복음의 논리를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전통적인 ‘사도 요한’ 저작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 요한’ 저작설로 나뉘어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을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이며 처음부터 마지막 행적까지 나사렛 예수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1장 마지막 단락). 전통적인 사도 요한 저작설은 예수의 공생애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한 이 증인이 다섯 차례나 예수의 친애 제자라고 불리는 사도 요한이라고 본다. 물론 요한복음 저자에 대한 전기적 정보를 얻지 못해도 요한복음 자체의 신언성과 영감성은 손상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신언성이 다른 신약성서의 진리에 의해 보합적으로 공증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의 종교를 세워 세상에 출범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청중과 독자에게 ‘이미 시작된 영생’에 즉각 참여하라고 초청할 뿐이다. 

 

1) 요한복음의 특수성 

요한복음은 독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이끄는 다면적이고 다중 음성적인 책이다. 요한복음의 언어는 구약성경과 그리스-로마의 세계관 모두에 영향을 받고 있는 청중과 독자에게는 단 하나도 피상적으로 지나갈 수 없는 깊은 울림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부단히 구약 참조 적이며 구약 성취적인 언동을 보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로마적 영생과 구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변증적 논리와 주장을 반복적으로 내세운다. 공관복음서의 주요 초점이 인간 나사렛 예수가 어떤 이유로 신앙 고백의 대상인 주(主, kyrios)와 그리스도가 되는가를 밝히는 데 있었다면, 요한복음의 초점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는가를 밝히려는 데 있다. 요한복음은 헬라 세계의 철학과 종교에 대한 강력한 반명제(反命題, antithesis)를 형성한다. 물질계-육신의 세계를 유한과 죄의 세계라고 멸시하던 헬라 철학에 반대하여, 물질계-육신의 세계에 대한 한없는 긍정을 보여준다. 물질 세계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들어찰 영역이라고 보는 구약성경의 신앙을 그대로 계승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던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던 당시의 이단 사설인 가현설(假現說)에 대항하고 있는 셈이다(요일 4:2). 요한복음은 헬라 세계의 철학과 종교 사상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옹호하고 해설하는 변증적인 복음서였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형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구약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 세계의 철학과 종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 이 두 가지 틀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특히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을 여러 군데서 참조하며 암시 28 하고, 구약성서의 특정 구절을 대체하거나 혹은 그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해석한다. 어떤 신약 문서도 구약과 관련 없이 저작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은 더욱 전문적인 의미에서 철두철미하게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를 물리적 공간에서 실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요한복음의 언어, 비유, 이미지, 암시는 구약성경 구절, 사건 어딘가를 은유하거나 지시하거나 실체화한다. 신구약의 이 은근하고 깊은 교호(交互)적 대화 구조를 요한복음처럼 오묘하게 드러내는 신약성서 책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읽기와 해석은 신구약 간의 깊은 해석학적 관계를 탐구하지 않고는 진행될 수 없다. 요한복음에는 요한복음에서 마침내 처음으로 말해지거나 소개되는 신학 사상이나 하나님에 대한 앎은 없다. 요한복음은 구약의 숱한 이미지와 유추, 은유와 상징이 사용되었기에 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효과적으로 해독하기 힘든 암호 같은 책이다. 요한복음이 매우 은밀하고 오묘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의 본문, 이미지, 신학 사상, 그리고 인물들을 참조하거나 암시하고, 그것들과 해석학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

 

4. 욥기 

욥기는 문학 장르상 희곡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이스라엘이 이 세계에 출현하기 오래전에 고대 동방의 우스(Uz)라는 성읍에 살던 의인(義人)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내는 불평과 질문들을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의인 욥은 하루 아침에 10명의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은 문둥병과 유사한 병에 걸린다. 졸지에 욥은 가족, 재산, 사회적인 신망과 존경, 건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잃어버린다. 욥기는 이처럼 까닭 없는 고난을 연속적으로 겪은 욥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는 이야기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들을 원인론적으로 접근하던 욥은,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그의 참혹한 고난을 보고 그것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세 친구와 격렬한 논쟁에 빠진다. 욥의 고난을 욥의 숨은 죄, 욥 자녀들의 죄, 그리고 인간 일반이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는 세 친구들은, 욥을 강제로 회개시키려고 하는 종교적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욥을 하나님에게 회개시키려다가 욥과 세 차례의 신학적 논쟁을 벌이게 된 세 친구들은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교조적인 완고함에 머물고 있다. 뒤늦게 양방의 논쟁에 끼어든 젊은 변사 엘리후의 책망 섞인 강론도 사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세 친구들의 입장과 별다를 것이 없다. 고난의 원인을 찾지 못한 욥은 탄식과 자기 연민, 항변과 자기 변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 사이에 하나님이 욥을 찾아온다. 폭풍과 흑암 속에서 현현하신 하나님은 욥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질문들을 퍼붓는다. 창조의 신비에 속한 엄청난 질문공세를 받고서야 욥은 자신이 지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질문을 하나님에게 제기한 사실을 알고 회개한다. 욥 자신의 고난이 창조의 신비에 속한 고난임을 알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신비로운 “고난”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승복한다. 문학적으로 보면 다소 싱겁게 끝나버리지만 욥기는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두 가지 사실을 긍정한다. 

