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술탄은 여인을 오라하고, 조선의 왕은 여인을 찾아간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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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술탄은 여인을 오라하고, 조선의 왕은 여인을 찾아간다 ②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7.26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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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60)_ 이슬람 술탄은 여인을 오라하고, 조선의 왕은 여인을 찾아간다 ②

 

2. 엄상궁과 명성황후

 

權近의 陽村集 / 태종 2년(1402년)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제작하고 권근이 발문을 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피서용 閑談, 대머리 考 --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우연히 陽村 權近先生(1352~1409년)의 文集을 꺼내들고 책장을 넘기다가 진짜 우연히 재미있는 글(卷之二十一)을 발견했다. ‘동두(童頭)에 대한 설(說類童頭說)’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동두’란 대머리를 가리킨다. 대머리를 아직 어린 아해의 머리처럼 덜 자란 것으로 귀엽게 표현한 것이지 싶다. 중국인들은 대머리를 ‘光頭’라 하는데, 우리가 ‘빛나리’라 지칭하는 것과 유사한 정서가 느껴진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게, 과거 제왕들 중에 대머리는 없었을까? 그랬을 리는 없다고 본다. 시저는 대머리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머리 왕은 가발을 썼을까, 민머리를 그대로 노출시켰을까? 혹시 매일 아침 삭발을 했을까? 대머리인 것을 부끄러워했을까? 나는 40대 중반부터 머리가 야금야금 빠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휑하니 관목 몇 그루밖에 남지 않은 수풀로 쇠락해졌다. 오수를 방해하는 파리가 야속할 때 졸린 눈 크게 뜨고 읽으면 유쾌해질 양촌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계림(鷄林, 慶州의 옛 이름)의 金君 子靜(자정은 字)이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띠로 덮고는 동두(童頭)라 자호하였다. 묻는 이가 있으면 말하기를,

“내 얼굴이 광택이 나고, 나의 머리칼이 본래 드물었다. 내가 비록 잘 마시지는 못하나 혹 술만 있으면 청탁을 가리지 않고 사양치 않으며 취하면 모자를 벗고 머리를 드러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내 머리를 대머리라고 말하기 때문에 내가 이에 호(號)를 삼은 것이다. 대개 호라는 것은 나를 부르는 것이라, 나는 대머리이니 나를 대머리라 부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으랴. 사람들이 나의 모습대로 불러 주니 내가 그대로 받아 주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옛날에 공자(孔子)가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움푹하여 이것으로 이름과 자(字)를 지었다 하거니와, 형체가 지리(支離)하게 생긴 사람은 지리라 부르고, 몸이 곱추처럼 생긴 사람은 낙타(駱駝)라 불렀으니, 옛 성현이 형체로써 그의 호를 삼은 자가 또한 많았는데 내 어찌 홀로 사양하랴. 또 속담에 ‘대머리는 걸식(乞食)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복(福)의 징조가 아니며, 사람이 늙으면 머리가 반드시 벗어지니 또 어찌 장수(長壽)의 징조가 아니랴. 나의 가난이 걸식에 이르지 않고 수명 또한 명대로 살다 죽게 된다면, 내 대머리가 나에게 덕 되게 한 것이 어떠하겠는가. 부귀와 장수를 누군들 바라지 않으리요. 그러나 하늘이 만물을 낼 때 이빨을 준 자에게는 뿔을 주지 않았고, 날개를 준 자에게는 발 둘을 주었으며, 사람에게도 또한 그러하여 부귀와 장수를 겸한 자가 드물다. 부귀하고도 능히 보전하지 못하는 자를 내가 또한 많이 보았으니, 내 어찌 부귀를 바라랴. 초옥(草屋)이 있어 내 몸을 가리고 거친 음식으로 나의 주림을 채우니, 이와 같이 하여 나의 타고난 천명을 마칠 따름이라. 사람들이 이것으로 나를 호칭하고 나도 이것으로 자칭하는 것은 내가 대머리 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내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하도다, 그대의 뜻이 나와 같은 데가 있음이여. 나의 얼굴빛이 검어 사람들은 나를 작은 까마귀(小烏子)로 지목하므로, 나도 또한 일찍이 받아들인 바이다. 대머리와 까마귀는 외식(外飾)이 아니나 역시 외모로 말미암아 지목된 것이다. 하지만 속에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나의 소양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이다. 얼굴은 윤기가 흘러 아름다우나 사나운 자가 있으니, 어찌 용모로 그 진부를 단정할 수 있으랴. 김군은 심오한 학문과 민첩한 재능으로 조정에 벼슬한 지 여러 해라,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시종(侍從)의 직에 오랫동안 있어 명성이 크게 전파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원대함으로 기대하였으나, 그 마음이 매우 겸손하여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 초옥에서 평생을 마칠 것 같이 하니, 그 소양을 알 만하다. 이른바 ‘내가 비난할 것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 사람에 해당된 말이 아니겠는가.”

