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전파, 말의 변신 … ‘구슬’, ‘카시(Kash)’ 그리고 ‘슬슬(瑟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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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전파, 말의 변신 … ‘구슬’, ‘카시(Kash)’ 그리고 ‘슬슬(瑟瑟)’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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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5)_ 힌두쿠시의 제왕 고선지, 石國의 슬슬(瑟瑟)을 탐내다 ①
 

샤워를 하다가 생각했다. Roma(=Rome의 이탈리아 이름)라는 명칭은 이 도시국가의 창건자인 Romulus라는 인명에서 비롯된 것인데, Italia는 어디에 기원을 둔 말인가? 모르면 사전을 찾거나 웹서핑을 하면 된다. 나중에 하려고 하면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많다. 세월이 주는 선물이다. Italia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이는 그 어떤 것도 만족할만한 설명이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다행이다. 약간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Italia의 원형은 Hitaria 혹은 Mitaria이었을 수 있다. 얼핏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추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칭하는 라틴어 Hispania가 시공간의 변모와 더불어 어두 /h/음이 탈락하고 카스티야어(Castilian) España, 카탈로니아어(Catalan) Espanya 그리고 프랑스어 Espaigne로 실현되다가, 중세에 이르러 의미역이 달라지며 España는 Spain을,  Espanoles은 스페인 사람(Spaniards)을 가리키는 단어로 최종 변신을 마쳤다. 혹시 Italia도 그런 일련의 변신 과정을 거친 용어일지 모른다.

▲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
▲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
▲ 콜럼버스는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환영을 받았다.
▲ 콜럼버스는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환영을 받았다.
▲ 콜럼버스와 이사벨 1세
▲ 콜럼버스와 이사벨 1세

카스티야(Castile)는 올리브유로 만든 비누로 유명한 스페인 중부의 도시다. 1492년 이 도시의 통치자였던 이사벨라 여왕이 아라곤(Aragon)의 군주 페르난도 국왕과 혼인동맹을 맺고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사라센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낸다. 같은 해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콜럼버스에게 배 두 척을 내주어 신대륙 발견이라는 역사적 탐험 여행에 오르게 한 장본인도 바로 이사벨라 여왕이다.

만주(滿州)라는 지명은 동명의 종족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다. 영어로는 Manchuria라고 하는데, Manchu 뒤에 ‘땅’이라는 의미의 접미사 ia를 붙인 것이다. 중간에 流音 /r/이 첨가된 것은 모음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또 다른 사례를 Siber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Siberia라는 지명(toponym)은 한자로는 錫伯, 席北 등으로 표기되고, 영어로는 Xibe 또는 Sibe로 전사되는 종족 명칭(ethnonym)을 근간으로 하여 만들어진 어휘다. 그러니까 시베리아는 “시버족의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지명이다. 시버족은 현재 중국 신장성 일리 카자흐 자치구 차부차얼 시버 자치현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며, 청나라 건륭제의 정복전쟁과 그에 따른 이주정책에 따라 만주지역에서 멀고 먼 그곳까지 옮겨가 살고 있는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불가리아(Bulgaria)와 중가리아(Dzungaria) 등도 종족명에 근거한 지명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다. Dzungaria의 어원 분석에 있어 하나의 가능성은 시베리아에서처럼 중가리아의 구성 성분을 Dzunga + (r) + ia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풀어야 할 숙제가 Dzunga가 무엇이냐, 혹은 어떤 종족이냐 하는 것이다. Dzunga의 성분을 ‘왼쪽’을 뜻하는 몽골어 Dzun(또는 Zűn, Jüün)과 부족을 뜻하는 말 ga로 분석할 경우 중가리아는 “좌측 부족민들의 땅”이 된다. Ga의 용례는 부족연맹체 국가 부여의 핵심세력인 馬加, 牛加, 猪加, 狗加와 같은 부족명(tribal names) 아니면 씨족명(clan names)에 등장하는 加(ga)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漢語 표기가 준갈이(準爾)인 점을 감안할 때, Dzungar + ia로의 분해가 보다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Dzungar는 Dzun(left) + gar(hand)의 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 생각과 일치한다. 다른 점은 Dzun(left) + gar(hand)에 대한 해석이다. 지금껏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자를 ‘좌측’, 후자를 ‘손’이라는 의미의 말로 이해하고 있다. 참고로 중가리아의 영어 이표기는 다양하다: Zungaria, Dzungharia, Zungharia, Dzhungaria, Zhungaria, Djungaria, Jungaria, Songaria 등.

