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인문학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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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인문학의 역설
  • 강희정 서강대·미술사
  • 승인 2021.07.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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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지난 몇십 년간 인문학은 계속 위축되었다. 우선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 정원이 줄었다.  제일 먼저 학과 통폐합의 표적이 된 것도 인문학이었다. 국문학과가 아예 없는 대학도 적지 않고, 어문학과들은 융합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컨텐츠와 결합하거나 문화학과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으로 개명됐다. 철학과가 남아 있는 대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고, 사학과 역시 설 자리가 계속 좁아지고 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일부 인문학 학과들도 통폐합이 예정되어 시한부로 유지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정년퇴임 교수의 후임을 뽑지 않음으로써 학과를 없애는 방식이 흔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인문학의 필요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회와 경제, 생산과 소비에 직접적 효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투입 대비 산출의 성과 또한 당장 눈에 띄는 수치로 계량되기 어렵다. 인문학 졸업생의 취업률은 상대적으로 낮고, 인문학의 효율성은 의심받으며, 과학기술 주도의 급변하는 세계에서 문·사·철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비판이 마치 ‘우국충정의 말씀’처럼 여겨지는 세태이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대학들은 앞 다퉈 인문학을 방기했고, 정책당국은 일자리와 밥벌이를 내세워 인문학 무용론을 방조했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들어보자. 이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된 진실이다. 인문학이 밥을 떠먹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르는 일도, 몰랐던 일도 아니다.  

현재와 같은 감염병 시대가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종료된 그 언젠가의  세계가 이전과는 다를 것이란 전망, 그리고 달라져야 할 것이란 당위에 관해 동과 서를 막론하고 이견이 없다. 이러한 지구적 공감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인문학이다. 팬데믹을 이겨내고 코로나 이후를 상상하기 위해서 인문-사회-과학-예술 등 학문의 균형발전과 학제 간 소통이 불가피하다는 당위에 관해 이견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와 학계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 

인문학의 위기는 일회성의 대증요법으로 해소될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기울어진, 그것도 아주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기존 학문 분야별 지원체계를 이공계와 인문사회계의 동반 성장이 가능하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좋은 출발일 수 있다. 지구촌을 휩쓰는 한류 열풍만 해도 그렇다. 과학기술의 도움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서사의 뿌리가 인문학에 있음을 우리는 한류에서 거듭 확인한다. 오늘날 한류가 지난날 인문학의 성취에 자양분을 대고 있다. 현재와 같은 우리 인문학의 빈곤에서 내일의 한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포스트 팬데믹과 그린 뉴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학문 지원체계에서 인문학의 위상은 눈 밖에 나 있다.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있어도 인문사회자문회의는 없다. 정책당국에 인문사회계 학문 분야의 목소리가 전해질 통로 자체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밤마다 역사학자와 철학자 등 인문학자를 불러 부지런히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박정희 시대를 극복한다면서 인문학 진흥의 가치마저 극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의 유산은 ‘인문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지만, 정책 당국은 인문사회학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민주화 시대의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2016년에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가 제정한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은 그 역설을 잘 보여준다.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에 관한 중·장기 정책목표 및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하겠다면서, 이 법은 학술로서의 인문학과 수용으로서의 인문정신을 분리했다. 인문정신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 같은 모호한 개념도 문제지만, 학술로서의 인문학과 유리된 인문정신이란 실로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 및 교육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법령의 보완이 필요한 이유다. 

2020년 정부에서 지원한 전체 R&D 예산 가운데 인문사회 분야 지원 예산은 1.2%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경영학과 법학을 비롯한 이른바 ‘문과’의 모든 학문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나머지 98.8%가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에 집중된다. 이공계 연구지원의 중요성은 얼마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과 대 이과 학문 분야 지원이 1.2% 대 98.8%라는 비현실적 불균형마저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수치로만 본다면 미래를 위한 기초학술정책에서 인문사회 분야는 버려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사회 분야는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사회경제적 양극화 등 복합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다. 문제는 국가사회가 기술과 경제만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벚꽃 피는 순서로 문 닫는다’는 말처럼 위기에 처한 지방대학에서도 극한상황에 몰리는 것은 인문학이다. 여기에도 역설이 작동한다. 인문학이 살아야 대학도 살고, 지방도 살고, 우리 사회도 산다.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의 통찰력, 인간에 대한 애정, 공동체의 윤리의식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법적, 제도적, 예산 지원 체계의 재점검이 시급하고도 절실한 이유이다. 


강희정 서강대·미술사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인문사회총연합회 사무국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중국 불교미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편과 깡통의 궁전: 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미』, 『해상 실크로드와 문명의 교류』, 『클릭 아시아미술사』,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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