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라는 심미적 감정과 분노라는 윤리적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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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라는 심미적 감정과 분노라는 윤리적 감정
  • 김종갑 건국대학교·영문학
  • 승인 2021.08.3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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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 말, 말_ 『혐오: 감정의 정치학』 (김종갑 지음, 은행나무, 216쪽, 2021.07)

 

우리가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혐오는 미움이나 분노, 멸시보다 강렬한 정동이다. 금방이라도 토할 듯이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고 눈이 충혈되는 정동이 혐오이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강렬한 정동이 강요되는 시대에 살고 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혐오의 시대가 아니라 혐오를 과잉생산하고 과잉으로 낭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혐오가 지극히 비민주적인 정동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비인간화하고 동물화하는 기제이다. 

혐오가 비민주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움이나 분노의 정동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나쁜 짓을 미워한다. 심하면 그런 사람을 증오하기까지 한다. 이때 증오의 대상은 그의 외모나 신분이나 성별, 직업이 아니라 그의 나쁜 행동이다. 이처럼 미움이나 분노의 정동은 존재가 아니라 행동을 겨냥한다. 필요하다면 나서서 그를 비난하고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혐오의 정동은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개가 짖는다고 같이 짖지는 않는다. 같이 짖으면 우리도 개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똥 묻은 개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한다. 혐오의 대상과는 말을 섞거나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상대방이 인간이라면 미워하거나 증오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혐오의 대상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과거의 신분제 사회는 혐오가 범람하는 사회였다. 귀족은 천민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놈!’- 이 한 마디로 충분했다. 

왜 혐오가 비민주적인 정동인가? 무엇보다도 혐오는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기제이다. 우리는 상하거나 더러운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고 입 밖으로 뱉어낸다. 자칫하면 독에 중독이 되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상상만 해도 몸에서 소름이 돋는다. 이와 같이 먹어서 해가 되는 음식물들을 몸 밖으로 뱉어냄으로써 생명을 유지시키는 정동이 혐오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와 공포의 지점에서 혐오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과민 반응을 한다. 새끼줄을 밟았는데 뱀을 밟은 줄 알고 기겁을 하고 솥뚜껑을 자라로 알고 사색이 될 수가 있다. 이러한 혐오의 정동이 사람에게로 향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그냥 싫어하지 않는다. 독극물이나 더러운 동물로 취급할 정도로 너무나 싫어하는 것이다. 그와 손이 닿거나 말을 섞으면 자신도 개나 돼지가 된다고 생각될 정도로 끔찍하게 싫어한다. 

여혐, 남혐, 성소수자 혐오, 노약자 혐오, 코로나 확진자 혐오 등, 이러한 용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절반을 우리가 혐오할 수가 있을까? 여혐과 남혐을 생각해보자. 손이 닿기만 해도 너무나 더럽고 불결해서 토할 듯이 혐오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세상에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야만인으로 이분하는 것일까? 야만인과 가까이하면 자신도 야만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러한 혐오의 원형적 서사를 우리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찾을 수 있다. 길을 잃고 바다를 표류하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선원들은 다행스럽게도 키르케(Circe)가 다스리는 섬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대접한 음식을 먹은 선원들은 모두 꿀꿀거리는 돼지가 되었다. 미야타키 하아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음식을 먹은 치히로의 부모는 돼지가 되었다. 이때 그러한 음식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 입에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는 음식물을 혐오한다. 독극물이나 상한 음식을 혐오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우리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기생충과 같은 병원균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주변으로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똥 묻는 개들도 주변에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왜 우리는 특정한 여자나 남자,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취급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 하에 그들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기를 바라는 것일까? 우리가 원하는 혐오의 진실이 유태인학살, 세르비아 인종청소, 난징대학살,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과 같은 사건들일까? 

혐오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동물화의 정동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동물로 비하하는 정동이다. 고약한 것은, 그것이 타인을 동물화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즉 타인을 혐오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지극히 반동적인 정동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은 개나 소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타인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사람이다’라는 무의식적인 배타의 논리를 거치는 것이다. 세상이 내가 좋아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로 양극화되는 것이다. 달면 삼키는 것들과 쓰면 뱉는 것들로 이분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혐오라는 정동을 탈신분화하고 민주화해야 한다. 신분제 사회는 위계적 존재의 사회이다. 비천하고 혐오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양과 품위가 있는 양반과 귀족이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다. 이 점에서 특정 부류의 사람을 동물화하는 혐오의 정동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고 귀족적이다.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행동의 옳고 그름을 대상으로 반응을 해야 한다. 동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며 혐오할 것이 아니라 그의 나쁜 짓을 미워하고 분노하며 질책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싸움과 폭력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아무튼 우리는 그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심미적인 정동이다. 우리는 혐오의 정동을 미움이나 분노, 증오의 정동으로 윤리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타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따지고 보면 혐오의 대상보다 그 자신이 훨씬 동물적이다. 미움과 분노에는 그렇게 싫어할 수밖에 없는 명분과 이유가 있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즉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혐오는 말이나 논리, 명문이 없이, 즉 사유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반사신경적으로 작동한다. 뱀인지 아닌지 눈여겨보거나 따지지 않는다. 막대기에 대해서도 뱀처럼 공포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의 주체는 신피질이 아니라 편도체, 생각이 아니라 동물적 본능이다. 

주위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것들도 있다. 달면 삼키지만 쓰면 뱉어내는 정동이 혐오이다. 우리는 음식의 취향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심미적으로 판단하려는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혐오의 시대를 분노의 시대로 민주화하고 윤리화해야 한다.  

 

김종갑 건국대학교·영문학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7년 설립된 몸문화연구소 소장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외모 강박》,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문학과 문화 읽기》,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내 몸을 찾습니다》(공저), 《생각, 의식의 소음》, 《우리는 가족일까》(공저), 《성과 인간에 관한 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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