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에 맞서는 과학적 종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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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무신론에 맞서는 과학적 종교의 탄생
  •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 승인 2020.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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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칼럼]

■ 『신을 위한 변론: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카렌 암스트롱·오강남 지음, 정준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10)

 

과학은 늘 발전하지만 ‘신’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하다. 신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그렇다는 뜻이다. 원래 형언 불가능한 신(God)은 과학적 가설과 우주의 기계론적 설명에 부합한 신(god)으로 축소되었다. 카렌 암스트롱은『신을 위한 변론』에서 신에 대한 모름과 침묵이 오히려 기쁨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녀는 유일신교의 우상숭배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슨을 비판한다. 정확히는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비판이다. 리처드 도킨슨이 주장하는 무신론이란 결국 그 무신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유신론이다. 하지만 그 유신론이 주장하는 신이란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리처드 도킨슨은 인간의 협력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은 신적인 영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전적 돌연변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 자연과학에 푹 빠졌었다. 그는 옥중에서 플라톤이 마련한 대화에서 이같이 고백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자들이 현상을 물질로만 설명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철저한 대화법으로 진리를 알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야말로 과학적 사고의 정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신에 대해 불가지론(不可知論) 입장을 철저히 고수했다.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암스트롱은 “근본주의란 그 종교의 ‘근본’ 혹은 정통과 한참 거리가 먼 왜곡된 신앙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신무신론자들은 근본주의가 모든 종교의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환원주의적 사고와 관용의 결여라는 점에서 근본주의 종교와 꼭 닮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녀는 “과학과 기술은 놀라울 만큼 발전했지만 우리의 종교적 사고는 놀라울 만큼 발전이 없고 심지어 원시적일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암스트롱이 강조하는 신은 초월적 신이어서 인간이 논할 수 없는 영역이다. 논할 수 없음이 절대 불편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불가지론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알고자 하면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암스트롱은 신을 알기 위해 자신 안의 심성을 깨우는 실천적 수련을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표면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에 주목하면 본질을 놓칠 때가 많다. 소크라테스 역시 이 우주의 의미와 본질을 깨닫기 위해선 과학 너머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 다른 것이란 비물질적인 정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더 나은 내가 되는 마음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깨달음 얻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실천해야 한다. 동서양의 종교를 막론하고 그 모든 철학과 사상이 이런 외침을 하고 있다. 과학은 이런 철학과 사상에서 파생됐다. 

신에 대한 불가지론, 실천적 수련과 깨달음이 중요해

고대 그리스에서 촉발된 과학적 사고는 사실 현실 분석을 통해 초월성을 알고자 함이었다.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32km 떨어진 엘레우시스. 이곳에선 신비주의 종교주의자들이 의례를 치르고 있었다. 신비함을 뜻하는 ‘뮈스테리온(mysterion)’은 철학적 합리주의에 영향을 끼쳐 결국 과학을 발전시켰다. 뮈스테리온은 ‘입문’을 뜻하는데, 신비종교의 의식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성 체험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이 종교적 과정을 묘사하고 의미를 요약한 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의식이 바로 신비종교에 있었다. 수학자 피타고라스 역시 수학, 천문학, 기하학, 음악으로 영성 수련을 지속했다.

“종교는 본래 사람들이 생각한 무엇(신화)이 아니라 행한 무엇(의례)이었다.” 『신을 위한 변론』 22쪽.

우리가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게 오히려 즐거울 때가 있다. 암스트롱은 “오늘날에도 시인,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기쁨과 놀라움과 만족의 원천임을 안다.”면서 “과학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지식은 이러한 실재에 관해 따지고 설명하고 이성의 지배하에 두려 하지만 알지 못함의 기쁨 역시 인간 경험의 일부로 존재해왔다.”고 적었다. 그녀는 실천적 공감, 즉 함께 느끼고 경험하는 게 진정한 영성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은 원초적으로 그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필연적으로 지닌다. 그 죄를 씻기 위해 종교적 의례에 집착하는 것이다. ‘의례=신’이라는 공식이 성립했지만, 그 의례가 더 이상 인간의 삶에 뿌리 깊은 확신을 주지 않으면 그 신 역시 쉽게 유배당하고 폐기되었다. 피레네 지방 아리에주에 있는 트루아프레르 지하 미로나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지하 동굴은 그런 흔적들이다. 죄의식을 씻기 위해 치러졌던 의례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쓸모없는 신, 불필요한 신, 가버린 실재는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이다. 

기독교의 성서는 일관적이지 않고 문자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즉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다. 특히 성서에는 불일치하는 메시지가 존재한다.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지 않는다는 게 성서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야훼와 함께 식사를 한 건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성서는 (원래) 서로 모순되는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제나 선택적으로 읽힌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일신교도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관점만 침소봉대하거나 선택적으로만 읽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러한 유일신교도들을 비판하는 게 리처드 도킨슨을 비롯한 현대의 신무신론자들이라고 암스트롱은 지적하는 것이다.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 과학적 종교를 알리는 근대의 시작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종교적 박해와 종교에 대한 독자적 의례, 이에 대한 반사적 신앙심 등 지각변동이 발생했다. 막강한 절대 통치를 자랑하던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추진했다. 그 가운데 많은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거나 침묵했다. 16세기에 이르러 ▶ 르네상스 ▶ 종교개혁 ▶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종교는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 했으나 교회의 역할이 축소되었을 뿐 사람들은 더욱 종교적이 되어 갔다. 변화의 혼란 속에서 신은 더욱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가면서 인간은 무력했고, 더욱 완전한 신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 개혁가들이 인쇄술에 의존하면서 좀 더 몰개성화된 종교의 흐름이 늘어났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진리를 객관성과 논리성에 기대는 “근대적” 관념이 탄생했다고 암스트롱은 지적한다. 행성의 타원운동을 증명한 케플러는 삼위일체로 우주를 설명하려 했고, 과학이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간주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방황했다. 암스트롱은 “많은 신도들이 이 두려운 시대를 맞아 기꺼이 자유라는 짐을 버리고 확실성이라는 위안을 택했다”고 밝혔다. 이후 데카르트는 혼란한 시대를 잠재워질 ‘코기토’라는 제1원리를 내세우며 근대의 서막을 열었다. 데카르트의 과학적 합리성(기계론적 우주 설명)과 신의 존재 증명은 뉴턴에게로 이어졌다. 뉴턴이 발견한 인력은 바로 신의 활동이었다.

암스트롱의 날카로운 지적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진다. 이 질문들이야말로 이 책 『신을 위한 변론』의 진가다. 종교적 계시는 절대 불변인 것인가? 종교에 대한 재해석은 필요한 것인가? 신의 존재성은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인가? 신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건 기쁨인가 고통인가? 신은 우리 밖 우주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가? 성서는 문자 그대로 진리인가? 과학과 신학은 언제나 서로 배격해야 하나? 우리 시대의 지적이고 영성적인 한계를 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믿음은 과연 지적인 차원의 것인가 아니면 헌신과 참여의 차원인 것인가? 종교는 이해하고 깨닫는 것인가 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둘 다인가? 유한한 인간이 고통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가?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과학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교수신문> 학술 객원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학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과학과 기술, 철학, 문화 등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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