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별칭은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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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별칭은 ‘사자’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7.1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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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58)_ 영웅의 별칭은 ‘사자’

 

사자를 일러 ‘백수의 왕’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집단의 우두머리에게는 흔히 사자라는 별명이 붙는다. 영국의 리처드 1세(1157~1199년), 그를 도와 노르망디를 침공한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이 다 같이 사자왕, 정확하게는 ‘사자의 심장(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을 지녔다. 특히 리처드 1세는 용맹함의 표상으로 중세 기사 이야기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뭇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등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느라 재위기간(1189~1199년) 동안 본국인 영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따라서 비록 용맹과 관용을 겸비한 중세 최고의 기사였을지라도 그가 통치자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왕위를 놓고 벌어진 부자 및 형제간의 불화와 쟁투 또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는 왕이 된 지 10년 후 리모주 자작령의 살뤼 성을 침공하다가 석궁에 맞아 죽는다. 싸움 잘 하는 사나이로서는 한참 나이인 42세 때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어린 시절 로빈훗을 읽으면서였다. 

오스만은 물론 셀주크 왕조 투르크 제국의 황제에게도 사자는 매력적인 별칭이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두 번째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1029~1072년)의 본명은 무함마드 빈 다우드 차그리였다. 武勇과 뛰어난 전투력으로 인해 그는 투르크어로 ‘용감한 사자’라는 의미의 별명 알프 아르슬란을 얻었다. 그의 아들 Izz ad-Din Arslan-Argun과 Arslan-Shah도 사자였다. 넷째 아들의 이름은 늑대라는 뜻의 Bori-Bars였다. 자고로 남성은 사납거나 용맹해야 했음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사내다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남을 본다.

1071년 8월 26일 비잔틴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오늘날의 터키 무시 주 말라즈기르트) 부근에서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간에 전투가 벌어진다. 이름 하여 만지케르트 전투. 

그것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동방과 서방을 모두 지배했던 그 유명한 로마 군대는 이제 한 줌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병사들은 가난하고 쇠약할 뿐 아니라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칼 같은 무기다운 무기는 없고 꼬챙이와 낫이 고작이었는데, 그마저도 평화로운 때는 지급되지 않았다. 어느 황제도 전투에 참여해 본 지가 워낙 오래되었기 때문에 군마를 비롯하여 각종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병사들은 허약한 겁쟁이에다가 별로 쓸모가 없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생활비를 받지 못했고 곡식을 구입할 통상적인 급료도 받지 못했다. 군대의 軍旗조차 맥없이 늘어지고 연기에 그을려 더러워졌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로마군이 이런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 남경태 역, 비잔티움 연대기, 585쪽)

 

교전의 결과는 싱거웠다. 1, 2차 전투에서 우위를 보이던 비잔틴 제국 군대가 3차전에 이르러 무참히 패하고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가 셀주크 투르크의 포로가 된다.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국가 방어능력이 심각하게 약화되고, 내적 갈등과 경제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는 점차 투르크화 되어간다.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 강 유역을 주 무대로 유목생활을 하던 셀주크 투르크인이 수립한 이슬람 제국의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피투성이에 옷은 갈가리 찢긴 채 포로가 된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4세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곧 정체를 알아채고는 황제의 목덜미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그로 하여금 땅바닥에 입을 맞추도록 강요한다. 이때 둘 사이의 대화가 유명하다.

알프 아르슬란: 내가 만일 포로가 되어 당신 앞에 놓이게 되면 어찌 하겠소?
로마노스: 그렇다면 아마 나는 당신을 죽일 거요. 어쩌면 콘스탄티노플 거리에 당신 시체를 걸어둘지도 모르고.
알프 아르슬란: 내 처벌이 훨씬 무겁군. 당신을 용서하고 자유롭게 풀어주겠소. 

 

로마노스 황제는 일주일가량을 술탄의 포로로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술탄은 황제를 자신의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게 했다. 그러면서 안티오크, 에데사, 히에라폴리스, 만지케르트 등의 영토 양보에 동의하도록 했다. 無學이고 따라서 문맹이었을 투르크 유목민 오구즈족 출신 술탄의 사람 다루는 술책이 남다르다. 술탄은 또 승자에 대한 배상금으로 황제에게 금괴 천만 개를 요구했다가 황제가 너무 과하다고 하자 1차로 백오십만 개를 선지급하고 매년 36만 개의 금괴를 바치는 것으로 조건을 변경한다. 자신의 아들과 황제의 딸 간의 결혼동맹도 맺는다. 그리고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갈 때, 온갖 선물에 두 명의 장군과 백 명의 맘룩(Mamluks: 노예군인)을 붙여 호위를 한다. 무슬림 역사에서 그에게 가장 위대한 명성을 가져다준 역사적 사건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카툰(황비)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그의 삼촌 투그릴의 미망인인 아가 카툰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그루지아 왕 바그랏 4세의 조카딸인 사파리야 카툰이다. 이처럼 유목민은 아버지나 형의 유고시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부인,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풍습이 있다. 후자인 사파리야 카툰은 후일 재상인 니잠 알물크와 재혼한다.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음에도 투르크족은 여전히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버리지 않았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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