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문가주의, 시티즌십과 시민참여로 대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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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문가주의, 시티즌십과 시민참여로 대항하다
  • 이영희 가톨릭대학교·사회학
  • 승인 2021.07.2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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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전문가주의를 넘어: 과학기술, 환경, 민주주의』 (이영희 지음, 한울아카데미, 327쪽, 2021.06)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여러 측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대의제는 잘 작동하지 못하고 있고, 정당들 역시 사회갈등에 대한 민주적 중재자로서의 그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해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피로감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민주’ 자체에 대한 불신과 냉소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이 사회적 의사결정에서 주인, 혹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당연한 전제적 가치인데, 이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뿌리 깊다는 점이야말로 이 시대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민주’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부채질하는가? 바로 전문가주의이다. 전문가주의는 현대사회는 기술적으로 복잡하여 사회적 의사결정 역시도 고도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사회의 중요한 공적 의사결정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믿음체계이다. 전문가주의를 떠받드는 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짐에 따라 사회의 과학화, 기술화, 전문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점을 그 주요 근거로 제시한다. 사회의 과학화, 기술화, 전문화 경향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각종 공공적 의사결정에서도 과학기술적 전문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규범적으로도 또한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전문가의 역할을 제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과 전문가주의에 함몰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이다. 한 사회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구성원의 사회적 역할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현대사회는 과학화, 기술화, 전문화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복잡한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전문가 존중을 넘어서 전문가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며, 이는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다. 왜냐하면 엘리트주의를 그 내재적 속성으로 하는 전문가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회의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전문가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는 전문가와 기술관료의 지배력은 더욱 커지는 반면 각종 사회적 현안과 정책 결정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의 여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는 사회의 민주화가 점차 심화되고 확산되어 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 자체가 보다 과학화, 기술화되면서 일반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공적 의사결정에서 점차 소외되고 오로지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그러한 의사결정 과정을 독점하는 비민주성이 동시에 증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1970~80년대에 민주주의의 일차적인 적이 군부독재였다면, 이제는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바로 전문가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전문가 및 전문가주의의 역할과 민주주의의 전망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부는 과학기술/환경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전문성의 정치(politics of expertise)를 분석하는 세 편의 글들로 짜여 있다. 전문성의 정치란 현대사회에서 과연 어떤 집단의 전문지식을 사회적으로 가장 가치 있으며 믿을만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갈등적 경합 과정을 의미하는데, 통상적으로 전문가지식(expert knowledge)과 시민지식(lay knowledge)이 격돌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 인정투쟁 사례와 고준위 핵폐기물 공론화 사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사례 등을 통해 전문성을 둘러싼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제2부는 과학기술/환경/재난 시티즌십의 형성과 실천을 다루는 세 편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민들이 과학기술/환경/재난 관련 이슈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전문가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는가를 과학기술 시티즌십, 환경 시티즌십, 재난 시티즌십 등의 개념으로 분석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오염 파악을 위해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수행한 시민과학 활동, 돌진적 산업화 과정에서 시민 주도로 이루어진 다양한 환경운동,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회적 재난에 대한 거버넌스적 접근의 필요성 등에 대한 분석이 진행된다.

제3부는 시민참여, 공론화,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다섯 편의 글들로 채워져 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빈발하고 있는, 공공정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회갈등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그러한 공공정책 갈등의 현황 및 사회적 배경과 예방 방안을 보다 많은 시민과 이해당사자들의 참여 확대라는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을 필두로, 2015년에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상에 관한 세계시민회의, 신고리 5, 6호기 원전 공론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그리고 독일의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와 참여적 거버넌스 등을 숙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필자는 지난 30여 년간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관계를 연구해 왔는데, 언제나 연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갈수록 전문화, 기술화, 과학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는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전문가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전문화된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민주적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과 지식의 민주화를 위한 실행과 제도는 어떻게 실천되고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희 가톨릭대학교·사회학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기술사회학, 환경사회학, 지식/전문성의 정치와 민주주의, 시민참여와 공론화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강의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회장, 시민과학센터 소장,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포드주의와 포스트 포드주의』, 『과학기술의 사회학: 과학기술과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 『과학기술·환경·시민참여』(공저),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과학기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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