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마녀, 그림 밖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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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마녀, 그림 밖 마녀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 승인 2021.08.09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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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서구에서 ‘마녀’의 탄생과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림은 종교적 상황, 민중의 광기, 정치적 목적 등과 오랜 기간 공모관계에 있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500년의 서구 미술사에서 화가들은 전설과 신화를, 민중의 믿음을, 예술적 이상을 저마다의 도상으로 담아냈다. 알릭스 파레의 『마녀, 유혹과 저주의 미술사』(미술문화, 2021)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미술사에서 마녀를 등장시킨 37편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지금은 할로윈 축제의 분장에 불과한 빗자루와 검은 옷, 원뿔 모양의 뾰족한 모자가 마녀의 상징물로 등장한 것은 16세기경이다. 중세 말 페스트와 종교 분쟁, 전쟁, 자연재해를 악의 존재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마녀를 만들어냈고 종교재판으로 나타났다. 1565년경 네덜란드의 대(大) 피터르 브뤼헐 같은 화가는 <사탄 숭배 집회의 죄악에 대하여>에서 마녀집회에 가기 위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녀, 숫염소를 그렸다. 그밖에 끓고 있는 솥단지와 주술서, 두개골, 검은 고양이와 뱀, 까마귀 등도 마녀의 특징이자 관련된 동물로 그림 속 단골 소재이다. 말하자면 마녀의 특징을 나타내는 도구들은 화가들의 완전한 창작물은 아니지만, 그것이 도상으로 만들어진 이후에는 마녀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민중들의 믿음을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마녀로 지목되어 종교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대체로 혼자 사는 고령의 여자인 경우가 많았다. 서구에서도 여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 그 이후에는 남편의 보호 아래 있었고 나이가 들어 혼자가 된 이후에야 자유와 독립을 얻게 되었는데 그녀들의 지혜와 연륜은 “여성을 감시받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했던 남성”에게 두려움을 넘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브뤼헐의 <뒬러 흐릿>(1563)에 등장하는 괴팍한 거인 노파도 나이 많은 시골 출신의 여성에 대한 동시대인의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미친 여자 흐릿’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종교적 목적에서 마녀가 지목되기도 하지만 여성혐오가 부정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종교적 담화와 결합하면서 마녀가 탄생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셰익스피어와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마녀도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어김없이 형상화되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세 마녀(“이렇게 시들고 옷차림이 난잡하여 산 자가 아닌 듯한 저것들은 무어란 말인가?”, 1막 3장)는 18세기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의 <세 마녀>부터 1899년의 오딜롱 르동의 <레이디 맥베스>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퓌슬리의 작품들이 런던에서 성공을 거둔 이래 『맥베스』의 상세한 지시문이 가능하게 한 장면은 초자연적인 주제가 막 태동한 낭만주의적 감성과 결합하면서 윌리엄 마셜 크레이그의 <맥베스와 유령>(1800)이라는 수채화 기법의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반면에 외젠 들라크루아의 <마녀들의 집회>(1831〜1833)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 특히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한 열광이 반영된 결과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1부에 나오는 발푸르기스의 밤은 들라크루아의 거칠고 빠른 붓질을 통해 두 개의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그렇다면 서구의 화가들은 무슨 이유에서 마녀에게 그토록 열광하고 그녀들을 그림으로 그렸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중세의 화가들은 종교적 신념 혹은 동시대의 믿음에 따라 마녀의 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화형대의 불이 꺼진” 이후에는 민중 신앙의 일부로 혹은 낭만주의 문학과 결합하면서 마녀를 ‘재발견’하였다. 특히 18세기 말 “자연이여 썩 꺼져라”라고 외치며 현실을 모방하는 대신 몽상과 환상에 매료된 퓌슬리, 19세기 말 현실의 환상과 단절되기를 원하며 비밀스럽고 주술적인 종교 서적에 심취했던 ‘나비파’의 폴 엘리 랑송은 예술에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마녀의 도상을 이용했다. 따라서 세기말 문학과 예술계를 강타한 데카당스가 마녀의 이미지와 종종 결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외젠 사뮈엘 그라세의 <황산을 끼얹는 여자>(1894)에는 마녀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비극적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인 버림받은 여자가 애인의 얼굴에 황산을 뿌리는 사회질서의 파괴자로서 혹은 팜 파탈로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마녀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도 여성혐오의 상징도 아니며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독립적이고, 남성중심의 사회적 질서에 저항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 ‘마녀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면서 키키 스미스, 오토니엘, 조스팽 같은 진보적인 여성 예술가들이 여성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과 편견에 맞서게 된 것은 마녀라는 주제가 사회를 반영한 결과이다. 마녀 혐의로 화형대에서 죽은 잔 다르크가 성녀와 구국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듯이 말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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