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사상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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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사상사 연구
  •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동양철학
  • 승인 2021.09.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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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단기 20세기: 중국 혁명과 정치의 논리』 (왕후이 지음, 송인재 옮김, 글항아리, 1024쪽, 2021.07)

 

탈정치화된 정치의 시대의 정치성 복원

『단기 20세기』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주목받는 중국 지식인으로 알려진 왕후이(汪暉)의 최신 저서다. 왕후이의 세계적 유명세와 함께 따라붙는 것은 ‘중국은 전 세계에서 자본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발언이다. 97년 현대중국의 사상 상황을 정리하는 글에서 제기된 이 발언은 중국 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내에서는 시장친화,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은 문화대혁명의 폭력을 상기시키고 왕후이를 마오쩌둥식 ‘구좌파’를 잇는 ‘신좌파’라 규정하고 계몽주의의 적으로 묘사하며 정치적 공세를 펼쳤다. 해외에서는 중국 문제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려는 이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계몽주의에 비판적인 왕후이의 견해에 주목했다. 이들 역시 왕후이를 ‘신좌파’ 지식인이라 명명했다. 

동일한 인물을 동일한 용어로 규정했지만 그 맥락은 달랐다. 중국 내부에서는 개혁개방의 정반대인 문화대혁명,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 중국 외부에서는 이른바 좌파 성향 지식인들이 일종의 우호적 정서 속에서 왕후이를 현존 체제의 문제에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소개하고 교류했다. 그래서 한창 유명세를 떨칠 때는 중국 내에서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렸지만 해외에서는 한정된 접촉범위 안에서 호의적으로 취급되었다.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에 대한 상반된 인식 뒤에는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적 기억이 공통분모로 작동한다. 상반된 견해를 조성하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의 차이였다.

『단기 20세기』는 왕후이 본인에 대한 태도 또는 공세를 낳은 현대 정치를 논제로 삼아 근원부터 성찰한다. 오늘날 정치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의 상당수는 정당, 진영, 파벌 등이다. 즉 ‘신좌파’ 왕후이에 대한 동료 지식인들의 공세와 인식의 분기도 이러한 파벌 행위로서의 정치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왕후이는 이러한 파벌투쟁 중심의 정치가 정치의 본연의 속성과 사명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한다. 오랜 경험을 거쳐 정당이 정치 행위의 주요 행위자가 되었는데, 이 정당이 집권이나 집권을 위한 행위에 골몰하면서 사회의 현실적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왜곡된 정치 형태를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현실의 정치가 정치활동의 토대인 주체의 자유와 능동성을 부정하고, 정치를 구성하는 대결 관계를 비정치적인 허구적 관계 속에 놓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정치를 왕후이는 ‘탈정치화된 정치’라고 부른다. 탈정치화된 정치는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에서의 심각한 파벌투쟁, 개인숭배, 개혁개방 이후 형성된 정치에 대한 무관심, 주체의 쇠락, 60년대에 대한 부정 등이 지적되며 서구에서는 사회 형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정치 등이 지적된다. 이렇게 왕후이는 오늘날의 정치가 정당이 주도하는 ‘탈정치화’되고 대표성도 심각하게 손상된 정치라고 진단한다. 이를 해결할 시발점으로는 주체의 복원을 제시하고 그 지향점을 재정치화와 포스트정당정치라고 규정한다. 물론 책에서는 자신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를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파벌행위로서의 정치행위가 반영된 저자에 대한 평가와 논란에도 탈정화된 정치가 반영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왕후이의 저작관련 좌담회

역동하는 20세기 중국을 재사유하여 현실의 돌파구를 모색하기

탈정치화된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왕후이가 채택한 방식은 ‘역사 다시쓰기’다. ‘단기 20세기’는 왕후이가 중국의 역사를 읽는 대상과 관점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 제목은 서양사나 서양 이론에 익숙한 이들에게 20세기를 단기로 말한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나 반대로 장기 20세기를 분석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100년 단위의 시대구분법에서 벗어나 20세기를 선택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왕후이는 시간적 범위가 짧아지고 공간도 축소되었다. 시기는 1911년부터 1976년이고 공간은 중국이다. 이를 통해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진 시기부터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시기까지를 중국의 20세기로 설명한다. 

