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면전(面前)에서 대상들의 세계는 어떻게 구축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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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면전(面前)에서 대상들의 세계는 어떻게 구축되는가?
  • 이종진 서강대학교·종교철학
  • 승인 2021.08.09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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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셰플러의 인식론』 (리하르트 셰플러 지음, 이종진 옮김, 도서출판하우, 282쪽, 2021.06)

 

본서의 독일어 제목은 『응답하는 형성으로서의 인식함』(Erkennen als antwortendes Gestalten, 2014)이다. 목차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본서는 ‘대상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통찰을 셰플러가 계속 발전시킨 내용이다. 이 책의 내용은 셰플러의 주저인 『현실과의 대화로서의 경험』(Erfahrung als Dialog mit der Wirklichkeit, 1995)의 내용 중에서 주로 칸트의 인식론과 관계된 부분을 셰플러가 20여 년이 흐른 후에,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요약해서 고쳐 쓴 것이다. 셰플러가 발전시킨 ‘초월철학적 인식론’은 그의 주저에서 개진된 ‘철학적 신론’과 ‘종교철학적 사유’, 특히 ‘종교적 경험의 해석학’의 맥락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기에, 역자는 이를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셰플러는 자신이 구상한 ‘요청적 신론’(postulatorische Gotteslehre)을 철학적 신론의 한 유형으로서 제안하고 있다. 셰플러는 요청이론이, 칸트에 있어서처럼 이성의 실천적 사용이라는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용의 맥락에서도 사유가능하다는 관점을 하나의 ‘필연성’으로부터 도출해내고 있는데, 그 필연성은 우리가 처한 오늘날의 다원주의적인 상황에서 연유한다. 바로 우리 시대는 단일한 과학적 세계상에 지배되던 칸트의 시대와는 달리 ‘경험세계들의 이질적인 형태’(Heteromorphie der Erfahrungswelten)를 그 특징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셰플러는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의 변증론(자기모순)은 그 실천적 사용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사용 안으로까지 계속해서 철저해질 수밖에 없음을 본다. 곧 이성의 이론적 사용 안에서 벌써 자아는 여러 개의 ‘자아들’로, 세계는 여러 개의 ‘세계들’로 쪼개짐으로써, 각기의 이념은 그 통일성을 상실하고, 그로 인해 포괄적인 경험맥락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성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칸트가 ‘주어진’(gegeben) 것으로만 전제했던 ‘세계’와 ‘자아’ 이념의 통일성을 ‘부과된’(aufgegeben) 요청 명제로 설정함과 함께, ‘하나의 통합된 역사’라는 제3의 이념을 추가하여, 이 세 가지 이념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칸트와는 달리 ‘신요청’(Gottespostulat)은 앞선 세 요청명제(세계, 자아, 역사의 단일성에 대한 요청들)를 가능하게 하는 최후의 조건으로서 사유되고 있다. 이는 ‘이론적인 이성신앙(Vernunftglaube)’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자아와 세계라는 이념들의 통일성이 위태롭게 됨으로써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이론이성의 ‘내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본서에서 제시된, 셰플러에 의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다시-읽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셰플러 철학의 두 번째 중요한 축은 그의 ‘종교철학’이다. 종교철학의 주제들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던 영역이다. 본서에서도 ‘지각함의 문화’라는 표제 하에서 특별히 ‘종교적인 지각의 고유성’에 대해 셰플러가 상론하는 것은 종교철학자로서의 그의 관심사 때문이기도 하다. 셰플러는 다양한 종교철학의 방법론들을 검토한 후에, 철학적 현상학과 경험적 종교학의 만남으로서의 ‘종교현상학’의 방법론을 종교적인 사안을 다루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앞선 종교현상학자들, 곧 루돌프 옷토, 막스 셸러, 미르치아 엘리아데 등의 종교현상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누구보다도 ‘성스러움’(das Heilige)의 구조를 천착한 종교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성스러움의 구조’란, 후설 현상학에 따라서, 종교적인 노에시스와 종교적인 노에마 간의 엄밀한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본서에서는 ‘특수하게 종교적인 지각의 문화’라는 표제 아래서 종교적인 노에시스와 종교적인 노에마의 고유한 내용들이 서술되고 있다(‘종교적인 지각’과 ‘성스러움의 그림들의 앙상블’). 

셰플러에 의해서 구상된 ‘철학적 신론’과 ‘종교적 경험에 대한 이론’은 밀접한 상관관계 아래서 이해되고 있다. 그는 칸트의 언사를 원용하고 있다: “철학적 신론(요청적 신론)이 없는 종교적 경험은 맹목적이고, 종교적 경험이 없는 철학적 신론은 공허하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자기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요청되고 있는 신의 현존이 한갓 개념의 구성물로 남지 않고 실존적인 삶을 지탱하는 ‘희망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적 경험을 통한 확증이 필요하며, 반면에 종교적인 경험이 중재하는 ‘성스러움의 선취적 현존’은 보다 보편적인 철학적 해석학 안에서 그 지시체가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신론’과 ‘종교적 경험의 인식론’을 이렇게 해석학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파악하는 것은 셰플러 철학의 독자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셰플러 철학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축은 ‘철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주제영역이다. 셰플러는 자신의 두 번째 대작을 이 주제에 헌정하고 있다: 『신학을 위한 철학적 사유의 훈련』(Philosophische Einübung in die Theologie, 3 Bd. 2004). 이 맥락 안에서 셰플러는 오래된 주제, 곧 ‘철학자들의 신과 종교인의 신은 동일한 존재인가?’의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 본서의 3부 마지막 장에서 등장하는 ‘자유롭게 만드는 자유’라는 신개념을 통해서 셰플러는 그 동일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론들의 존재론적인 신개념 내지는 신술어(Gottesprädikat)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현재 독일어권에서는 종교철학과 기초신학 분야에서 셰플러 철학에 대한 박사논문들이 계속 쓰이고 있고, 셰플러 철학을 둘러싼 학문적 토론의 결과물들 또한 여러 권의 책을 통해서 간행된 바 있다. 역자는 본 번역서를 통해서 국내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셰플러 철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종진 서강대학교·종교철학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인스브룩 대학교에서 신학석사, 독일 뮌헨의 예수회 철학대학에서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철학적 신론과 종교철학이다. 저서로는 Transzendenzbewusstsein und praktische Vernunft. Richard Schaefflers Hermeneutik der religisen Erfahrung(독일 Kohlhammer 출판사, 2004), 역서로는 『철학적 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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