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적 국악+뮤지컬을 실험하다, 뮤지컬 〈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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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적 국악+뮤지컬을 실험하다, 뮤지컬 〈금악〉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1.09.0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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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성율_고은영 이영_황건하 갈_윤진웅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2021년 8월 뮤지컬 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작품은 <금악>(예술감독/연출 원일, 대본 김정민, 작곡 성찬경·손다혜·원일·한웅원, 음악감독 한웅원, 2021. 8. 18~29,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이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경기아트센터에서 주최하고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원래 경기도립국악단이었으나 원일 감독이 부임하면서 2020년 단체명을 바꿨다)에서 제작했으며 경기아트센터 산하 단체인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경기도극단, 경기도무용단이 모두 참여한 경기도 관단체 연합 프로덕션이었던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더욱 눈길을 끌었던 것은 (지역) 관단체 연합과 뮤지컬 인력들이 결합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국공립 산하 예술단체의 연합 공연이 선언적인 기획만 선보이며 ‘그들만의 잔치’로 끝났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국악 관단체의 이례적인 뮤지컬 공연에 실제 뮤지컬 씬에서 활동하는 인력들이 들어온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행보였다. 

둘째, 원일 감독의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게임 스트리밍 플랫폼을 사용한 <메타퍼포먼스: 미래극장>(2020), 전자음악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시나위 일렉트로니카>(2020)와 같은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해체와 변화 그리고 대중화’를 향한 비전을 명확히 하고 있었기에 공연계의 가장 대중적 장르인 뮤지컬 제작은 또 다른 기대를 품게 했다. 

셋째, 동시대 국악 씬에서 벌어지고 있는 퓨전화 작업들이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며 문화예술계의 트렌드가 된 현재 국악과 뮤지컬의 만남은 매우 시의적이었다. 이 맥락에서 <금악>의 작곡을 네 사람이 담당한 것은 아주 상징적이었는데, 뮤지컬 <니진스키>의 작곡가 성찬경, 창극 <패왕별희>의 작곡가 손다혜, 그리고 원일 감독이 각자의 장기와 특징을 살려 넘버를 나눠 작곡했고 재즈 드러머인 한웅원이 음악감독을 맡아 음악이 하나의 흐름으로 흐를 수 있도록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했다. 이론상 뮤지컬은 모든 음악 장르를 흡수할 수 있는 만큼, <금악>은 퓨전의 틀로 뮤지컬 음악의 다양성을 모색했다. 이것은 대학로 창작뮤지컬들의 패턴화, 정형화된 스타일과 다른 맥락에 위치해 있었다.

 

                  홍석해_남경주 성율_고은영 임새_조수황 금선_함영선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먼저 결론을 말하면 <금악>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한계를 함께 보여준 공연이었다. <금악>은 ‘금지된 악보’라는 소재를 메타포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뮤지컬이다. 사실 인간의 욕망과 억압, 그리고 여러 욕망의 부딪힘은 특히 근대 이후 문학과 연극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빈번하게 테마로 호출되어 왔다. <금악>은 이 보편적 테마를 세도정치가 극심했던 순조 말기 효명세자(극 중 이름은 ‘이영’이지만 효명세자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와 안동 김씨 김조순 사이의 대립 안에 위치시키고 그 안에 극적인 장치로서 성율이라는 캐릭터를 두어 작품의 변별력을 도모했다. 

 

                                               성율_유주혜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금악>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궁중의 장악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소리와 음악’이라는 가장 뮤지컬적인 소재를 활용한다. 이는 효명세자가 실제로 음률과 춤에 정통하여, 유교의 근본인 ‘예악’을 중시하는 덕망 있는 군주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 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극 중 ‘금악’은 ‘예악’과 대립되는 ‘금지된 음악’으로 개념화되어 있다. 예악이 예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장악원의 정격 음악이라면 금악은 음률에서 벗어난 음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을 매혹시키고 타락시키는 음악이라는 논리다. 따라서 김조순에게 금악은 능력 있고 명망 있는 세자와 효과적으로 대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 설정된다.

 

                                             성율 유주혜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그러나 금악이라는 ‘금기’는 반드시 서사 안에서 해체되며 해체의 전후를 수행하는 존재를 갖기 마련이다. 성율과 관련된 허구적 요소가 작품 안에 들어와 있는 이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금기를 깨고 봉합하는 가장 흥미로운 과정이 <금악>을 참신하게도, 진부하게도 만드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성율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내는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번역할 수 있는 천재적인 음악가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여성이지만, (죽은 엄마의 유지를 받들어) 소리를 하고 찾는 여성으로 살게 되면 기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남성으로 변장한 전복적 존재다. 율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연의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소리의 주인들과 소통하는 때로서, 실제 무대도 사극의 틀을 벗고 ‘만물과 소통’한다는 장면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상상력의 수위를 높였다. 

