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고: 인문학 대변자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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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인문학 대변자 구함!
  •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 승인 2021.07.2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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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준 칼럼]

대한민국에 인문학을 대변하는 사회세력이 있는가? 인문학 연구자 그룹이 거기에 해당되는가? 인문교양 공론장 참여자들이 거기에 속하는가? 정기적 독서층이 거기에 해당되는가? 힐링인문학, 인문학 이벤트 소비자들이 거기에 속하는가? 인문학 출판관련 종사자들인가? 일정한 규모의 그룹으로 범주화시킬 수 있는 수준에서 보면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적 사유와 인문문화를 형성하는 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수준의 물적·인적·상징적 자원의 유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앞서 언급한 그룹 중에 인문학을 대변하고 인문문화를 주조하는 사회세력은 없다. 베블런(Veblen)이 볼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먼저 베블런하면 베블런 효과만 떠드는 순진한 사람들의 입술을 더 이상 쳐다보지 말자고 제안해야겠다. 우리가 봐야할 베블런의 진짜 얼굴은 진지한 사상가적 면모에 있다.

왜 뜬금없이 베블런인가? 베블런은 인문학의 대변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며 사회의 인문화, 인문문화 역할의 중요성을 계급 내적인 측면과 계급 외적 곧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언급하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약탈을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구조’로 전제하면서 역사를 유한계급에 의한 약탈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는 문명비판적 관점에서 역사를 약탈문화 변형의 전개 과정으로 이해한다. 약탈문화에서 무기, 파괴력, 공격행위는 명예를 쟁취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노동과 경제활동은 자연스럽게 불명예스러운 것, 수치스러운 일이다. 약탈의 결과인 부(富)는 최고의 명예로운 것인데 약탈문화가 금력과시 문화(pecuniary culture)로 이행하면서 부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문화에서 부는 단순히 과시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회적 지위, 존경을 획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한계급의 부를 활용해 존경과 명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단순히 최고학력자본의 획득과 문화교육 기관의 설립을 통한 사회서비스 제공에만 있지 않다. 그들은 유사학문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획득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문학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인문문화의 운반자이자 확산자 역할을 한다. 특히 고전문화와 ‘고전’의 수호자이자 보존자 역할을 수행한다. 비록 계급 간, 계급 내 명예와 명성 획득을 둘러싼 내적 동기가 결정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명예획득 전쟁은 지나가는 한 시대의 바람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인문문화 지형을 형성하고 문화적 유전자를 만들었다. 유럽 근대의 문예공론장의 주인공 중 하나가 인문엘리트 부르주아지, 소위 문화귀족이었다. 유럽얘기고 미국얘기다.

이제 묻는다. 왜 우리 사회는 문화귀족형 유한계급, 인문엘리트 부르주아지가 없는가? 개발시대에 집단적으로 출생한 졸부들은 인문학을 괴물취급하고, 기껏해야 그 그룹의 일부만이 취미생활을 위한 인문학을 흉내 내는 실용서에 잠시 눈을 돌리는 정도다. 왜 우리 사회의 유한계급은 지적 허영심마저 없는지... 인자함이 넘쳐서 쁘띠부르주아지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유한계급은 명예와 명성을 획득하는 방식이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교양의 축적에 있지 않고 부동산 취득 쟁탈전의 승리에 있다는 것을 육화했다. 개발시대가 낳은 천민자본주의 논리와 그것에 수혜를 입어 탄생한 속물 유한계급이 문화귀족, 인문엘리트 부르주아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개발시대가 만든 유한계급의 후속세대가 다시 후속세대를 낳는 계급 재생산과 계급 고착화 징후들이 농후한 지금이라는 시대에 인문학을 대변하는 유한계급의 탄생을 고대해본다. 실용지식을 폄하해도 좋다, 유한계급아. 고전도 읽고 예술교양도 쌓자, 좀 아우하고 품격 있고 고상한 척도 해보자. 유사학문활동, 유사예술활동 좀 하자, 유한계급아. 계급의 지표로 니체(Nietzsche)도 넣고, 에곤 실레(Egon Schiele)가 싫으면, 마네(Manet) 말고 모네(Monet) 넣어보자. 오해는 금물! ‘인문학 민주주의’에 대한 반기도 아니고 인문엘리트주의도 아니다. 유한계급 옹호나 만능론도 아니다. 인문학 낙수효과에 대한 낭만주의도 아니다. 유한계급의 인문학 대변이 자칫 계급지배의 심미화 역할, 보수가치의 은밀한 전파자 기능을 수행할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러한 걱정은 지금 사치다. 우리 사회의 유한계급은 땅은 있으되 철학은 없고, 아파트 벽을 채우는 소품용 가짜 그림은 있어도 인문예술교양은 없다. 그래서 기대한다. 허위의식과 장식효과를 위한 것이라도 인문학 대변자인양 허세 좀 부릴 시간이 다가오기를. 그 허세의 꽃은 진정한 인문문화 시대, 진실한 인문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여러 꽃 중의 하나지만 반드시 필요한 꽃이 될 것이다.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한남대학교 탈메이지교양교육대학 철학교수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아도르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중앙대, 한국외대 등에서 강의했고 연세대 철학연구소 전문연구원을 지냈다.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한국동서철학회 부회장, 대전인문예술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교수신문, 금강일보 등에서 칼럼을 쓴 바 있고 <대학지성 IN&OUT>의 편집기획위원이며 고정칼럼을 연재 중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 전문 연구자로서 연구서인 <부정과 유토피아>(2019), <아도르노의 문화철학>(2007),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2011)을 저술했고 소개서로는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2007),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2016)을 썼다. 이 밖에 세종우수학술도서와 세종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책을 포함 다수의 인문교양 도서와 공저를 출간했으며 60여 편의 전문 학술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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