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형에 관한 몇 가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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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형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8.16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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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㉑_ 유배형에 관한 몇 가지 오해

 

흔히 ‘귀양살이’로 잘 알려진 조선의 유배형은 중국 『대명률(大明律)』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이다. 사형(死刑)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유배는 기본적으로 종신형이었으며, 장100 유2천리, 장100 유2천5백리, 장100 유3천리의 3개의 등급이 있었다. 또한 죄가 무거울수록 거주지에서 더 먼 곳으로 유배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고, 유배길에 오르기 전에 장형 100대를 때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법률문화를 이어받았다고 하더라도 중국과 조선은 사회제도, 문화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유배형도 조선왕조의 상황에 맞게 적용, 집행하였다. 예를 들어 유배지를 선정할 때 중국에 비해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애초부터 『대명률』의 거리 규정을 그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에 규정을 만들어 유배인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유2천리는 600리 밖으로, 2천5백리는 750리 밖으로, 3천리는 900리 밖의 해변 고을로 유배 보내도록 변경했다.

사화와 당쟁의 와중에서 조선왕조의 많은 양반 관료들이 정치 무대에서 쫓겨나 고난과 역경 속에서 유배생활을 경험해야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형벌로서의 성격을 넘어서 조선왕조의 정치문화, 인물사 탐구의 일환으로 일찍부터 유배인과 유배문화에 대한 학자,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유배제도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나 편견이 적지 않은데, 오늘은 유배형에 관해 잘못 알려진 몇 가지 사실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수레가 아닌 말을 타고 이동했다

먼저 TV 사극을 보면 유배죄인들이 유배길에 오를 때 소달구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명백한 고증 잘못이다. 먼 유배길을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배죄인들은 어떻게 유배지로 이동했을까? 유배죄인들의 유배길 이동수단은 다름 아닌 말이었다.

유배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담은 19세기에 만들어진 『의금부 노정기(義禁府 路程記)』라는 책자를 보면 평균적으로 하루에 가야 할 거리는 80리 정도였는데, 이 같은 거리를 말이 아니면 어찌 가능했겠는가? 당시 여러 유배일기를 분석한 조선대 김경숙 교수에 따르면 역마(驛馬) 등이 제공되는 관직자들과 달리 벼슬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말과 기타 여행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자신을 유배지까지 압송해가는 압송관(押送官)에게 지출하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삼재도회』에 실린 함거(檻車). 샤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보면 조선왕조에서 공개 처형을 할 때 십자가를 세운 수레에 죄수를 태워 처형장까지 이송한다고 적고 있다.
김준근이 그린 정배 가는 죄인. 먼 길을 그림과 같이 계속해서 칼을 차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은 유배죄인이 유배를 떠나는 일반적 모습이라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소달구지가 끄는 수레는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을까? 중국의 한서(漢書)에서 이미 등장하는 이 수레는 함거(檻車), 혹은 수차(囚車)라고 부르는 죄수 호송용 수레로 조선왕조에서도 죄인을 처형장에 끌고 갈 때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관찰사도 유배 보내는 권한이 있었다

오직 국왕만이 유배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조선왕조에서 국왕은 최고의 재판관으로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국왕 이외에도 각도 관찰사는 양반 관리들이나 정치범을 제외한 관내 여러 형사 잡범을 직권으로 유배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유배라는 형벌은 국왕만이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유배를 크게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공경(公卿)·대부(大夫)를 안치하는 형태의 유배, 죄인의 친족을 연좌시키는 유배, 탐관오리를 법에 따라 도류(徒流)시키는 유배, 천류(賤流)·잡범(雜犯)을 지방에서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유배로 나눈 바 있다. 여기서 다산이 분류한 천류, 잡범이 각종 형사범죄에 연루되어 관찰사가 직접 다른 도로 유배 보낸 유배죄인들을 말한다.

 

평안감사가 조정에 올린 공문을 모은 『평안감영계록』. 평안도 지역에 유배 온 죄인들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규장각 소장.

평안도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한 문서를 모아놓은 『평안감영계록(平安監營啓錄)』을 읽어보면 순조 대에 평안도로 유배 온 죄수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국왕의 처분으로 중앙에서 유배 온 죄수들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도에서 평안도로 온 죄수들이다. 실제로 이들의 숫자를 분석해본 결과 후자가 훨씬 많았는데, 말하자면 유배죄인들의 다수는 국왕이 아닌 관찰사가 유배 보낸 형사 잡범들이었던 셈이다.

그럼 유배지 고을에서 이들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1797년(정조 21) 황해도 곡산부사에 부임한 다산 정약용의 경우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여 관내에 유배 온 형사 범죄인을 모두 같이 거주하게 하고, 화속전(火粟錢)으로 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게 한 바 있다. 유배죄인들은 유배지 고을 입장에서는 군식구였는데, 이들에 대한 대우는 지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살인범을 유배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이면 유배형은 양반 관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형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물론 정쟁에서 실각하거나, 역모에 연루된 관료 정치범들이 국왕의 처분에 따라 유배에 처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지식인으로서 유배지에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등 해당 지역에 커다란 학문적, 사상적 업적이나 자취를 남김으로서 우리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전라도 강진의 정약용, 흑산도의 정약전, 제주 대정의 김정희와 같이...

그런데 방금 살펴본 것처럼 이들 외에 평천민들도 유배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찬(官撰) 기록의 경우 아무래도 관리들에 대한 기록이 풍부한 반면 하층민에 대한 정보는 소략할 수밖에 없다. 또한, 양반들과 달리 평천민들의 경우 자신들의 일상을 글과 기록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에 평천민 유배인들의 유배지 생활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에서 관리들은 물론 평민, 천민들의 경우도 관찰사, 국왕에 의해 유배형의 대상이었음은 분명한데, 특히 살인범들이 감형되어 유배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정배안(定配案). 1895년 3월부터 1896년 4월까지 여러 지역에 유배된 죄인들의 죄목과 유배지 등을 기록한 책자. 규장각 소장.

조선시대에 살인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였기 때문에 살인범은 반드시 국왕의 재가를 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살인범이라 하더라도 사형 대신에 한 등급 아래 유배형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감사정배(減死定配)라 했다. 국왕 정조가 특히 이렇게 관대하게 처벌하였고, 그 이후의 국왕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근 부산대학교 문준영 교수는 『일성록(日省錄)』을 면밀히 분석하여 19세기 살인사건 재판의 특징을 추적하였다. 그는 19세기에 살인을 저질렀다가 사형에서 감형되어 각 지방에 감사정배, 즉 귀양 간 죄인 367명을 찾아냈는데, 이들 중 336명이 유배된 지 평균 5~6년 만에 유배지에서 풀려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흥미롭게도 살인범 중 적지 않은 수가 사형을 피해 유배되었고, 또 유배 이후 오래지 않아 해배(解配)되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유배는 종신형이었지만 중간에 풀어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또 위에서 본 것처럼 관리뿐만 아니라 평천민도 유배를 갔는데, 그중에는 살인범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배형은 전통시대 독특한 형벌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조선왕조의 처벌문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배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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