첫째, 이 세상에는 죄와 상관없이 애매하고 억울하고 부조리한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 부조리하고 억울한 고난이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창조의 신비에 속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하나님은 자신의 무죄함(적어도 자신이 겪은 고난들과 관련해서는)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던 욥과, 하나님의 절대 정의와 공평을 의심하는 욥을 정죄하여 회개를 유도하는 세 친구들의 논쟁에서 욥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욥을 위로해준신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과 고통을 하나님의 신적인 인과응보 혹은 징벌론적인 관점으로만 파악하려는 교조주의적 독단을 더욱 비판한 것이다. 

욥기는 잠언서, 신명기 28-29장, 그리고 일부 예언서 신학의 중심 골격인 원칙 곧, 하나님은 죄에는 벌, 선행(하나님에게 복종)에는 상급(축복)을 준다는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교리에 대한 회의를 제기한다. 욥의 고통이 욥의 죄 혹은 욥의 자녀들의 죄와 분명히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은 결국에 가서 하나님에 의하여 비판받는 입장임이 드러난다. 32-37장에 맹활약하는 양비론(兩非論)의 사도인 엘리후의 입장은 38-3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강론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키는 한편 욥의 친구들의 교조주의적 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신비주의적 모호성을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욥기의 주제는 하나님은 왜 의인에게 고통을 줄까 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고난의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다소 실용적인 것이다. 

욥기를 읽을 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대사들 자체를 교조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욥기 1-2장에 나오는 사탄과 내기를 벌이는 하나님의 대사들은 그 자체만 분리시켜 교조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하다가 욥이 얼마나 강한 믿음의 소유자인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욥과 그의 재산과 가족을 사탄의 공격에 넘겨주는 장면을 교조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욥기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모습은 38-41장에서 그려지듯이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시는 신비한 하나님이다. 고난의 원인을 사람에게 알려주기보다는 고난 중인 욥과 함께하는 하나님 자신이 욥의 고난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욥기는 어떤 시대의 개인이나 집단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루고 있으나, 아마도 성서 안에서 욥기는 바벨론 포로 살이와 같은 엄청난 환난이 과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인지 아니면 인간이 해명할 수 없는 심오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신 29:29)가 개입된 일인지에 대한 신학적 고투와 성찰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벨론 포로 1세대는 분명 바벨론 유수를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였으나 바벨론 포로 살이가 그들의 자녀 세대에게는 억울하고 애매한 고통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혹한 바벨론 포로 살이가 길어지면서 바벨론 포로 2-3세대들에게 그들의 바벨론 포로 살이가 대속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일어났을 수 있다(사 53장 참조).  .....

 

5. 결론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욥기를 느슨하게 묶어주는 주제는 “죄 없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다. 새뮤얼 밸런타인(Samuel E. Balentine)에 따르면 욥기의 핵심은 ‘인간 이성에 포착되지 않는 신적 현존’(elusive presence)이다. 죄지은 자가 벌을 받고 의롭고 경건한 자가 상을 받는 경우, 우리는 신적 현존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정반대의 사태가 전개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신적 현존은 자취를 감춘다. 욥기는 죄 없는 자도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우발성이 창조 질서의 일부임을 인정한다. 죄 없는 자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비의적인 섭리의 신비에 속했다. 욥의 고난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 경험 법칙으로 잘 납득되지 않고 해명되지 않는 복합성과 모순성, 비의성, 신비성을 가지고 있다. 욥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인간이 간단하게 해명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충분히 자신을 계시하지만 그 계시를 통해서 감추기도 한다. 아무리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입장을 복잡한 창조 질서에 관한 질문 세례로 에둘러 말했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은 욥처럼 유순해지지는 않다. 그런데 욥기는 하나님이 지은 세계에는 죄와 벌의 일대일 대응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부조리하고 도착된 질서가 엄연히 그 일부로 작동한다고 인정한다. 의인 욥에게 닥친 미증유의 환난이 그것을 증언한다. 이 욥기의 논리 때문에 죄 없는 의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조리한 고난이 해명된다. 욥기 19장에서 욥은 자신의 대속자(고엘, 피붙이 복수자)가 언젠가 땅에 설 것을 기대한다. 나사렛 예수는 죄 없는 자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자요, 욥이 당한 고난과 곤경을 신원해주고 보상해줄 고엘(대속자)로 땅에 나타났다. 욥의 탄식 두 마디에 대한 해답이 바로 죄 없는 채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상의 비명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상의 극한 고통에서 마지막으로 토해낸 말이 욥의 증인의 말이요, 욥의 대속자가 해준 말이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베드로가 이 나사렛 예수의 고난이 대속의 위력이 있다고 증언함으로써 복음서는 욥기보다 진전된 의인의 고난을 말하는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 있는 자들의 양심을 찔러 대속적인 정화 효과를 창조하는 창조적 고난이라는 점에서 욥의 고난보다 더 위대한 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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