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과 유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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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무질과 유럽 문화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7.1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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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52강〉_ 신지영 고려대 교수의 「로베르트 무질과 유럽 문화」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52강 신지영 교수(고려대 독어독문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로베르트 무질과 유럽 문화

신지영 교수는 “20세기 문학의 삼위일체” 가운데, 조이스나 프루스트에 비해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어려운 작가”인 무질(Robert Musil)의 대표작이자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근대의 고전”으로 불리는 소설 『특성 없는 남자』(한국어 완역본 근간)를 소개한다.
이 작품이 우선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고 하면서, “‘지식의 획득과 삶의 상실’이라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이 ‘소설의 테마’를 이루고 있고 이에 대해 무질이 “소설을 통한 ‘세계의 정신적 극복’을 선언”했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구조적 혁명’의 측면에서는 작가가 “배경의 제거”와 “모든 것이 테마”라는 기치 아래 소설에서 “‘시간의 차원,  진행의 차원, 시간적인 전개’를 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서사의 전통적인 기법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이야기의 단초가 “끊임없이 에세이적인 것에 의해 중단되고 ‘내용은 무시간적으로’” 퍼져나가도록 하여 “엄청난 규모의 에세이”가 될 위험마저 감수했다고 말한다.
끝으로 “유럽 문화라는 관점에서 소설”을 돌아볼 때 이 소설이 현재 “유럽의 정신적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의 인문주의 전통, 유대교 기독교의 전통, 계몽주의 정신”을 고루 담고 있다고 평한다.

지난 6월 12일, 신지영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5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br>
지난 6월 12일, 신지영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5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들어가는 말 

현 시대에서의 실존의 복잡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 견해로는, 생략의 기술이 요구됩니다. 응축의 기술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끝없이 길다라는 덫에 빠지게 됩니다. 『특성 없는 남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세 소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내가 이 소설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이 책이 미완성이라는 사실까지 감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밀란 쿤데라가 「구성의 기술에 대한 대화」(1986)에서 한 이 평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대표작 『특성 없는 남자(Der Mann ohne Eigenschaften)』(1930/32)를 너무나 적확하게 표현한다. 이는 이 소설이 쿤데라뿐 아니라 잉에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근대의 고전(1995년 이 작품의 영역본 『The Man without Qualities』 출간에 즈음하여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소설이 영어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불어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20세기 문학의 삼위일체 중 하나”라고 소개한다), 근대 세계에서의 실존의 복잡성을 다룬다는 소설의 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질이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어려운 작가인 이유, 즉 소설의 엄청난 규모와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이후 쿤데라는 에세이집 「배신당한 유언」(1993)에서 『특성 없는 남자』를 무질의 동시대인이라 할 수 있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마의 산(Zauberberg)』(1924)과 비교하면서 구체적으로 평가한다. 1913년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 소설이라는 점, 관념적 대화와 사유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념 소설로 불릴 수 있는 두 소설을 두고 쿤데라는 만의 소설을 “묘사소설”, 무질의 소설을 “사유 소설”로 명명하는데, 전자에서는 관념적 대화들이 사실주의적인 장식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반면, 후자는 “사고를 바탕에 둔 소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의 소설에서 소설의 공간적 무대인 다보스가 사실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되지만 무질 소설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빈은 “소설의 한 배경이 아니라 소설 테마들 중 하나다.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분석되고 사유된다.” 

만과는 달리 무질에게서는 모든 것이 테마(실존적 질문)가 된다. 모든 것이 테마가 되면 배경은 사라지며, 입체파 화폭에서처럼 전경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배경의 제거에서 나는 무질이 이룩한 구조적 혁명을 본다.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

2. 실존적 질문과 구조적 혁명 

1) 실존적 질문 

제1장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13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상류층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속도와 소음으로 가득 찬 대로를 걸어가다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트럭에 치인 부상자는 구급차에 실려간다. 시간과 장소, 등장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면서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소설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장의 특이점은 “1913년 8월의 어느 화창한 날”이라는 “삶의 사실”이 “고기압, 저기압, 등온선, 등서선, 일몰과 일출뿐만 아니라 금성, 토성 고리의 조도 변화, 수분 증발량” 등 수많은 과학적 설명들과 대립되어 제시된다는 것이다. “붉다”에는 “파장” “마이크로 밀리미터”라는 물리학적 용어가 제시된다. 심지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상기시키는 “의식의 속옷 층위”라는 심리학 용어도 등장한다. 더욱시 삶의 사실들이 개인적이고 일회적인 반면에 과학적 사실은 날씨가 “정상이었다” “예고와 일치했다”에서 보이듯이 보편적이고 합법칙적이며 반복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교통사고에서 귀부인이 느끼는 “불쾌감”, “연민”, 즉 개인적 체험도 “제동 거리”, “구급차” 또는 “통계”를 통해 개인이 더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는 기술적, 사회적, 통계적 문제가 된다. 이로써 “열에서 튀어나온” 예외적 사건은 다시 “합법칙적이고 질서에 맞는 사건”으로 되고 “특별한 것을 체험했다”는 귀부인의 감정은 “부당한 감정”이 된다. 무질은 이를 소설의 다른 장에서 “체험이 인간에게서 독립했다”고 표현한다. 