중가리아는 천산 산맥 북쪽, 알타이 산맥 남쪽에 위치한 분지를 가리킨다. 동쪽으로는 서몽골,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과 맞닿아 있다.

玉의 전쟁

사람을 취하게 하는 건 술만이 아니다. 남자는 여인의 향기에 취하고, 여자는 아름다운 보석의 광채에 취한다. 사람은 五關을 자극하는 순간적인 짜릿함이나 아득한 황홀감과 같은 취기를 자칫 사랑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쉽게 그 사랑 속으로 빠져든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구슬을 몹시 사랑했지 싶다. 신라 금관에 매달린 曲玉이 구슬 사랑의 징표다. 어렸을 때 구슬치기를 하며 구슬을 다마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구슬처럼 둥그스름한 사람의 머리를 가리켜 아다마라고도 했다. 둘 다 일본말이란 건 들어서 알았다. 아다마가 나쁘다고 하는 소리도 주변에서 흔히들 하는 말이었다.

구슬을 뜻하는 한자어는 珠와 玉 외에 슬슬(瑟瑟: 큰 거문고 슬)이 있다. 珍珠는 眞珠라고도 쓰는데, 전자는 “보배로운 구슬”, 후자는 “참 구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참은 가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하늘 아래 온전히 참다운 건 존재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데 이 구슬이라는 말과 물건이 사람의 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 내지 교류를 보여주는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좋은 자료다. 김부식은 『三國史記』에서 ‘구슬’을 고구려어 ‘古斯/kusi/’로 표기했다. 宋나라 사람 손목(孫穆)은 고려를 다녀간 뒤 지은 백과서 『鷄林類事』에서 ‘구슬’을 ‘區戌/kusul/’로 음차했다.

당나라 시인 白樂天의 시에 뜻밖에 슬슬(瑟瑟)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 寶玉이 지닌 暗綠色의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낼 의도이지 싶다.

暮江吟  ---  白居易(772~846)

一道殘陽鋪水中 일도잔양포수중  한 줄기 석양빛 물 위를 비치니
半江瑟瑟半江紅 반강슬슬반강홍  강의 절반은 검푸르고 나머지는 붉게 빛나네
可憐九月初三夜 가련구월초삼야  가련토다 구월 초사흘 밤 
露似眞珠月似弓 노사진주월사궁  이슬은 진주처럼 영롱하고 달은 활 모양일세.

瑟瑟은 원래 타림분지 남쪽 곤륜산맥에서 출토되는 옥석을 가리킨다. 고대부터 총령(파미르 고원) 이동, 현 중국의 가장 서쪽에 해당하는 신장 위그루 자치구 호탄 일대, 주로 곤륜산맥의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드는 악카시(Ak Kash: 白玉河)와 카라카시(Kara Kash: 黑玉河)의 돌덩어리 중에서 발견된다.

『舊唐書』 권 104 「高仙芝傳」에 고선지가 석국을 정벌하여 瑟瑟 10여 石(가마)을 빼앗았다는 石國瑟瑟掠取記事가 실려 있는데, 도대체 이 물건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기사화되었을까? 말로 푸는 역사 기행의 관점에서 잊지 않을 것은 우리말 ‘구슬’과 과거 돌궐 사람들 그리고 塞種이라 불리던 유목민들이 활동하던 곳의 말 ‘카시(Kash)’가 뜻이 일치하고 음성적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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