 

                                     성율_고은영 이영_조풍래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마치 뮤지컬 <라이온 킹>에서 형형색색의 패턴들이 동물을 형상화하여 무대를 채웠던 것처럼 무대 뒤 전면에는 자연을 다채로운 색으로 형상화하는 영상이 맵핑되어 있고, 앙상블 배우들은 전통 악기와 모빌을 들고 나와 어쿠스틱한 느낌으로 소리의 주인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율에게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순간, 소리로 자연과 합일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들의 음악 역시 가사와 잘 부합되는 조 바뀜과 국악, 양악의 조화로 참신함의 기치를 높였다.

 

                 홍석해_남경주 어린율 신해윤 여린영_최유현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하지만 율이 장악원에 들어가 금악을 접하고 ‘복수와 욕망’의 주체로 변모하게 되면서 공연의 템포가 변한다. 한편으로는 서사가 시원하게 쭉 뻗지 못하는 느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력이 제한되는 느낌도 받았다. 사실 율은 금악을 손에 넣어 세도정치의 끝을 달리려는 김조순에게 속아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 이 사실을 전부 알고 있는 전 장악원 전악 홍석해가 거둬 기른 아이다. 홍석해는 율의 천재성을 알고 음악을 가르쳐주지만 절대 음률을 벗어나는 음악은 가르치지 않는다. 율에게는 그래서 항상 ‘갈급함’이 있고 그 갈급함을 장악원에 들어가 ‘자신의 소리를 찾아’ 해소하고 싶어 한다. 우연한 기회에 김조순의 눈에 띈 율은 특채로 장악원에 들어가 그의 계략에 따라 금악을 접하고, 아무도 풀지 못했던 악보를 해독하는 경지에 이른다. 

 

                                            성율_유주혜 갈_추다혜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여기에서 공연은 금악의 실체가 곧 ‘욕망을 먹고 자라는 것’이라는 개념을 보여주는데, 이를 위해 ‘갈(渴)’이라는 인물로 그 개념을 구체화한다. 율이 잠자고 있던 악보를 ‘깨움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 갈은 이로써 주인과 (나쁜) 정령의 관계가 되고 율은 갈의 조종을 받으며 부모의 죽음의 원인을 알고 결국 복수를 욕망하는 길로 내달린다. 여기서 갈을 보편적으로 읽으면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욕망으로 환원될 수 있겠지만, 율과 갈의 관계로 좁히면 율의 또 다른 자아로 보인다. 뮤지컬에서 자주 쓰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나’다. 원형적으로는 <지킬 앤 하이드>의 ‘하이드’에서부터 <팬레터>의 ‘히카루’까지 인간의 욕망과 어떤 기질로 인한 다층성을 보여주는 뮤지컬적 해법이 <금악>에서도 보인다. 율의 옆에서 그로테스크한 몸짓과 갈라지는 소리를 내는 갈을 처음부터 끝까지 붉은색 조명이 팔로우하는 방식은 그리 낯설지 않다. 

 

                                      임새_조수황 겨울_심재훈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금악>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은 아마도 임새와 겨울이의 넘버 ‘모든 게 네가 처음이라’가 아닐까. 율과 함께 자라며 짝사랑하게 된 임새와 세자 이영을 보필하는 호위무사 겨울의 ‘소리와 춤’으로 이뤄지는 듀엣이다. 임새를 연기한 젊은 소리꾼 조수황이 국악 창법을 섞어 부른 이 넘버는 두 사람의 애절함을 한데 묶어 시적으로 뭉근하게 표현했다. 노래 대신 춤으로 화답한 겨울-심재훈의 절제된 한국적 춤 선은 두 인물의 정서 상태를 한층 증폭시켰다. 두 배우의 역량이 장면에 온전히 녹아들면서 가장 정확한 수위로 장면이 구축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국악적 질감의 승리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자 이영을 맡은 황건하 배우의 연기와 노래 역량일 것이다. 자연스러운 소리와 음악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세자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무대 위에서 정확하고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노래에 맞춰 창법을 조절하며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않는 노련함도 있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이영_황건하 [제공=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금악>은 국공립 단체의 공연이 그간 보여주었던 정형화되고 딱딱한 틀을 많이 벗어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재의 참신함에 비해 서사의 방향성과 연출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국면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를 보완한다면 국악을 활용한 동시대적 창작뮤지컬로 성장할 가능성이 보였다. 민간에서 제작하여 성공한 뮤지컬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처럼, 국악이 창작뮤지컬의 유효한 음악적 언어로 자리잡아 뮤지컬의 토착화를 가속화시키기를 기대한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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