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의 기준은? '성적 동의'의 이론과 쟁점을 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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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기준은? '성적 동의'의 이론과 쟁점을 다루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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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성적 동의: 지금 강조해야 할 것 | 밀레나 포포바 지음 | 함현주 옮김 | 마티 | 232쪽

 

성폭력 사건의 핵심에는 늘 ‘동의 여부’가 있다. 이 책은 성적 ‘동의 없음’을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동의 개념이 어떻게 권력형 성폭력, 데이트 강간, 리벤지 포르노를 꿰뚫는지 보여주며 '성적 동의'에 관한 이론과 쟁점을 폭넓게 다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의사와 무관한데도 행동과 말투, 옷차림 등을 성관계에 대한 동의로 해석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꼬집으며, 동의의 1단계는 무엇보다 ‘물어보기’라고 강조한다. 침범하지 말아야 할 타인의 경계를 알고 조정하는 과정인 ‘동의 협상’ 이전에 묻는 단계가 필수라는 것인데, 이때 신체적 자율권은 전제가 된다. 성관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압력이나 강제, 어떠한 권력 행사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폭력을 저지르기는 쉽고 단죄하기는 어려운 사고방식과 사회구조 등을 일컬어 ‘강간문화’라고 한다. 피해자가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사소한 행동이나 증언을 들어 ‘사실은 동의했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도 강간문화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성폭행을 저지르기는 쉽고, 피해 사실을 알리고 구제하기는 어려운 모든 말과 행동이 강간 문화의 기초를 이룬다고 지적하면서, 강간 문화의 실체를 하나씩 파헤친다.

실제 강간이나 유사 강간의 70%가 물리적 폭행과 협박 없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를 구성요건으로 하는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때문에 성폭행 관련 사건의 조사, 재판 등 일련의 과정에서 가해 행위보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저자는 현행 강간법 뿐만 아니라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문제점을 따지면서 피해자의 말을 경시하는 성인지감수성의 문제도 지적한다. 사법기관의 부족한 성인지감수성이 2차 피해를 유발하고 강간 문화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강간법 개정은 현 정부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성적 동의 여부로 강간죄를 판단하는 국가는 여전히 드문 상황에서 이 책은 영국,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각 나라의 강간법 사례도 소개한다.

또 미디어에서 성적 동의를 등한시하는 현실도 조목조목 짚어낸다. 저자는 대중 매체에서 성과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고 ‘동의’에 무관심한 편이지만 몇몇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 예로 「데드풀」과 「데드풀 2」는 ‘동의 철회’ 장면을 영화의 코믹한 톤을 해치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그려냈다.

성적 동의 문제의 핵심은 사회 구성원이 각자 손에 쥔 위력과 권력을 인지하고 상대방의 사적 경계와 신체적 자율권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비단 ‘위력’의 차이가 분명한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교수와 학생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관계 유지’를 명목으로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해온 부부, 어제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오늘도 섹스를 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오래된 연인, 하물며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신체 접촉에 대한 동의는 필요하다.

이 책은 성적 동의가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으로 공유된 행동 지침을 요하는 문제라고 설명한다. 내가 겪은 일이 성폭력이었는지 아닌지 고민하는 여성, ‘썸녀’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키스라도 한번 하려는 생각이 범죄인 줄 모르는 남성,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고민하는 교사와 양육자, 현행 강간법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싶은 법조인 등 모두가 꼭 한번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성폭력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들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와 집단의 문제라고 인식한다. 성적 동의가 단순히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기보다 권력구조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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