더 이상 체험을 자신과 관계시킬 수가 없으므로 “그 악명 높은 삶의 추상화”가 시작된다. 무질은 편지에서 이를 “우리의 현재 세계에서는 대부분 그냥 도식적인 일 (똑같은 일)만 일어난다. 즉 전형적인 것, 개념적인 것, 게다가 본질이 빨려나간 것”. 개인들도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학문을 통해 “전형적 태도의 전형적 꾸러미”로 해체된다. 그래서 위의 두 남녀가 에르멜린다 투찌이고 아른하임인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이들은 더 이상 개성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몇몇 반복되는 타입들의 변형들”일 뿐이므로. 이렇게 해서 “남자 없는 특성들의 세계”가 생겨난다. 무질은 소설의 또 다른 대목에서 이를 “인격의 통계적 탈마법화”라는 명칭으로 묘사한다. 

“남자 없는 특성들의 세계”는 곧 “특성 있는 남자”들의 세계와 동의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질서 지워진 세상에서 개인의 감정은 점점 설 곳을 잃게 되고 합리화된 삶의 “비합리화된 잔재”로 남게 된다. 이것이 과학적 설명이 메울 수 없는 삶의 “균열”, “구멍”이다. 소설에서 이런 잔재는 이른바 “마이너스 유형들”인 창녀 레오나와 간통녀 보나데아에게서 보인다. 이 잔재는 직업이나 결혼으로 질서 잡힌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감정, 즉 레오나에게서는 “모든 과잉, 허영, 낭비, 자부심, 질투, 쾌락, 명예욕, 헌신”, 보나데아에게서는 “마음”이 폭식 또는 색정증 등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병적인 행동으로 그 탈출구를 찾는다. 특히 정신병자이자 창녀 연쇄 살인범인 모스브루거는 그 범죄와 광기를 통해, 바타유 식으로 말하면, 동질화된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 이성의 타자 그 자체다. 

“지식의 획득과 삶의 상실”이라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 이것이 소설의 테마이고 무질은 소설 작업이 한창이던 1926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통한 “세계의 정신적 극복”을 선언한다. “여기서는 현대인의 실존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 제기되고 나아가 아주 새로운 그렇지만 가볍고 반어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심오한 방식으로 답변되고 있다.” 이제 실존적 질문이 철학이 아니라 고스란히 소설의 몫이 되었다. 

