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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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매력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8.09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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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62)_ 말의 매력

 

“진실은 딱딱한 호두 속에 있다.” --- 세르비아 속담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코끝에 와 닿는 바람결의 감촉이 남달랐다. 절로 기분이 좋아져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기침하여 화분에 물을 주던 ‘마노라’가 어제가 입추(立秋)였음을 알렸다. 

나도 인간사회의 일원이지만, 사람들의 말솜씨는 정말 대단하다. 어쩌면 단지 바람이라는 몸통어에 결이라는 꼬리를 덧붙임으로서 바람결과 같은 멋진 말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니... 인간 존재와 인간이 지닌 창의력과 상상력이 더 없이 위대해 보인다. 봄날 살랑이는 물결, 그대 고운 살결, 꿈결만 같은 사랑, 잠든 아이의 숨결 등등 제대로 쓰인 언어는 마법처럼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21세기 지금 자신의 아내를 일러 ‘마노라’라 하면 메일 쇼비니스트(male chauvinist, 근거 없는 남성우월주의자)라거나 마초(macho)연 하는 우락부락한 남자 취급을 받겠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마노라는 ‘상전’을 부르거나 가리키는 높임말이었다. 

세월 따라 말은 변한다. 산스크리트어 lingam(남자의 생식기)이 중국사회에 유입되어 한자어 令監으로 음사되었는데, 이 말의 음가가 우리나라에서는 링감이 아니라 령감을 거쳐 영감으로 정착하였다. 그리고 의미는 생식기에서 시작해 성인 남자 일반을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시대 종2품·정3품 당상관의 품계를 가진 벼슬아치를 뜻하다가 급기야 근자에는 나이든 노인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자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오래전 어느 봄날 학회에 참석했다가 배우자의 호칭문제를 얘기하던 중 ‘자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솔직한(?) 나의 말에 대해 돌아온 반응은 황당하다는 표정이거나, “말도 안 돼!” 정도의 어조 불쾌한 말이었다. 아차 싶었다. 그러나 역시 조선시대에는 부부끼리 자네라는 말을 통상 썼다. 정감 어린 ‘임자’도 흔하게 쓰였다. 임자나 자네는 요즘처럼 낮춤말이 아니라 일종의 높임말로서 기능하는 좋은 말이었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말은 이렇듯 자칫 원뜻을 잃거나 비속어로 전락하기도 한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의 명소 “I am sterdam”(좌), 반 고흐 미술관(우)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the Netherlands)는 홀란드(Holland)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和蘭이라 표기한다. Holland라는 말은 ‘wood-land’라는 뜻의 고대 화란어 holtlant에서 파생되었다. 한동안은 Hollant, Hollandt 등이 혼용되었다. 민간어원에서는 ‘우묵한 땅, 저지대(hollow land)’를 가리키는 화란어 hol land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지만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朝鮮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훈독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살다 살다 무관중 올림픽 경기라는 걸 다 보게 되는데, 오늘은 마지막 날로 여자 배구 3, 4위 결정전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세르비아(Serbia)가 동메달을 놓고 다툰다. 발칸반도 지역 동유럽 국가에 속하는 세르비아는 단어 구조상으로는 ‘세르브의 땅(Serb + -ia)’이다. 현지인들은 스르비자(Srbija)라고 한다. 세르브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세르비아와 주변국가(좌),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하얀 도시) 전경(우)

거짓을 밝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지나간 역사적 사실의 진위나 모호한 점을 규명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고구려의 시조는 ‘선사자(善射者)’ 즉 명궁이라는 뜻의 부여어 이름 朱蒙으로 알려진 東明聖王이다. 보통 시조는 태조라는 시호(諡號)를 붙인다. 시호란 제왕, 경상(卿相), 유현(儒賢)이 세상을 뜬 뒤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여 추증(追贈)하던 이름을 말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 고려 태조 왕건, 명태조 주원장, 청태조 누르하치 등이 다 開國祖다.

특이하게도 고구려의 태조는 6대 국왕인 태조대왕(47~165년, 재위 53~146년)이다. 일곱 살에 보위에 올라 무려 93년이나 왕위에 있다가 100세에 퇴위하고도 20년 가까이 상왕으로 살다가 119세에 붕어했다. 장수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선뜻 믿기지 않는 건 왜일까?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 대(해)주류왕-민중왕-모본왕-태조대왕-차대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초기 왕의 계보 속에서 그가 유리명왕 또는 대무신왕의 아들인 古鄒加 高再思의 嗣子라는 대목과 생전에 그가 이룬 업적이 나라를 세운 것에 버금간다 하여 國祖王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의심을 키운다. 고구려의 왕성이 解氏에서 高氏로 바뀐 시점이 휘가 宮인 태조대왕 고어수(高於漱) 때다. 

高氏 집안인 태조대왕은 물론 그의 同母弟(삼국사기 기록) 혹은 장자(후한서 기록)인 차대왕(71~165년, 재위: 146~165년)과 신대왕(89~179년, 재위: 165~179년) 모두 장수한 것도 그러하려니와 반정을 일으켜 왕을 바꿀 정도의 실력을 갖춘 당시의 인물 또한 최고의 장수 유전자를 지녔다. 명림답부(明臨答夫, 67년~179년)라는 復姓의 사나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 제45 열전 제5에 실려 있다.

 

고구려 태조왕의 영토 확장 전투(좌), 명림답부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삼국사기(우)

그는 고구려의 태조왕·차대왕·신대왕 시대의 인물로 고구려의 초대 국상(國相)이다. 왕비족인 연나부(椽那部, 중국 사서에는 絶奴部) 명림씨 출신으로 하위관직인 조의(皂衣) 벼슬을 하던 그가 76세나 되어서야 아버지 태조왕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차대왕을 폭정을 이유로 들어 쿠데타를 일으켜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佰固)를 제8대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신대왕 2년) 국상에 임명되었고, 여기에 패자(沛者)직을 더해 내외 병마(兵馬)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梁貊)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후한(後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요격할 것인지 지구전을 펴 농성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는데, 淸野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예상대로 한나라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대파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가 106세라니 직접 추격전을 벌였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179년 9월 113세의 나이로 명림답부가 죽자 신대왕이 크게 슬퍼하며 7일간 조회를 파하고 직접 애도를 표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지냈다 한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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