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셈법 속의 '강화교섭'과 임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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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셈법 속의 '강화교섭'과 임진전쟁
  • 김문자 상명대학교·일본근세사 
  • 승인 2021.08.3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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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임진전쟁과 도요토미 정권 양장』 (김문자 지음, 경인문화사, 412쪽, 2021.07)

 

 임진전쟁은 한일역사에 가장 큰 불행이었고, 그 앙금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근대 식민지 경험에 따른 반일감정과 역사적・정치적 목적이 연동되어 현재까지도 임진전쟁 연구가 ‘민족주의’와 ‘국난 극복 사관’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1590년 통신사 파견부터 1607년 조・일 국교가 회복되기까지의 임진전쟁을 동아시아 삼국이 참전한 국제전쟁으로, ‘강화교섭’이라는 외교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전쟁의 실체를 분석하였다. 무엇보다도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실제 전투 기간은 1년 6개월, 나머지 5년여는 거의 ‘휴전’ 상태에서 강화교섭인 외교전이 조・명・일간에 지속되었다. 이 문제는 전쟁 발발 및 조・명 관계의 실상과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양국의 입장, 그리고 재침략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학계에서는 강화교섭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는 침략을 당한 조선이 강화교섭을 시종일관 반대했다는 선입견과 ‘화친(협상)’을 논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처음부터 작용했기 때문이다.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에 대해 조선은 이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초기엔 교섭에 응하였다. 그러나 1592년 5~6월 의병이 조직되고, 戰勢가 회복되자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평양전투 이후 식량부족 사태로 일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小西行長은 8월, 평양에서 沈惟敬과 교섭하여 정전협정까지 맺었다. 명은 1593년 2월 벽제관에서 대패하자 일본과 강화교섭을 재개하면서 전쟁을 조속히 종결지으려 했다. 일본군이 한성에서 물러서자 조선이 거의 회복된 것으로 파악한 명은 일본이 재침하지 못하도록 이들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豐臣秀吉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려고 하였다. 군수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병사 소모율이 40퍼센트까지 올라가자 일본군은 조선 남부지역까지 후퇴하였다. 이후부터 약 5년간 '일·명 강화교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후 일・명간의 교섭이 시작되면서 조선이 외교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강화교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삼국 간의 교섭은 서로의 요구 조건과 戰況에 따라 변수가 너무 많았다. 특히 정보의 전달 체계상 15~20일씩 걸리던 초반의 전황 보고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3개월 이상은 걸렸다. 최고 통치자들의 명령이 급속한 전황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교섭 실무진들의 보고와 군령· 명령이 착종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존의 전달체계는 교섭 실무 담당자들의 계략과 마찰, 권모술수 등을 키워주는 온상이 되었다. 이것이 강화교섭을 복잡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조선은 영토를 침략한 일본과는 교섭할 필요가 없었고, 조속히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一戰이 더 요구되었다. 그러나 기민(飢民)과 피역민에 의한 민란, 비참한 일반 서민들의 생활, 일본군의 재침 정보가 유포되면서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결국 명의 요구에 따라 1596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결단에는 일반 백성의 구제와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肥前名護屋城圖屛風(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所藏)  1593년 5월 나고야성으로 가고 있는 명사신 일행

 ‘일·명 강화교섭’의 잘 짜인 각본은 “명을 정복하려 했던 풍신수길이 조선에게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16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명군의 참전, 조선 의병과 이순신의 활동으로 인해 전세가 악화되자 일본은 명과 강화교섭을 맺고 조선의 영토 중 일부를 할양받으려고 했다. 결국 요구가 전혀 관철되지 않았고, 명이 보낸 국서에 ‘秀吉을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문구가 발각되어 秀吉은 이에 분노하고 명이 보낸 국서를 찢고, 그 즉시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는 것이다. 
 풍신수길이 5년 동안 진행된 강화교섭을 파기한 것은 ‘일본군을 조선지역에서 전부 철수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남부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전부 철수하게 되면, 지금까지 총동원해서 감행했던 침략전쟁이 수포로 돌아간다. 지진 발생 등 국내의 정세마저도 불안한 가운데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돌파구로서 재침략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재침의 배경은 ‘조선 왕자의 일본 파견 불참’ 문제가 아니라 조선 남부 ‘경상도 지역’의 ‘영토 확보’와 ‘무역 재개’라는 점이다. 그는 大坂-伏見-名護屋-조선-필리핀이라는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쟁을 지탱하면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풍신수길은 부산 지역만이라도 확보하여 교역의 장을 마련하고 해외영토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지속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군역동원을 통해 히데요시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와 국내 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던 임진년의 초기 전쟁과 현저하게 차이 나는 부분이다. 

  전쟁 종결 후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라는 단기간 만에 국교를 재개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양국 모두 정권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점과 명의 ‘先行後報’ 방침이 주요했다. 즉 1604년 5월 이후부터 조・일 교섭에 대해서 명은 간섭하지 않고, 조선이 자주적으로 처리하라는 방침이었다. 그 결과 조선은 대일 강화에 ‘通倭’한다는 의구심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명의 조치로 일본과의 국교 재개가 조속하게 시행될 수 있었다. 명의 간섭을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체적인 자세로 일본과의 외교가 가능해진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재침을 방지하고 국토 재건과 북방 방위에 전념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선왕의 능 훼손을 비롯한 전란의 모든 허물을 벗어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해 국교를 맺었던 것이다. 명은 1600년 4월 피로인과 인질 문제가 해결되자 8~9월에 본격적으로 철수하였다.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터 德川家康이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지만, 1617년까지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불안전한 상황이었다. 그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고립된 국제관계를 수복하고 조선・명과의 국교 정상화를 꾀함으로써 국가 주권을 분명히 함은 물론, 교역에 의한 국내경제 발전과 무역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국교를 서둘렀다. 1602년 니죠 성과 에도 성・슨푸 성을 축성하면서 무가 권력이 계승해야 할 관직은 ‘관백’이 아니라 ‘쇼군’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국내를 장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도요토미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권력 장악에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대내외적인 선전 효과를 염두에 둔 통신사 도래를 성사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임진전쟁은 한·중·일 삼국 모두에게 막대한 인명피해와 국토 손실을 가져다준 엄청난 재난이었다. 조선은 100여 년에 걸친 전후 복구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는 속에서 전쟁이 종결된 지 채 10년도 되기 전에 '국교재개'라는 결단을 내려 한일간의 외교적 회복을 시도하였다. 현재 한일관계 악화로 상호손실의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조속히 끊고 상호이익의 선순환 구조로 바꿔야 한다. 임진전쟁 기간 중에 보여준 강화교섭 노력은 자국의 안전과 실리적인 이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전쟁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일관계의 엉킨 실타래를 외교적으로 풀어나가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김문자 상명대학교·일본근세사 

상명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오챠노미즈 여자대학에서 일본 근세사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박물관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관계사학회 회장이다. 저서로는 『戰の中の女たち, 戰爭 · 暴力と女性Ⅰ(공저)』, 『임진왜란과 한일관계(공저)』, 『北島万次, 임진왜란 연구의 재조명(엮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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