2) 구조적 혁명 

이제 “배경의 제거”, “모든 것이 테마”라는 무질 소설의 구조적 혁명으로 돌아가 보자. 보통 “늘 소설의 첫머리에 들어서는 상황은 이미 일어났거나 또는 곧 일어나게 될 다른 일을 지시한다.” 그러나 무질의 소설의 제1장의 제목, “특이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제목은 이러한 고정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장에서 일단은 소설의 기법에 맞게 이야기의 시간과 장소, 인물, 심지어 사건까지 제시되지만 이것들은 곧, 말하자면, 회수된다. “1913년 8월의 어느 화창한 날”은 이미 “구식”이고, 장소에 집착하는 것도 “유목 시대의 산물”이며, 도시 이름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되며, 이 속에서 개인은 그 의미를 잃고 대중 속으로 사라진다. 이 제목이 밝히는 대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도 이 두 남녀가 누구인지는 더 이상 밝혀지지 않으며 부상자의 운명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의 위기」라는 에세이에서 무질이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은 (겉보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개인적인 것, 그리고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든 것이 “정상”이고 “예보”에 맞고 우연적이지 않고 개인적 감정이 부당한 시대에는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소설이라는 형식은 이야기를 요구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아도르노가 말하는 소설의 역설적인 상황을 무질은 소설의 제1장을 통해 형상화한다. 이로써 우리는 쿤데라가 말하는 “구조적 혁명”에 다다랐다. 무질은 소설의 제1장에서 소설의 위기, 이야기의 위기 자체를 테마화하기 때문이다. 무질은 이 장을 통해서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기”라는 자신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장은 “소설 독서를 위한 일종의 사용 설명서”로 볼 수 있다.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겠다”는 것은 실상은 “이야기하는 문체의 포기”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역할이라는 것이 연대기적 나열을 통해 삶이 질서를 가진다는, 즉 빈틈이 없고 완결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공 울리히는 “이야기”, 즉 “특정하게 의미가 있고, […] 윤리적으로 완전한 행위”를 찾아가는 자이고 무질은 이를 “내가 어떻게 이야기에 이를까 하는 문제는 나의 문체의 문제인 동시에 주인공의 삶의 문제”라고 표현한다. 무질은 소설에서 “시간의 차원, 진행의 차원, 시간적인 […] 전개”를 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서사의 전통적인 기법을 포기하고 이로써 이야기의 단초는 끊임없이 에세이적인 것에 의해 중단되고 “내용은 무시간적으로 퍼져나간다.” 무질이 고백하듯이, “‘잉여적인 것’, ‘장광설 같은’ 설명, 이것이 사람들이 자주 내게 하는 비난이지만 […] 내게는 이 설명이 주안점!”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설은, 작가의 자조적 표현대로, “아예 소설이 아니고 엄청난 규모의 에세이, 마이스터 에세이”가 될 위험을 노정한다. 그러나 루카치가 근대의 소설은 (에포스와는 달리) “역사적 상황이 갖고 있는 모든 틈과 심연이 형상화에 끌어들여져야 하고 구성이라는 수단으로 덮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무질의 에세이적 문체는 현대의 실존을 형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1952년 로볼트 출판사의 무질 전집 출간에 즈음하여 「특성 없는 남자 — 라디오 방송용 에세이」를 쓴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이 소설에 대해 “일정한 스토리를 제공하는 소설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고 […] 엄청난 사고의 무게와 묘사의 직접성이 이 책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에세이와 단상들 그리고 울리히 및 십여 명의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내면적 자기 독백으로 이루어진 응집체입니다.”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시 한 번 바흐만을 인용하자면, “구성 면에서 20세기의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철저한 구도에 따라 짜여지고 정밀하게 조립된 작품 […] 무질은 정신의 전략가 […] 자신의 작품 구도를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매혹적인 지성의 전략가”다. 
 

3. 로베르트 무질 (1880-1942) 

무질이 사망한 지 7년 뒤인 1949년 런던의 타임스지는 무질을 “20세기 전반부의 가장 중요한 독일 소설가이자 이 시대에 가장 덜 알려진 작가”라고 칭한다. 무질은 토마스 만, 카프카와 함께 20세기 초 독일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다. 

1920년대 『특성 없는 남자』의 본격적인 집필 작업이 시작된다. 1921년 무질은 빈의 라주모프스키가세 20번지로 이주하고(거실 없이 방 2개인 너무나 소박한 집 바로 앞에 소설의 제2장에서 “특성 없는 남자의 집과 방”으로 묘사된 울리히의 성이 있다), 1938년 나치의 빈 입성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하기까지 17년을 거주하면서 소설 작업에 몰두한다. 『특성 없는 남자』 작업 전이나 작업 중에 단편집 『합일』(1911)이나 『세 여인』(1924)을 발표하고, 드라마 『빈첸츠』(1924)나 『몽상가들』(1929)을 공연하기도 하고, 전후에는 생계를 위해서 연극 비평을 비롯해 신문에 많은 글을 기고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그 일부가 『생전유고』(1935)로 출판된다) 그의 대표작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작업하고도 미완성으로 남은 『특성 없는 남자』다. 

4. “특성 없는 나라”와 “특성 없는 남자”의 평행운동 

“모든 노선은 전쟁에 이른다”라는 소설 구상에서 알 수 있듯이 무질은 1913년 8월에 시작하는 소설의 결말을 1914년 7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설정했다. 무질은 이 전쟁의 원인을 정치적, 사회적 측면이 아니라 심리적 측면에서 관찰하는데, 전쟁 직후에 쓴 에세이 「전쟁의 끝」(1918)에서 전쟁이 “보다 고귀한 삶의 내용의 결핍”으로 인해 촉발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소설 작업이 진행되던 중 쓴 에세이 「무기력한 유럽」(1922)에서 무질은 전쟁 전의 상황이 전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무질은 1913년으로 시작되는 소설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한 시기를 그렸다기보다는 앞으로 올 미래, 또 하나의 전쟁(2차 세계 대전)을 예견한 것이다. 쿤데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작품이 “1914년에 시작되어 지금[1990년대] 우리 눈앞에서 막을 내리는 듯 보이는 근대의 이 최종 시기의 인간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통계 수치로 바꿔버리는,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기술의 통치 […] 기술에 도취된 세계 최고 가치로서의 속도, 도처에 널린 불투명한 관료 계급(무질의 관료들은 카프카의 관료들의 둘도 없는 짝꿍이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끌지 못하는 이념들의 희극적 불모성, 예전에 문화라 불렸던 것의 상속자인 저널리즘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 

그리고 쿤데라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돈의 지배다. 

