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 경쟁 =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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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 경쟁 = 공정”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1.07.2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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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_ 대학직설

“능력에 의한 경쟁이 공정”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정치인이 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확대, 특히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른 자산 불평등의 가공할 심화를 가속화하는 사회질서,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기는커녕 그것에 기대어 이득을 얻는 기득권 세력 또는 기성세대와 그들이 구사하는 갖가지 불공정한 장치에 대항한 반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공정’의 강조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 같은 요인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거나 위임받은 권력을 사사로운 목적에 사용한다거나 많은 자산이나 높은 소득이 있음에도 합당한 세금을 내지 않는 등 불공정한 제도들과 절차들이 곳곳에 남아 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이런 부당한 관행들을 숙정하는 일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계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 정치인의 승리를 온전히 불합리하고 부정의한 기존 질서에 대한 탄핵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더 많은 보상을 또는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은 ‘능력주의(meritocracy)’로 불리며, 1960년대 이후 서구 사회들에 확산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수성가(自手成家), 입신양명(立身揚名)’ 등의 전통적인 구호에서 보듯 서구사회들에서보다 훨씬 앞서 자리 잡았다. 능력주의는 더 능력 있는 사람은 사회에 더 많이 공헌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이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은 타당하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유익하다는 논리에 기초한다. 여기서 ‘기회의 평등’은 인민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부합하며,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들에서는 능력주의 세계관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능력주의자들의 ‘능력에 따른 보상’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능력’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젊은 야당 대표는 이른바 ‘토론 배틀’이라는 경쟁을 능력 선별 절차로 사용하는데, 이것이 정치인의 역량과 덕목을 적절하게 판별할 수 있는 장치인지는 의문이다. ‘수능 성적으로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것이 공정한 제도’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는데, 시험제도는 학생의 창의적(!) 능력을 측정하기에 적합한 제도라고 할 수 없다. 또 능력의 차이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상의 차이로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5억 원의 소득자가 5천만 원 소득자의 10배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보상의 결정에는 능력 이외의 다른 요인들이 (아마도 더 많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에서 능력주의는 허구이다.

‘재능이 있고 노력하는 사람은 성공한다’는 겉보기에 민주적이고 공정한 능력주의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주술을 건다. 기회의 사다리는 모두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다. 남이 올라가면 나는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모두를 서로 밟고 올라가야 하는 적으로 만든다. 능력주의 질서에서 연대나 협력 같은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사회의 분열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높은 지위나 많은 보상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기회의 사다리’가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도 아니다. 대등한 재능을 갖고 대등하게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다른 이유가 없다면) ‘운 좋게’ 높은 지위나 소득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모두가 올라가겠다고 경쟁하는 사다리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를 금지한다. 누군가가 높은 지위나 많은 부를 얻었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의 결실이며, 그런 것들을 얻지 못한 사람은 재능이 없거나 노력하지 않았거나 또는 둘 모두이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고 사회 불평등을 옹호하기 위해 호출하는 알리바이가 되었다. 그리고 ‘기회의 평등’은 강조하면서도 ‘결과의 평등’은, ‘지금 당신의 상태는 당신의 책임이다’는 저주와 함께 불공정한 것으로 규탄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재능과 노력을 인정받은 ‘성공한’ 사람들이 ‘공정’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법에 정한 임기를 중도 사임하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전(前) 검찰총장까지 ‘공정과 상식으로 미래를 만들겠다’고 외치고 있다.

‘능력주의’는 원래 1950년대 말 영국에서 ‘능력’이 산출하는 불평등을 풍자하는 경멸적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사족이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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