 

나는 머리를 친다. 만사를 여여하다 받아들이는 겸손한 생의 자세라면, 한 여름 무더위쯤이야 견딘다 말할 필요조차 없을 법하다. 

 

                  (좌로부터) 엄상궁, 명성황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생모 엄상궁

엄상궁(1854~1911년)은 일개 상궁이 아니었다. 1861년 평민 엄진삼의 장녀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입궐하여 아기나인을 거쳐 관례를 치른 뒤 정식 나인이 되어서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발탁된다. 시위상궁이란 몸종과 다름없는 존재로 지근거리에서 황후의 수발을 드는 궁녀다.

그녀가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22세라는 나이에 고종의 시중을 들다 승은을 입은 것이 발각 나는 바람에 궁궐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는다. 그러나 32세가 된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무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 직후 5일 만에 10년의 인고 끝에 다시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더니 마침내 1897년 후일 영친왕이 되는 황자 은(垠, 의민태자懿愍太子)을 출산한다. 출산 이틀 후 그녀는 정식으로 종 1품 귀인에 봉작되었다. 

가히 입지전적 성공이라 할 만하다. 뛰어난 지략에 결단력을 갖춘 그녀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귀인을 거쳐 순빈(1900), 순비(1900)로 차례로 진봉되고 1903년에는 결국 제1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겸양과 오랜 기다림, 그리고 살얼음판을 걷는 신중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왕비의 입장에서 보면 궁인은 모두 언제든지 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연적이었다. 문제는 조선의 왕비는 절대로 투기를 하면 안 된다는 도덕적 금기가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왕비는 내명부를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처소에서 그들을 벌주거나 처벌하는 경우가 있었다. 인현왕후가 후궁 숙원 장씨(장희빈)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만방자하다는 이유로 통명전 처소에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친 사건도 실은 내명부를 다스리는 왕비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명성황후는 완화군(고종의 서장자)의 생모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내쫓았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가 의친왕을 낳자마자 궁에서 쫓아냈다. 이런 일은 외형적으로는 분명 왕후가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속내는 누가 봐도 투기에서 비롯된 응징이다.

엄상궁은 1854년생으로 1851년생인 명성황후와 연배가 비슷한데다 명석하고 재간이 탁월했던 탓에 못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임금의 승은을 입은 궁녀는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와 그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뚱뚱하고 못생긴 엄상궁이 고종의 처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온 것을 목격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명성황후도 그 소식을 접하고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웃어넘겼으나 나중에 진상을 알고는 분노로 치를 떨며 직접 매를 들었다고 한다. 뚱뚱한데다 얼굴도 못 생겼으니 황제 곁에 두어도 탐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고종과 순종 황제 부자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엄상궁의 지략 덕분이었다. ‘아관(俄館)’이란 러시아 공사관을 뜻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로서아’(露西亞)라고 불렀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을 ‘아라사’(俄羅斯)라고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하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상궁이 자신의 시녀와 함께 가마를 한 대씩 타고 하루걸러 하루 꼴로 궁 밖 출입을 시작한다. 궁문을 지키는 일본 수비대는 철저히 가마를 수색하며 예의주시 했지만 엄상궁은 넉살좋은 웃음으로 수비대에 뇌물을 쥐어주면서 정기적으로 궁문을 드나들었다. 

파천을 감행하기로 한 날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일인지라 확인도 없이 수비대는 엄상궁과 시녀가 탄 가마를 통과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 고종과 세자 척(훗날 순종)을 나란히 태운 가마가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니 아관파천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그간 엄상궁의 궐 밖 행보에 대해 세간에서는 사대부를 동원해 뇌물을 걷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실상은 러시아 공사관을 오가며 고종의 거취 문제를 놓고 사전 협의를 진행한 것이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일본군을 안심시키고 뒤에선 아관파천을 계획한 엄상궁의 지략과 배짱이 대단하다. 이런 여인에게 고종은 ‘鮮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황귀비가 된 엄상궁은 끝내 황후가 되지 못하고 후궁으로서 생을 마무리하는데 이는 장희빈 사후 숙종이 후궁 출신의 여자는 왕후로 삼지 못하게 법으로 제정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엄상궁을 기억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에는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를 세웠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도록 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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