왕후이는 장문의 서론과 1장을 통해 20세기를 특화해서 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 과정에서 세기 개념도 실은 오랜 내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발명품임을 밝힌다. 이를 통해 20세기는 여러 세기들 중 한 세기가 아니라 그 자체가 다른 시대와 구분되는 독특한 시대임이 입증된다. 이러한 시대의 특징은 부제인 ‘중국혁명의 정치와 논리’가 잘 보여준다. 책에 따르면, 중국의 20세기는 자신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 분투한 시기로 능동적이고 활발한 정치적 유산을 남긴 시기다. 그 유산은 신해혁명과 그 이후의 사상전, 사회주의 시기 중국의 정치, 경제 노선과 사상적 유산에서 찾아진다. 더 나아가 청말 혁명 시기 장타이옌의 평등사상, 89년 천안문 사회운동, 대만문제, 최근 중국 노동자의 주체적 상황 등 ‘단기 20세기’ 전후 시기의 상황도 점검한다. 80년대 이후의 상황은 탈정치화가 가속화되는 시기, 짧은 20세기가 종결된 결과로 서술된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중국의 20세기는 짧게 끝났다. 또한 20세기 중국의 정치적 유산은 영광이나 성공만으로 장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파벌투쟁과 집권행위에 의해 왜곡되는 정치행태와 정치, 문화, 사회 전 영역을 잠식하는 경제체제가 탈정치화의 주된 동인이자 재정치화 대립물로 등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20세기는 분투의 시기다. 이 시기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만들려는 중국의 여정은 갖가지 장애를 만난다. 그것은 이전 시대의 폐단이나 외부의 압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체의 경험에서 생성된 폐습, 이미 중국 내부로 스며든 사회경제 체제, 혼돈의 상황에서 동력을 상실한 주체의 상황 등도 분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왕후이는 20세기 중국의 혁명과 정치의 경험을 위대한 승리나 숭고한 이념을 재조명하기 보다는 객관적, 주관적 상황에 치열하게 대면하며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려는 고단한 과정을 보여주려 하며 이는 글쓰기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에 왕후이는 자신의 역사서술의 의미가 “철 지난 실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품은 보편성이나 미래의 잠재력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신좌파’ 지식인 혹은 비판적 지식인으로 왕후이를 소개하고 10여 년이 지난 후 한국 학계에서 왕후이에 대한 평판은 변화가 생겼다. 왕후이가 중국 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했고 더 이상 비판적 지식인이 아니며 심지어 중화주의자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왕후이의 사상 작업은 좌파와 우파 또는 국가와 민간 등의 구도에서만 접근해서는 적절하기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학문작업은 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좌절을 딛고 사상사 연구를 통해 활로를 찾으려 한 90년대 초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과정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색이라는 문제의식을 견지한 채 중국의 근현대와 대면하며 현실과 미래를 보는 시야를 재구축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단기 20세기』는 청대 사상사, 20세기 초에 대한 서술을 거친 기존 사상사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왕후이의 역사 다시쓰기는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는 관념과 사실을 성찰하며 재사유의 계기를 던져준다. 그리고 서술 주제가 점점 현재에 가까워오면서 역사 다시쓰기는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거시적 정치, 경제 현실을 성찰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듯 『단기 20세기』에서 역사 서술과 사회비평이 접점을 형성하는 사상가의 치열한 사유의 깊이와 무게는 1,024쪽에 달하는 두께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동양철학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현대 사상에 대한 비판적 독해, 중국 지식계와의 생산적 대화, 현재성을 가진 사상 담론 형성을 목표로 삼고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아울러 현대 사상의 뿌리가 되는 근대 개념사 연구, 정보기술과 인문학 연구를 접목한 디지털인문학을 병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왕후이』, 『세계 디지털 인문학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권학편』, 『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절망에 반항하라: 왕후이의 루쉰 읽기』, 『왕단의 중국현대사』,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 현대 지식인의 사상적 부활』, 『아시아는 세계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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