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소요유」가 아닌 「인간세」부터 읽어야 한다!”
상태바
“『장자』는 「소요유」가 아닌 「인간세」부터 읽어야 한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7.18 1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왕보의 장자 강의 | 왕보 지음 | 김갑수 옮김 | 바다출판사 | 436쪽

 

이 책은 장자라는 한 인물의 철학 사상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지만,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마치 장자의 의식의 흐름을 좇듯 감성적이고 치밀한 해석을 제시한다. 저자 왕보王博는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문명사회 속에서 살아야 했고,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면서도 그 사회를 떠날 수 없었던 자기 모순적 인간 장자를 만나려면 기존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장자』에 대한 주석이 자유롭게 노닐며逍遙遊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험이라는 궁극의 깨달음과 도통道通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왕보는 장자가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과정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인간 장자의 맨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장자에 대한 왕보의 새로운 독법은, 장자에게 신선의 탈을 씌운 「소요유」를 전략적으로 해석의 끝에 배치하고, 대신에 「인간세」로 포문을 여는 것이다. 장자가 「인간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가 보고 느낀 “이 세상과 사람들”이다. 왕보는 다른 일반적인 철인들이 정치 질서를 사고의 중심에 둔 것과 달리, 장자의 사고는 주로 난세 속에서의 생명의 안정에 중심을 두었다고 본다. 왕보가 장자를 「인간세」로 시작해서 다시 읽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왕보가 이 책에서 검토한 것은 인간 장자와 그의 철학이지, 『장자』 철학에 대한 것이 아니다. 즉, 그의 관심은 사람이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보는 장자의 내면과 철학에 좀 더 밀착하기 위해 『장자』에서 장자가 직접 썼다고 알려진 내편 일곱 편(「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만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내편의 순서는 「소요유」로 시작하여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소요유」는 장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취지이자 『장자』라는 책의 지향점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왕보는 지금까지 자연적으로 정해진 순서, 즉 「소요유」로 시작하는 순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해를 찾는다. 왕보는 “소요는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종점이지 출발점이나 시발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왕보가 이 책의 시작을 「인간세」로 여는 것은 「소요유」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실제적으로 장자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보는 「인간세」가 일곱 편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심축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하나의 기가 관통하듯 중심부가 돌아가면서 온몸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왕보가 볼 때 「인간세」는 내편 일곱 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혈류이고, 중심 고리이다.

왕보는 「인간세」의 서술 구조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장자의 사고와 해결의 논리적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세」는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진입하려고 하는 인물 안회顔回로 시작하여, 세상의 고난과 어찌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인물 섭공葉公 자고子高와 안합顔闔를 거쳐, 이 세계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초나라의 광인 접여接輿의 우화로 끝을 맺는다. 왕보는 장자에게 있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은 개인의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으로 바뀌고, 열정은 냉철함으로 바뀌며, 늠름함은 어찌할 수 없음으로 바뀌고, 안회는 초나라 광인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유가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현실 속의 사람”을 분명하게 의식했고, 이 점은 장자 사상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유자들과 달리 장자는 의식적으로 세상의 부름을 거절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또 들어가는 것도 아닌 것.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그것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세상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장자가 선택한 방식이다.

세속과 함께 살아가는 부득이함을 발견한 장자. 몸은 여전히 인간 세상에 있고, 여전히 운명의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은 장자. 장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세계에 뿌리박고 있었다. 왕보는 어떤 좋은 철학도 공허한 상상으로부터 나올 수 없고, 생명을 주제로 하는 철학은 더욱더 그렇다고 말한다. 생명에 관한 철학은 반드시 생존이라는 절실한 느낌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 세상 속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왕보는 소요나 제물 등을 너무 강조하면 독자들이 종종 장자를 너무 대범하게 볼 것이라고 우려한다. 중요한 것은 대범함의 배후에 있는 것, 그 육중하고 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 육중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대범함에 대한 추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왕보가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간세」부터 시작한 이유이다.

왕보는 중국의 저명한 사학가 천인커陳寅恪 등이 사용한 “동정적 이해”를 언급하면서, ‘동정’은 바로 마음으로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고, 그것은 또 자기를 다른 사람의 처지에 놓고 그가 겪은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정신적인 융합과 묵계(말 없는 소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보는 “동정적 이해”라는 마음가짐으로 인간 장자와 장자 철학에 대한 예를 다했으며, 이로써 장자 읽기의 새로운 진면목을 보여 주는 데 해설자로서의 진심을 좀 더 드러낼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