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돌보는 존재이자 돌봄을 받는 존재이다 - 『돌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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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보는 존재이자 돌봄을 받는 존재이다 - 『돌봄 선언』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1.07.2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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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80년대에 여중·고를 거쳐 대학을 다닌 나는 당연히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부지불식간에 내게 주입된 사회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교육을 받았으면 노동시장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전업주부가 되어 가사와 양육에 전념하는 것은 인생의 낭비이자 실패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따라 나는 강의를 하고 번역을 하며 계속 일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았다면 다들 그렇듯 일과 육아 사이에서 큰 고민에 빠졌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고 결국 무자녀 맞벌이 가정이 되었다.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집에서 자연사를 선택한 친정엄마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내가 돌봄 전담자, 독박 돌봄자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 돌보는 일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버지도, 각자의 가족과 일상에 빠져 있는 언니와 남동생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평생 당연하다는 듯 엄마의 돌봄을 받았으니 엄마의 마지막은 내가 돌봐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자식이 없는 상황이니’ 엄마를 돌볼 수 있는 거라고, 자신은 ‘자기 생활을 지키고 싶다고’ 하는 가족의 (몹시도 당황스러운) 말들을 들으면서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환자가 된 가족을 돌보는 일은 남에게 맡기고 가능한 한 기존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당시 우리 가족의 머릿속에 있던 공식 같았다. 기존의 생활은 밥벌이일 수도 있고 핵가족 경계 안쪽의 흔들리지 않는 일상일 수도 있었다. 돌봄은 뒷순위로 밀렸다. 돈이 되는 일도, 즐거움을 주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외출하거나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었으니까. 

『돌봄 선언』(니케북스, 2021)은 돌봄의 가치를 다시 정립하려는 선언을 담은 책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황폐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핵가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웃과 공동체가, 사회와 국가가 돌봄을 제공하는 방향이 제시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내용에 공감했다. 해결책인 시스템 재편에 대해서는 좀 고민스러웠다. ‘정부가, 혹은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해결책이 나올 때마다 ‘그럼 그때까지 그냥 손 놓고 기다리면 된다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일단은 우리 각자가 돌봄을 받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 PCR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신청서를 나눠주고 안내하던 분, 신청서를 걷으면서 전화번호가 정확한지 확인 전화를 해주는 분, 별 고통 없게끔 조심스럽게 콧구멍에서 검체를 채취하는 분의 돌봄을 받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체를 분석한 분, 다음날 신속하게 결과를 문자로 전송해준 분도 나를 돌봐주었다. 내가 먹는 것 하나하나, 쓰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누군가의 돌봄으로 가능하다.

어디 사람뿐인가. 요즘처럼 뙤약볕이 뜨거울 때 길가의 무성한 가로수 그늘이 나를 돌봐준다. 벌과 나비가 돌봐주지 않았다면 과일 하나, 곡식 한 톨 내 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의 커다란 특징은 돌봄의 범위를 사람을 넘어서 자연과 환경, 지구까지 확장시킨다는 데 있다. 돌봄의 가치에 환경 운동까지 포섭되는 것이다.

돌봄 개념을 끌어온다고 해서 덜 소비하면서 더 불편하게 사는 삶이 얼마나 설득력을 제고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더 누리고 편하게 사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이라는 자본주의 공식을 돌봄이 과연 깨뜨릴 수 있을까. 그래도 잘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 한심한 노릇일 게다.

내가 알든 모르든 수많은 존재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것, 그러니 나 역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한 모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이다. 고등교육을 받고 전업주부로 사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돈으로 환산조차 어려운 돌봄의 가치를 전방위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니.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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