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과 매품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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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과 매품팔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7.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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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⑳_ 장독과 매품팔이

 

수령의 형벌권과 매질 관행

“횟수는 줄이되 대신 맵게 쳐라!”

위의 표현은 조선후기 지방고을 수령들의 업무지침서로 만들어진 목민서 『치군요법(治郡要法)』에서 제시하는 수령의 형장(刑杖) 사용 노하우이다.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때 가능하면 매질 횟수는 줄이는 대신 타격 강도는 강하게 하라는 조언이다. 

조선시대 수령들은 행정 외에도 고을에서 일어나는 민,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재판까지 맡았다. 재판 결과 수령이 스스로 집행할 수 있는 형벌의 상한은 태형(笞刑) 50대까지였는데, 이보다 무거운 벌이 필요한 중대 사안은 수령이 자체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반드시 상부 관청에 보고하여 그 처분을 따라야 했다. 따라서 수령이 관찰사의 허가를 받지 않고 태형 50대 이상 집행하는 것은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한국민속촌에 전시되어 있는 각종 형구와 형장.

그럼 고문은 어떤가? 당시 중죄를 지어 증거가 명백한 피의자가 자백하지 않는 경우 고문을 할 수 있었다. 고문할 때에는 신장(訊杖)이라는 매로 정강이를 30대까지 칠 수 있었는데, 이 신장 30대를 면하려면 장형(杖刑) 100대에 준하는 속전(贖錢), 즉 속죄금을 내야 했다. 볼기를 때리는 회초리 모양의 태, 장에 비해 고문할 때 정강이를 치는 신장이 훨씬 강력했던 것인데, 따라서 수령은 고문을 할 때에도 반드시 관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처럼 당시 규정상 조선왕조의 수령은 형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위의 『치군요법』의 조언은 수령이 형벌을 남용했다고 탄핵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형장 집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안되었고, 실제로 매질을 매우 맵게 하는 편법을 동원하여 형장 집행의 강도를 높이는 수령들이 적지 않았다.

장독(杖毒)과 장폐(杖斃)

앞서 본 것처럼 고을 수령이 형장을 집행할 때 몇 대를 치는가도 중요했지만 매질의 강도도 문제였다. 일례로 제일 가벼운 형벌인 태형이라 하더라도 죄인의 몸 상태와 매질하는 아전인 집장사령(執杖使令)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때론 큰 후유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수령이 매질할 때 절대 죄인에게 중상(重傷)을 입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수령이 장독(杖毒)을 치료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 『목민고(牧民攷)』에서도 죄질이 그리 나쁘지 않은 죄인에게 매질하여 행여 중상을 입혀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식사를 하여 원기가 충만해지는 오전 10시 전후에 형장을 집행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하지만 사나운 형벌을 좋아하는 수령은 죄수에게 매질하기 전에 붉은 곤장[朱棍]으로 먼저 매질하는 사령(使令)의 복사뼈를 때려 땅에 넘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매를 맞은 사령이 악에 받쳐 죄인에 대한 매질을 더욱 가혹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춘향전』의 변사또처럼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사령에게 직접 내리기도 했다. “여봐라! 그년에게 무슨 다짐이 필요하리. 묻지도 말고 형틀에 올려 매고 정강이뼈를 부수고 물고장(物故狀)을 올려라!” 여기서 물고장이란 죄인이 매를 맞아 죽었다는 보고서를 말하는데, 죽을 때까지 모질게 고문을 하라는 의미이다.

 

전북 남원의 춘향테마파크 속 남원부 감옥 모습.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의 왼쪽 옥사에 이도령이 칼 찬 춘향을 상봉하는 장면이 나온다.

춘향은 운 좋게 화를 피했지만 당시 관아에서 매를 맞고 난 후 장독(杖毒)이 올라 죽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렇게 형장을 견디지 못해 죽는 것을 장폐(杖斃), 혹은 물고(物故)라고 하였다. 고을에서 이 같은 일이 종종 있었는데, 특히 역모를 다스리는 조정의 추국(推鞫) 현장에서는 죄인이 장폐되는 일은 더욱 빈번했다. 실제로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사건으로 관련자들을 추국할 때 40일간의 추국과정에서 60여 명이 심문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40여 명이 처형되거나 물고되었다. 당시 고문을 당해 위독한 죄인에게 응급조치를 위해 소금을 구해 입과 항문에 밀어 넣었으나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매품팔이의 비극

앞에서 본 것처럼 죄를 지어 관아에서 매를 맞는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매질 횟수가 적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후기에 돈을 받고 매를 대신 맞아주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들 매품팔이가 법적으로 허용된 적은 없었지만, 여러 고을에서 암암리에 행해졌던 것 같다. 

『흥부전』에서 본읍의 김좌수(金座首)란 인물은 흥부에게 돈 삼십 냥을 줄 테니 감영에 가서 매를 대신 맞고 오라는 제안을 한다. 흥부는 삼십 냥을 받아 열 냥은 양식을 사고, 열 냥은 반찬과 나무를 사고, 그래도 남는 열 냥으로 매 맞고 와서 몸조리할 요량으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여 감영에 간다. 하지만 마침 조정에서 죄인을 석방하라는 사면령을 내려 흥부는 매품을 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 성대중이 1763년 통신사 조엄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을 때 그곳의 유학자 미야세 류몬(宮瀨龍門)이 그린 초상화이다.

끝내 매품을 팔다 죽는 일도 있었던 듯하다. 정조, 순조 대에 활동한 성대중(成大中)이 쓴 야담집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형조(刑曹)에서는 장(杖) 백 대에 속전(贖錢)이 일곱 꿰미였고, 대신 장을 맞는 자도 일곱 꿰미를 받았다. 매품팔이로 생활하는 어떤 자가 한여름에 하루 백 대씩 두 차례나 볼기 품을 팔고는 돈꿰미를 차고 으스대며 집에 돌아왔다. 그의 아내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백 대 맞을 돈을 또 받아 놓았소.”
남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오늘은 너무 지쳤어. 세 번은 안 돼.”
하였다. 아내는 탄식하며,
“당신이 잠시만 힘들면 우리는 며칠을 배불리 먹으며 잘 지낼 수 있고 게다가 이미 돈까지 받아 놓았는데, 못 맞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는 곧 주안상을 차려 와서 남편에게 먹였다. 남편은 취기가 돌자 볼기짝을 쓰다듬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그리고는 형조에 가서 장을 맞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동네 사람들은 모두 욕심 많은 그의 아내를 미워하고 따돌리며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결국 길에서 빌어먹다가 죽고 말았다.

다산 정약용은 고을 수령이 성색(聲色), 즉 호령과 무서운 표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말단의 방법이며, 형벌로써 사람을 바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또한 수령이 한때의 분한 마음으로 형장을 함부로 시행하는 것은 큰 죄이며, 옛날의 어진 수령은 반드시 형벌을 너그럽게 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위의 『청성잡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루에 무려 세 번이나 매품을 팔다가 결국 죽고 만다. 굳이 다산의 말을 상기시킬 필요도 없이 매를 맞다가 죽는 일은 비극적인 사건임에 분명하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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