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대중들의 거리 정치, 대안적 민주화 기획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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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대중들의 거리 정치, 대안적 민주화 기획을 위하여
  •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정치학
  • 승인 2021.07.1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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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 (김정한 지음, 후마니타스, 196쪽, 2021.05)

 

올해로 1991년 5월 투쟁이 30주년이 되었다. 대중과 폭력은 석사 논문을 다듬어서 1998년에 출간되었다가 언젠가부터 절판되었는데, 1991년 5월 투쟁을 최초로 다룬 학술서로 평가되어 30주년에 맞춰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었다. 20대에 출간한 책을 50대에 재출간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어서 개인적으로도 소회가 남다르다. 돌이켜보면 1991년 5월 투쟁은 내게 공부의 화두와 같았다. 박사 논문에서는 1980년 5.18광주항쟁을 연구했지만, 대중들의 거리의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화두는 동일했다. 

1991년 5월 투쟁은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4월 26일부터 시작되는데,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 여당(민자당)의 승리로 5월 투쟁이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보면 50여 일 동안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고, 5월 18일에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시작한 대책회의 지도부가 명동성당 농성을 해제하는 6월 29일을 종결점으로 보면 60여 일이 된다. 그래서 초판에서는 50여 일이라고 했던 것을 개정판에서는 60여 일로 수정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1987년 6월 항쟁에서 명동성당 투쟁이 중요한 거점의 역할을 했던 것을 본받은 것인데, 얄궂게도 1991년 5월 투쟁은 6월 29일에 6·29선언을 규탄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30주년을 맞이해 1991년 5월 투쟁에 관해 관련 추모단체들만이 아니라 학계와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크고 작은 행사를 마련하는 등 많은 관심이 일어났다. 그 주요 담론들 가운데 하나는 5월 투쟁에 대한 기존 연구가 패배 담론, 또는 패배주의적 평가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승리 담론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월 투쟁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본격화된 보수적 민주화를 저지하려는 것이었고, 전체적인 주요 목표는 ‘노태우 정권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5월 투쟁은 실패했다. 실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어떻게 패배 담론이나 패배주의가 되는 것인지 의아하다. 5·18에서 시작된 전투적 민중운동이 5월 투쟁을 계기로 실추했다면, 그 과정에 대해 성찰하면서 오늘날 더 나은 사회운동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사유가 필요할 것이다. 

패배 담론의 반대가 승리 담론이다. 다른 맥락에서 보면 5월 투쟁에서 성과는 있었다. 민자당 온건파(김영삼)와 신민당(김대중)은 노태우 정권 타도가 아니라 공안통치 분쇄와 내각제 개헌 저지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확정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5월 22일 공안통치를 주도한 노재봉 국무총리 사퇴, 5월 25일 4개 부처 장관 경질 등 내각 개편(정원식 국무총리 임명), 5월 28일 민심수습대책 발표(내각제 개헌 포기) 등으로 사실상 성과를 거두었다. 그에 따라 5월 투쟁 과정에서 민자당 내 강경파와 대립한 온건파, 신민당 등 대통령 직선제를 선호했던 세력은 차기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며 실제로 5월 투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회운동 내의 비판적 지지 세력도 광역의회 선거에서 여당을 투표로 심판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5월 투쟁 과정에서 정치적 이익을 취한 이들에게는 5월 투쟁이 성공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이 1991년 5월 투쟁의 최대 수혜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5월 투쟁에서 확보한 그들의 정치적 이익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의 민주정부들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6월 항쟁 이후 지속적으로 민주화가 성공했다는 승리 담론의 배경이다. 즉 민중운동의 패배 담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화 승리 담론 때문에 1991년 5월의 서럽고 처절한 투쟁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망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보수 독점적 양당체제가 확립되었다는 점만 상기하더라도 민주화 승리 담론은 과장되어 있다.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른바 ‘87년 체제’는 1991년 5월 투쟁까지 약 4년 동안만 짧게 존재했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5월 투쟁의 실패는 1990년대 이후 기나긴 비혁명의 시대로 이어졌다.
 

1991년 5월18일 서울역 앞에서 열릴 예정이던 고 강경대 씨 노제가 경찰 봉쇄로 무산되자, 시민과 학생 7만여 명이 마포 공덕동 로터리로 장소를 옮겨 행사를 치르고 있다.

19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정치적 대표성을 민주파(민자당 온건파와 신민당)가 성취했던 것처럼, 2016~17년 촛불항쟁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정치적 대표성도 더불어민주당이 성취했고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촛불항쟁의 힘으로 탄생한 촛불 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는 정치개혁에 실패하고 있고 사회적 양극화를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후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창당해 본래 취지를 훼손한 것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기업보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대중적인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1991년 5월 투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민주파가 정치적 대표성을 독점해온 민주-반민주 구도의 민주화 기획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대안적 민주화 기획이 요청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국가에서 탈주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면 유효한 대안은 여전히 국가의 민주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권력이 존재하는 모든 수준에서 정치적 대표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무력화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대표의 틀을 재구성하면서, 동시에 정당 정치의 차원에서도 기존의 대표의 틀을 벗어나서 실질적인 대표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사회운동이 퇴조하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서 그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인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새로운 선순환을 개시할 수 있는 대안적 민주화 기획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1년 5월 투쟁에 관한 비극적 인식의 한가운데에는 수많은 열사의 분신이 있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이었고,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혼란이 있었고, 그에 대해 대중들이 공포(두려움)를 느낀 면도 있다. 예를 들어, 유서대필 사건은 검찰의 명백한 조작이었는데, 그에 대해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거나 거짓 조작을 믿고 싶어 했던 것에는 그런 혼란과 공포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5월 투쟁의 참여자들 중에서 그 정치적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라는 386세대 이후의 세대로서 1991년 5월 투쟁을 겪은 이들이 기존 민중운동의 한계와 운동 문화를 반성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민주화 담론의 지평을 확장하는 이론적, 실천적 활동에 참여했다. 1991년 5월 투쟁의 정치적 경험이 수많은 연구자, 활동가들에게 삶과 운동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는 점도 기억되기를 바란다.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정치학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문화과학』 편집위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대중과 폭력-1991년 5월의 기억』,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알튀세르 효과』(공저), 『너와 나의 5·18』(공저), Korean Memories and Psycho-Historical Fragmentation(공저), Toward Democracy: South Korean Culture and Society, 1945-1980(공저) 등이 있으며, 국역서로 『폭력의 세기』,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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