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대이동〉을 쓰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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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의 대이동〉을 쓰고 나서
  • 김대륜 대구경북과학기술원·역사학
  • 승인 2021.08.23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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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 말, 말_ 『패권의 대이동: 세계사를 움직이는 부와 힘의 방정식』 (김대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312쪽, 2021.06)

 

지난달 말에 <패권의 대이동>이라는 작은 책을 냈다. 감사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원래 본격적인 연구서로 준비한 게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서울대 김태유 선생과 함께 <패권의 비밀>이라는 책을 낸 덕분에 어느 온라인 교육업체에서 비슷한 주제로 강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강의 원고를 준비하면서 예전 자료에 최근 연구 성과를 보충했고, 그 책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 강의를 어느 출판사 편집자가 보고서 책으로 묶으면 좋겠다고 권한 게 <패권의 대이동>을 쓰게 된 계기였다.  

<패권의 비밀>을 접한 독자라면 기억하겠지만, 그 책은 하나의 큰 가설을 제시한다. 근대 이후 세계경제에서 패권에 도전한 나라 가운데는, 이를테면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 성장이 감속하는 농업사회였던 나라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제 성장이 가속하는 산업사회로 규정할 수 있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가서 경제 성장의 감속과 가속 여부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은 영국에서 처음 일어난 산업혁명이었고, 그 이후 산업사회는 혁신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속성 덕택에 성장의 가속을 경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이론 틀은 김태유 선생이 오랫동안 구상한 것인데, 그 책 서문에서 선생이 토로했듯이, 필자는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해명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두 가지 문제를 좀 더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나는 경제 성장이 감속하는가, 혹은 가속하는가를 결정하는 조건은 기술혁신의 여부인데, 이런 혁신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연구자가 혁신의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는데도,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패권을 두고 다툴만한 나라에서 혁신이 계속된 까닭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영국 산업혁명을 연속된 기술혁신의 결과로 본다면, 왜 산업혁명이 처음으로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고전적인 물음은 피할 수 없는데 그 책에서는 그저 국가와 기업이 과학기술에 충분히 투자하기만 하면 마치 혁신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서술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스페인부터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미국에 이르는 패권의 이동 과정을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 산업사회로의 이행으로 설명하면서 이 세 사회가 기대고 있는 경제체제를 엄밀하게 이론적으로 따져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책에서는 농업사회를 단순재생산사회로 제시하고, 상업사회를 확대재투자사회로, 산업사회를 확대재생산사회로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경제체제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양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농업사회의 경우 지배 엘리트가 경제 잉여를 거의 대부분 수취해가므로 기술혁신의 유인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구학적 재생산에 그치고 말았다는 서술은 중세 시대의 복잡다기한 권력관계 이면에 깔려 있는 경제체제의 속성을 제대로 드러내기 어렵지 않나 싶었다. 

아쉽게도 <패권의 대이동>은 이런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를 충분히 펼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원래 대중 강의를 위해 쓴 원고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데다가 책 자체도 고급 교양서를 표방해 최대한 서술을 쉽게 했으므로 역사학과 사회과학에서 오랫동안 진행된 복잡하고 미묘한 논쟁을 담아낼 틈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전작(前作)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은 쟁점을 계속 생각하고 의식하면서 두어 가지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했다. 하나는 패권을 둘러싼 경쟁을 이해하려면 특정 시대 패권국가의 경제체제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테면 스페인제국이 막대한 재정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토로 확장하려 했던 것은 제국의 핵심이라 할 스페인이 봉건적 경제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대목이나 19세기 중반 전성기 영국이 영토 확장에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기본적으로 영토의 지배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속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한 대목이 그렇다. 

 

또 하나는 패권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 그러니까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어주는 재정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 주제만으로도 두툼한 연구서 몇 권은 쓸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오랜 논의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재정 체제를 폭넓게 바라보자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재정 체제라 할 때 떠올리게 되는 조세 수취 제도나 국가부채 관리 같은 문제를 넘어서 이런 제도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치 문화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런 재정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거나 이 체제에 문제가 생길 경우 어렵게 쟁취한 패권도 쇠락한다. 더욱이, 재정 체제를 떠받치는 경제 체제의 속성까지 함께 생각해보면 지난 역사에서 한 나라가 패권을 유지하는 기간에 왜 차이가 나타나는지도 가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봉건제에 바탕을 두고 있던 스페인이 기댈 수 있는 재정 체제와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전한 미국의 재정 체제는 그 속성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패권을 떠받칠 수 있는 역량 면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조심스럽게 펼치면서도 한 가지 중요한 쟁점은 제대로 다루지 못해 아쉽다. 오래전 슘페터가 설파하고, 비교적 최근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엘렌 우드나 막스 베버를 따라 조이스 애플비가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혁신에 바탕을 둔 생산성 향상으로 축적을 지속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지만, 대개 연구자는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쟁점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곧 출간될 필자의 또 다른 책 서문에서 솔직히 털어놨듯이, 꽤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아직 버겁다. 최근에 서울대 배영수 선생이 Social History에 실은 중요한 논문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정의하려는 참신한 노력을 모처럼 기울인 바 있고, 필자도 선생의 주장에 대개 공감했지만, 이런 정의를 영국과 미국의 사례에 적용해 패권의 성쇠를 설명하고, 더 나가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까지 가늠해보는 일은 이번 작업에서 해보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배 선생이 자신의 새로운 자본주의 개념을 미국사에 적용한 개설서의 일부를 내놓을 예정이고, 필자가 원래 전공인 영국사로 되돌아가 보려는 참이므로, 이 작업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대륜 대구경북과학기술원·역사학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원 초빙교수, 서울대학교 공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기초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산업혁명과 경제 성장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펼치며 부국의 조건을 탐색하는 학술서 『패권의 비밀The Secrets of Hegemony』에 공저로 참여했고, 세계사와 한국사의 상호연관성에 주목하며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고찰하는 대중서 『역사의 비교』를 썼다. 그 외 『역사학의 역사』(공저), 『세계의 대상인들』(공저), 『서양사강좌』(공저) 등을 썼으며, 『근대세계체제 1』(공역)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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