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중세 교황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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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중세 교황권의 역사
  • 장준철 원광대학교·사학
  • 승인 2021.08.0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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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서양 중세의 교황권: 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역사』 (장준철 지음, 혜안, 560쪽, 2021.06)

 

교황제도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발생했으며 현대 가톨릭교회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제도이다. 그러나 왕권적 힘과 권위를 속성으로 가지는 교황권은 중세의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이념이요 현상의 하나로서 중세적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서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가 사도의 군주에게 부여한 최고의 권위를 상속받는다”라고 명기할 정도로 수위권에 기초한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중세로부터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한 교황의 권위는 중세 시대에 교회와 세속의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 속에서 형성된, 즉 중세의 역사적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교황권 이념은 로마교회와 지역 교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교황 권력과 세속 권력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초월적인 권위를 지향하였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고대의 교회나 현대의 가톨릭교회와 다른 점은 교회 자체의 문제에만 관심을 국한하지 않고 세속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거나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로마주교인 교황이 주장한 수위권, 완전권, 보편적 권위를 세속 국가와 군주까지를 대상으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즉 교황은 교회의 수장일 뿐 아니라, 황제나 왕을 포함한 모든 세속 권력에 대해서도 우월권을 주장하였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중세 전성기의 교황들이 세속 권력과 끊임없이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첨예하게 대립하며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교황이 그리스도교 사회 내에서는 황제나 왕의 지위보다 더 높은 수위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군주라 할지라도 교회의 사법적 영역을 침범할 수 없었던 반면에, 교황은 각 국가에서 발생한 중대한 세속적 문제들을 ‘영적 재치권(spiritual jurisdiction)’의 범위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11세기 이후 중세 사회에서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서유럽 교회가 세속 사회에 그 영역을 확대해가면서 교황을 구심점으로 범 유럽적 정치 조직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이전에 페핀이나 카룰루스 마그누스(Carulos Magnus, Charlemagne, 742~814)와 같은 세속 권력에게서 받았던 도움과 후원에 안주하지 않고 독자적인 힘과 권위를 강화시켜가려는 끊임없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러한 교회 권력의 의지는 11세기에 표면화되기 시작하였고 13세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권력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성숙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첫째, 권력을 추구하는 교황의 권위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교회법적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합당한 근거를 토대로 하지 않는다면 교황권은 외부의 세속권력으로부터 허상이라고 공격을 받을 뿐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성직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정부는 끊임없이 교황권의 강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교회법의 법원을 발굴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였다. 11세기의 편집된 훔베르트의 『74주제 법령집』은 11세기 개혁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분명히 의식하고 그러한 주제에 맞추어 법령집을 구성하였다. 이후 개혁의 이념을 반영하고자 하는 교령집 편찬은 지속되어 나아갔다. 

둘째, 교회의 권력행사는 황제, 왕, 제후 등 세속권력의 후원과 도움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었다. 교황이 아무리 탄탄한 이론적, 교회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그의 권력을 행사하려고 할지라도 교황은 이를 현실 속에서 강제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을 소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와 제후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여러 지역의 세속적 문제에 간섭할 수가 없었다.

 

11세기 초반 3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란상을 종결시키기 위해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수트리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황제의 강력한 지원을 받게 된 클레멘스 3세는 교회 개혁 운동을 과감하게 추진하였고 돌출된 세속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게 되었다. 또한 11세기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등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한 노르만 족은 로마교회의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다. 반 교황파의 막강한 위력에 맞서서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61-73)는 노르만 왕국의 왕 로베르트 귀스카르트의 보호 속에서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한때 황제 하인리히 4세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독일 지역의 작센 지역 제후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제후들의 강력한 지원 때문이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중세 전성기에 교황들이 강력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근거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문제가 아닌 순전히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교황이 깊이 간여하는 모습은 교황이 단순히 성직자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정치인으로서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교황의 세속 정치적 활동이 정당한 것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중세 정치의 역사에서 로마교회와 교황의 역할과 비중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교황의 정치적 활동은 교황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사법적 영역을 중심으로 세속권력과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세의 정치는 황제, 왕, 제후와 같은 세속군주의 활동만을 따로 떼어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와 교황을 동시에 그 시대의 정치적 역할자로 여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세 교황권의 역사는 서양의 근대나 현대 시기와 분명히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11세기~13세기 중세 전성기(High Middle Ages)의 교황들이 그들의 활동 영역을 교회 내부의 종교적 범주에 국한하지 않고 권력을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행사하였으며, 마치 중세 유럽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처럼 행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결국은 로마교회와 교황으로 하여금 황제나 왕, 제후들과 같은 세속권력과 정치적 갈등을 야기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의 주도권이 사법관할권의 범위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나아가서 세속 사회에 대한 교회법의 구속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교황권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중세 세계의 정치적, 사법적, 법적 영역의 복잡한 관계를 들추어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사회의 긴장과 역동의 관계를 살펴보기에 가장 적합한 분야가 바로 교황권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준철 원광대학교·사학

현 원광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전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 오하이오 주립대학 대학원 수료. 캔자스 대학 교환교수, 미시간 주립대학 교환교수, 원광대학교 교수 역임. 원광대학교 박물관장ㆍ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ㆍ전북사학회 회장 역임. 연구서 - 『서양 중세교회의 파문』(혜안, 201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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