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진실은 내용을 배제한 ‘논리적 관계’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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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진실은 내용을 배제한 ‘논리적 관계’로 구성된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9.06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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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학 3: 식사예절의 기원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저 | 임봉길 역 | 한길사 | 812쪽

 

신화의 진실은 신화의 특별한 내용에 있지 않다. 신화의 진실은 내용을 배제한 ‘논리적 관계’로 구성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논리적 관계의 ‘불변적 특성’들은 신화의 조작설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은 비교할 수 있는 논리적 관계들이 수많은 신화의 다른 내용에서 얻은 요소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한 주제는 내용상으로 분명히 서로 다른 신화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감각의 범주들, 즉 미각·후각·청각·촉각·시각 등의 도움으로 구성된 ‘코드’들로 축소된다.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신화적 사고’의 두 가지 근본적인 ‘특성’을 접하게 되는데, 이 특성들은 서로 ‘보충적’이며 동시에 ‘대립적’이다.

신화 속에는 이를 창조한 사람들의 삶·죽음·믿음 그리고 이들의 우주관·사회조직·경제·관습·종교·교육·도덕 등과 이들이 지닌 ‘상상력’의 산물들과 ‘상징적’ 창조물들이 엮여 있다. 이 수없이 많은 ‘재료’를 ‘엮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화를 창조했고 이 창조 법칙이 신화의 ‘구성 논리’다. 이들은 미개한 사람들이 아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우리보다 단순하지만 사고의 측면에서는 우리와 차이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순수하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도덕률’을 갖고 있다.

오마하 인디언들은 먹을 때 소리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린다면 아이들을 질책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추장의 명령에 따라 스튜를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조용히 씹어 먹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조용히 먹어야 되는 종교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으나 아무도 그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일상적으로 조용히 먹는 잉갈리크족의 동기는 더욱 실제적이었다. 음식물이 먹기 고약했거나 상대를 부끄럽게 하기를 원했을 때 이들은 입술을 쩝쩝거려 소리를 내어 듣도록 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식사예절은 일종의 문화적 코드를 형성한다. 프랑스 사회도 비슷한 관습은 여전히 존재한다. 19세기에 프랑스인들은 푸짐한 식사 끝에 온순한 트림으로 잘 먹었음을 알리는 이베리아반도의 식사예절을 인정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입을 다물고 씹으며 다른 방식으로 먹는 것을 추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들은 이와 반대로 반쯤 입을 벌리고 씹는데, 독일인들이 씹는 과정을 구역질난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아주 부드럽게 씹는데, 프랑스사람들은 이탈리아인들이 씹는 과정이 세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각 국가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고유하고 차별된 ‘문화적 코드’를 갖고 있다. 오늘날에는 ‘씹는 방식’이 더는 국가적·지역적 코드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이것들은 좋거나 나쁠 뿐이다.

 

우리는 흔히 무질서와 그에 내재된 폭력을 잘 제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위생 분야에서도 역시 내재적 원천으로부터 오는 허약함과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해 아직 약한 균형을 보호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외부에 장갑을 끼고 식사용 포크를 사용하며, 음료의 냉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빨대를 통해 음료를 마신다. 날것과 상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통조림을 소비한다. 그러나 모자, 장갑, 포크, 빨대와 통조림은 우리를 보호하는 일종의 울타리다.

레비스트로스는 반구의 변경으로 인해 생길 ‘변형’을 기대했으나, 그곳의 신화들은 처음 조사했던 신화들과 유사했다. 거울처럼 같은 모습을 반사하거나 서로 위치만 반대였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먼저 조사한 신화들이 활용하는 ‘대립’, 즉 우주적·공간적인 ‘높고 낮음’ ‘하늘과 땅’ ‘태양과 인류’ 등을 ‘수직 축’ 위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사회적·시간적인 ‘이곳과 저곳’ ‘가까움과 멂’ ‘내혼과 외혼’ 등이 정의하는 ‘다른 체계’와 관련된 신화들을 ‘수평 축’에 위치시켰다. 이때 첫 번째 ‘축’의 펼쳐진 ‘공간’이 ‘절대적’이라면 두 번째 ‘축’의 펼쳐진 ‘시간’은 ‘상대적’이다.

이러한 고찰은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을 집필하면서) ‘극단의 항(들)’ 또는 ‘중재항(들)’을 가지고 첫 번째 대립들을 구성했다. 이 책에 나오는 대립들은 ‘항’으로서가 아니라 이 ‘항들’ 사이에서 ‘감지할 수 있는 관계(relations)’로서 중요하다. 이 ‘항’들은 너무 ‘근접’해 있고, 너무 ‘멀리’ 또는 적당한 ‘거리’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결합’ ‘분리’ ‘중재’는 대략적인 가치를 가지는 ‘경험적’인 양상으로 묘사되는데, 이것들은 틀림없이 ‘관계’로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다른 등급(서열)보다 더욱 올라간 등급의 ‘조합’(결합관계)의 항들이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끈기 있게 같은 신화들을 분석하는 동시에 새로운 신화들을 추가하는데, 이는 ‘기존에 분석한 신화’의 ‘변형’임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이를 ‘같은 신화 집단’ ‘변이형 집단’이라 부를 수 있다. ‘구조 분석’은 자신의 발자취를 다시 밟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상 ‘신화적 재료’의 더욱 깊은 ‘층’에 도달하려 하며, ‘구조 분석’이 ‘재료’의 ‘심장부’에 파고 들어가 조금씩 재료의 모든 ‘특성’들을 깊이 통찰하려 한다.

이제 ‘의미론적 측면’만 남았다. 여기서도 역시 ‘변형’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신화학 3: 식사예절의 기원』에서는 취사의 주변(둘레)에 관심을 갖게 된다. ‘취사의 둘레’는 ‘자연적 측면’ 즉 ‘소화’와 문화적 측면이 있으며, ‘문화적 측면’은 ‘요리법’은 물론 ‘식사예절’까지 확대된다. 실제로 ‘요리법’을 ‘자연적인 재료의 문화적 소화’(?laboration)로 규정하는 점에서 ‘요리법’은 두 개의 서열과 관계된다. 이에 반해 ‘소화’(digestion)는 ‘문화적 소화’와 ‘대칭’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문화적 소화는 문화에 의해 이미 처리된 ‘재료’의 ‘자연적 소화’(?laboration naturelle)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식사예절’이 어떤 면에서는 ‘이차적’인 ‘문화적 소화’와 관련된다. 이렇게 정의한 레비스트로스는 검토된 신화들이 ‘소화’ ‘요리법’ ‘식사예절’의 3중 이론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떤 ‘의미’로 말할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는 이에 대한 결론을 다음 권(제4권)에서 북아메리카 북부와 서부 인디언들의 조사를 진행하면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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