. . . . . 

4. 나가는 말 

소설 작업이 본격화되는 1923년 군사 학교의 공무원 자리를 거절한 이후 무질은 죽을 때까지 19년 동안 문학 작업에서 나오는 불안정한 수입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질 협회와 지인들의 후원금으로 살아가게 된다. (토마스 만도 무질 후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쓴다). 1931년 소설의 제1권이 나온 지 6개월 남짓 후 로볼트 출판사가 파산하고 작가들에게 원고료 지급이 중단되면서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최고조에 달하고 1932년 가을 무질은 “돈이 없다는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라고 적고 있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에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협회는 해산되고 그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된다. 1938년 나치가 빈에 입성하고 무질은 1939년 제네바로 이주한다. (무질은 1938년 8개의 장을 피셔 출판사에 넘기지만 전쟁으로 인해 출판되지 못한다.) 무질은 1942년 제네바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장례식에는 여덟 명만이 참석한다. 1943년 아내 마르타가 소설을 미완성 유고를 자비로 출간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고 1950년대 프리제의 전집 출간으로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소설은 지금의 유럽의 정신적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의 인문주의 전통, 유대교 기독교의 전통, 계몽주의의 정신을 모두 담고 있다. 우선 울리히가 제기하는 “올바른 삶”의 문제는 “좋은 삶”을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소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삶의 의미란 “누군가에게 좋은 것(Agathon)”, 그 가운데 최고의 것인 “행복(Eudemonie)”을 획득하는 것이다. (아가테(Agathe)라는 이름의 함의는 이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남자’의 탁월한 삶의 형식을 “쾌락의 삶(bios apolaustikos)”, “실천적인 삶(bios praktikos) (또는 정치적 삶),” “이론적 삶(bios theoretikos)”으로 보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의 삶의 형식은 “이론적 삶”이다. 이론은 “본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의 사고하는 관찰”, 즉, 물리학, 형이상학, 수학 등의 활동을 의미한다. 무질이 형상화한 울리히의 삶은 “이론적 삶”이라고 볼 수 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방식은 “실천적 삶”의 양상도 띤다고 볼 수 있다. 아가테와 울리히가 각각 대변하는, 감정의 두 가지 전개 방식은 기독교에서의 논의되는 올바른 삶의 방식 즉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대변한다. 울리히와 아가테의 삶의 비전인 “천년왕국”은 성경에 나오는 신화로 기독교적 이념이다. 특히 무질 작품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상태”는 에커하르트를 비롯한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에 있다. 마지막으로 계몽의 변증법으로 대변되는 실증주의적 이성에 대한 비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합일시키는 힘을 이성을 수단으로 부활시키려는” “근대의 기획”으로 볼 수 있는 울리히의 유토피아 구상에서 무질은 근대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나아가 모스브루거라는 인물에게서 보이는 성과 광기의 발견은 니체에서 바타유를 거쳐 푸코에 이르는 후기 구조주의의 사고의 맥락에서 볼 수 있고 더욱이 ‘특성 없음’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탈근대(Postmoderne)의 콘셉트를 선취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유럽은 2차 대전 후 동서의 진영 대립이라는 “이념들로 무장한 도덕 평화의 상태”를 넘어 탈국가적, 탈민족적 공동체 질서인 유럽연합을 이룩했다. 무질 소설의 다민족 국가 카카니아가 다시 재현되는 모습이다. 27개 회원국을 가진 유럽연합은 이미 정치적, 경제적, 행정적으로 하나의 확고한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2010년 그리스 발 금융 위기로 촉발된 유럽연합 내 국가들의 민족주의는 2015년 이른바 “난민 위기”로 강화되면서 한편으로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의 득세로 이어졌고, 다른 한편 “유럽 요새(Festung Europa)”로 상징되는 유럽의 “초국가적 집단이기주의”를 초래했다. 급기야 2020년 1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초국가 공동체 유럽연합은  이제 붕괴와 공고화의 기로에 서 있다. 카카니아처럼 유럽연합도 통일하는 이념의 결핍이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2001년 이후 유럽의 모토는 “다양성 속에서 하나된 힘으로(United in Diversity)”인데, 이는 다민족 공동체 카카니아의 모토 “통일된 힘으로(viribus unitis)”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 유럽을 통합하는 이념은 없는가? 최근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메나세(Robert Menasse)는 그의 소설 『수도(Die Hauptstadt)』(2017)에서 무질의 카카니아와 평행운동을 소환하면서 민족주의의 극복과 유럽 이기주의의 극복에 필요한 하나의 이념, 유럽을 통합하는 이념이 “홀로코스트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부정에 기초한 건립 신화”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유럽은 홀로코스트라는 초유의 범죄를 저지른 후에야 하나의 통일하는 이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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